일본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분기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사에서는 중요한 사건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을사정변 즉 잇시노헨(乙巳の変 : 645)]과 진신노난[임신의 난(壬申の亂 : 672)]입니다. 잇시노헨은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가져왔습니다. 이 사건은 메이지 유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등과 더불어 일본 역사의 3대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간략하게나마 다이카개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만 여기서도 다시 한번 봅시다. 일반적으로 다이카 개신은 중국의 유학생과 유학승(遊學僧)들의 지원을 받은 궁중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천황중심의 율령(律令) 국가체제를 확립, 당의 행정조직과 제도들을 본받아 유교적 중앙집권제를 확립하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17)
잇시노헨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소가씨의 본종가가 멸문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가씨 전체가 전멸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소가씨는 수백년간 사실상 일본의 천황보다도 더 큰 권세를 가진 귀족이었습니다. 국가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지나치게 강대해진 권신(權臣)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거의 백여년간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권신을 제거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로 보면 소가씨는 마치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이벌이 없었던 것이죠.『일본서기』에서는 "황후가 천황(교코쿠 천황)에 즉위하였다. (외형적으로 보면) 소가노에미시(蘇我蝦夷)가 대신으로 (정권을 담당하는 것은) 동일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아들 소가노이루카(蘇我入鹿)가 스스로 국정을 잡아서 그 위엄이 아버지 보다 더욱 강했다. 이 때문에 도적도 그의 위세에 두려워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못했다."라고 합니다.18) 그 뿐만 아니라 소가노에미시는 자신의 조상들을 모신 사당을 카츠라기(葛城)의 고궁(高宮)에 세우고 팔일무(八佾舞) 추게하였고 온나라 백성을 동원하여 이 두 부자의 능(陵)을 미리 만들었다고 합니다.19) 팔일무란 나라의 큰 제사(祭祀) 때에 추는 춤으로 악생(樂生) 64인을 정렬시켜 아악(雅樂)에 맞추어 추게 하는 문무(文武)나 무무(武舞)로 규모(規模)가 매우 큽니다. 오직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하의 세력이 이처럼 지나치게 강대하니 이를 제거를 해야 하겠는데 이것이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해치운 사람이 바로 나카노오에입니다. 나카노오에는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 646)의 주역이자 불소불위의 백제계 신권세력인 소가씨 본종가를 멸문시킨 영웅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 [그림 ④] 텐지 천황 |
당시에는 수나라나 당나라에 건너간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국제적이며 개혁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일본은 매우 국수적이었습니다. 나카노오에는 이들 유학생들을 결집하여 세력을 형성하였고, 기회를 엿보던 중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태극전에서 소가노이루카(蘇我入鹿)를 주살하고 그 일족을 모두 참살합니다.
▲ [그림 ⑤] 소가이루카의 암살 |
그런데 이 다이카 개신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소가이루카의 암살 = 소가씨 본종가의 몰락 = 다이카 개신'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열도에서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는, 「다이카 개신」으로서 가르치고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다이카 개신'이라는 용어는 한마디도 사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아가 다이카 개신이 얼마나 실질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653년에 나카노오에 황자는 나니와쿄(難波京 : 현재의 오사카)의 고토쿠 천황을 도와주지 않은 채 아스카로 돌아갔고, 이내 고토쿠 천황은 서거(653)했으며 4년 뒤에는 그의 아들 아리마(有間) 황자도 숙청되었기 때문입니다(아리마 황자의 숙청 과정은 매우 비극적인 것으로 마치 세익스피어의 비극을 보는 듯도 합니다.20) 어쨌든 이와 같이 나카노에는 을미정변 이후 자신의 정책에 반항하거나 방해가 되는 라이벌들을 차례차례로 말살하여 한걸음 한걸음 정권을 굳혀 갑니다).
더구나 『일본서기』에 나타난 개신의 여러 가지 법제가 오히려 그 시대의 것이 아닌 다른 시대의 것들을 옮겨 놓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서기』의 편찬자가 의도적으로 다이카 개신을 과장하고 지어내었다는 말이죠. 키타야마 시게오(北山茂夫) 교수는 "『일본서기』가 (다이카) 개신의 조라고 일괄하여 설명하고 있는 제법령은 명확하게 이 당시의 제도나 법령이 아니고 후대의 법제 자료를 차용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21) 이것은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을사정변으로 국가의 흐름이 크게 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다이카 개신 정부가 친신라·친당 정책을 수행했다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사이메이 천황이나 나카노에 황자의 성향으로 봐서는 추진하기 어려운 정책들입니다. 물론 초기에는 분명히 그럴만한 요소가 있습니다. 고토쿠 천황 정부는 당나라 유학생 출신인 다카무코노구로마로(高向玄理)를 신라에 파견(646)하는데, 이것은 야마토 정부 내에서 반당나라 외교노선에 대한 우려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지나치게 반도부여(백제) 일변도의 정책에 대한 반작용입니다. 당나라와 신라는 관계가 친밀한데 반하여 백제는 반당나라 세력으로 지목되었고 이것은 일본으로 봐서는 큰 부담이 될 수 있죠(왜냐하면 당시의 당나라는 주변 나라들이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그 다음해인 647년, 신라의 김춘추가 일본에 와서 양국관계의 개선에 대한 일련의 시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반도부여(백제)를 무시한 이 같은 외교가 성공적으로 진전되기는 어려웠습니다. 즉 친당·친신라 외교를 추진하는 고토쿠(孝德) 천황 정부에 대한 반발도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655년 나카노오에 황자가 사이메이(齊明) 천황을 옹립한 후 야마토 정부는 다시 더욱 강렬하게 친반도부여(친백제) 정책을 수행합니다.
타무라 엔죠(田村圓澄) 교수는 "소가씨 본종가의 타도와 개신 정책의 실시는 일단 별개의 일이다."라고 합니다. 이 두 사건은 시간적으로는 연속적으로 일어난 듯해도 그 내용을 보면 별로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카노에(中大兄) 황자가 소가씨를 제거한 직접적인 원인은, 나카노에 황자가 왕권을 확실히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고 개신 정책은 정변 후에 급조된 것이라고 합니다.22)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을 바꾸어 이제부터는 이 시기를 좀더 포괄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겠군요.
일본 고대사의 여명기에 야요이 시대로부터 고분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왕권이 형성되었지만, 국가로서의 체제가 확립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열도 지역에서는 오래전에 이미 정착하여 토착화된 사람들도 있고, 이들 가운데서 호족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한반도로부터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이주하여 이들 가운데도 특정 지역에서 뿌리를 내려 강대화된 호족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부여계가 집중적으로 남하하여 열도로 이주함으로써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세력들도 고구려계, 신라계, 부여계 등으로 복잡하였을 것이고 열도의 호족들도 이 같은 정치 성향을 복잡하게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 복잡한 정치세력들은 서로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투쟁을 전개합니다. 킨메이 천황 당시에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투쟁은 이주민 호족과 토착화된 호족의 대립의 전형적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소가씨는 반도 부여인과 깊은 관계를 가져, 조정의 재정면을 담당하는 신흥 씨족이면서 보다 세련되고 국제적이었던 반면, 모노노베(物部氏)씨는 군사·경찰·제사를 담당하면서 보다 토착적이고 국수적인 씨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가씨와 모노노베간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소가씨가 야마토를 넘어 지방에 까지 세력을 확대시키면서 권력 투쟁은 좀더 복잡한 양상을 띱니다. 그래서 수많은 정치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이합집산을 하면서 거대한 투쟁으로 전개된 것이 아마도 6세기 말에서 7세기부터인 듯합니다.
즉 6 세기 후반부터 7 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기나이(畿内) 지역에 권력투쟁이 극대화되고 있었다는 점을 먼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정점에 바로 소가씨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에 기나이에서는, 대왕권을 둘러싼 투쟁이 격렬해지고 이에 따른 각 부족과 호족들 사이의 이합집산도 그 도를 더해 갔습니다. 특히 7세기 전반에 소가씨의 세력이 정점에 달합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시기에 여러 정치세력들은 서로 견제하고 이합집산을 하면서 보다 견고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한 움직임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실권을 장악한 소가씨는 소가노이나메(蘇我稻目)와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대에 이르러 자기의 딸이나 친족의 여자들을 대왕가로 보내어 권력층을 두텁게 해나갑니다. 그런 과정에서 야마시로(山背) 황자의 가계를 전멸시켜버립니다. 이에 천황가(부여계 왕가)의 위기라고 판단한 나카노에와 나까또미노까마따리(中臣鎌足)는 645년 6월, 위계(僞計)를 이용하여 소가노이루카를 극적으로 제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사정변)에 대해 정변으로 보는 시각보다는 오히려 호족들간의 대립항쟁이 극대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즉 이 시기의 야마토 지역은 부여계의 황권이 약한 상태에서 여러 호족들이 대립하는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화산(청황권의 광대함)이 폭발하기 직전의 상황이라고 할가요? 그러니까 가도와키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을사정변이 단순히 나카노에와 소가이루카의 대립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가도와키 교수는 7 세기의 일본의 문제는 이들의 대립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내려온 지배 체제의 기초를 무너뜨리면서 촌락의 지도권을 잡기 시작한 가부장층(家父長層)과 호족의 대립이 나타나고 있었고 나카노에도 소가씨(蘇我氏)도 결국은 호족이며 이들은 지배계급으로 만나 지배권을 두고 쟁패를 벌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는 쇼토쿠태자의 후손인 야마시로(山背) 황자, 소가노이루카, 가루(輕) 황자, 후루히토(古人) 황자 등이 강력한 세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춘추전국처럼 세력들이 서로 경합하는 상황이었죠. 이 와중에서 소가노이루카가 야마시로 황자를 제거해버리자 나카노에(中大兄)는 어부지리를 얻은 셈으로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온 것이죠.23) 아마 나카노에는 어머니의 권력을 적절히 이용하여 이들 세력들과 연합하여 소가노이루카의 제거에 성공한 듯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때까지는 사이메이 천황의 세력이 강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을 보면 사이메이 천황 - 나카노에(텐지 천황)는 소가씨의 힘으로 대왕위(大王位 : 후일의 개념으로는 천황위)를 차지하지만 아직까지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죠. 그렇지만 이 모자(母子)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결국 소가씨를 제거합니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사이메이 - 나카노에의 권력이 강대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실력자인 가루 황자에게 황위를 일단 양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사이메이 천황은 분명히 자기의 아들을 대왕(천황)이 되게하려했을 것입니다. 양위(讓位)라는 것은 전례도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들 모자가 이 때까지도 기나이 지역을 통일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일단 나카노에는 작전상 후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 타케미츠 마코토(武光誠) 교수는 "고토쿠(孝德)의 즉위는, 결코 나카노에나 나카토미의 책략이라기보다는 고토쿠 천황 자신의 의사와 그것을 지지한 이시카와마려(石川麻呂) 등의 의견에 의해서 실현되었다고 추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4)
결국 열도에서의 길고 지루했던 용들의 전쟁은 나카노에에 의해 수습됩니다. 부여계인 나카노에 황자를 중심으로한 세력들이 각처의 용들을 누르고 강력한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것이지요. 이들 용들은 잇시노헨(乙巳の変)에서 대회전을 치루고 진신노난(壬申の亂 : 672)에서 대미를 장식한 것이죠. 대회전의 승리자는 나카노에(텐지천황) 황자였고, 대미를 장식한 사람은 텐무 천황이었습니다. 나카노에 황자는 부여계의 황통이 야마토 조정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성장하게한 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카노에(텐지 천황)는 소가씨 본종가(本宗家)를 멸문시킨 후 주변의 라이벌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기나이 전역을 강력하게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반도부여 부흥군(백제 구원군)의 소집은 이들 권력을 시험하는 하나의 무대였을 것입니다. 호족들이 난립한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바로 이 시기에 강력한 천황권이 성립되고 있음이 감지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텐지 천황은 최초의 천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른 바 영웅의 탄생이지요.
참고로 천황이라는 호칭과 일본의 등장은 텐지 천황 시대 직후 즉 텐무시대에 나타납니다. 천황이라는 군주에 대한 호칭은 비조정어원령(飛鳥淨御原令 : 681∼685)의 공식령(公式令)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사료상으로 보면 대체로 682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천황에 대한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나라현 장곡사(長谷寺)에서 소장하고 있는 법화설상도(法華說相法圖)에 있는 "奉爲飛鳥淸御原大宮天下天皇敬造"라는 문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대체로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한 이후 7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삼국사기』로 구체적으로는 671년에서 698년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671년 신라의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이었던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왜국(倭國)'이라는 용어가 보이지만 698년 효소왕 당시에는 "일본국 사신"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천황'과 '일본'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텐무 천황(672~686)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텐지 천황을 최초의 천황이라니 지나친 표현이라고 비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이 모든 환경을 조성한 사람이 바로 텐지 천황(661~672)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카노에 황자(텐지 천황)는 최초의 천황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텐지천황과 텐무 천황 이전의 모든 천황들은 그저 대왕(大王), 왕(王), 대군(大君) 등으로 불렸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저 호족 가운데 유력자라는 식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스이코 천황에 대해서 소가노우마코는 술잔을 올려 "쉬고 계시는 우리 대군(大君)이 숨어 계시는 광대한 궁전"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25) 실제로 '천황'이라는 황위의 계승이 '다이죠제(大嘗祭)'라고 하는 즉위 의례에 의해서 제도화되어 가는 것은 텐무 천황·지토 천황 조 이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고사기(古事記)』나『일본서기』에 나타난 천황들도 야마토 지역만의 대군이나 호족의 유력자라고 보기도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극단적으로 보면 소가씨와 텐지 천황의 싸움도 대왕과 대왕의 싸움이나 호족들 간의 투쟁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텐지 천황이 실질적인 천황의 권력의 토대를 닦았다는 말입니다. 쿄토의 천용사(泉涌寺)는 13 세기에 사조 천황(四条天皇)를 모신 후 천황가의 보리사(菩提寺)로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에서 모시는 천황은 텐지천황 이후의 텐지계 천황 뿐입니다. 이 곳에는 텐지 천황 이전의 천황도, 텐무천황으로부터 쇼토쿠(稱德) 천황에 이르는 텐무계 천황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26) 다시 말해서 천황가의 시조를 텐지 천황으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텐지 천황은 반도부여(백제) 멸망 후에 대량의 망명인을 받아들여 오오미(近江)에 배치하여 반도부여를 적극적으로 포용함으로써 명실공히 전체 부여계의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텐지 천황이 백제인(반도부여인)들에게 특별히 대우하고 지원한 사실들이 상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도에서는 텐지천황을 마치 '백제 마니아'처럼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텐지천황은 부여계의 새로운 맹주로서 반도부여의 멸망 과정을 수습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천황권을 확립하면서 이제 단순히 왜왕(倭王)이 아니라 전체 부여계를 아우러는 새로운 일본(日本)의 천황(天皇) 즉 야마토노스메라미고토(やまとのすめらみこと)로서 즉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천황의 신성(神聖)이 더욱 강화되어 갑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지나면 천황은 바로 '살아있는 신(現人神)'으로 되어가는 것이죠. 이 새로운 왕조는 텐지천황의 사후 진신노난(壬申の亂)으로 일시적으로는 부여계의 직계가 후퇴하지만 텐지천황의 따님인 지토 천황(持統 天皇 : 686~697) 등을 거치고 나라시대 후반 텐지 천황의 손자인 고닌천황(光仁天皇)이 천황으로 추대되고 이어 칸무 천황이 그를 계승하여 텐지 천황계는 일본의 황실로서 완성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웅의 탄생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텐지 천황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호족들을 하나씩 제압하면서 천황권을 확립해간 분입니다. 텐지 천황은 수많은 라이벌들을 숙청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일본의 건설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텐지 천황과 그의 어머님 사이메이 천황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구축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으며, 그 집중된 힘을 총동원하여 반도부여(백제)의 구원에 바쳤고, 또 그로 인하여 정치적 역풍을 맞은 천황들입니다.
텐지 천황이 서거한 후 반부여계적인 정서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제 부여계는 다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같은 흐름은 칸무 천황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반부여계의 역풍의 진원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텐지 천황의 친동생으로 알려진 텐무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 부분을 살펴봅시다.
필자 주
(17)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는 이러한 권력 항쟁의 배경으로 '귀화인'의 동향을 빼서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견수사가 608(推古 16) 년에 파견되었지만, 그 때의 유학생 중에는 東漢直福因,高向玄理, 新漢人大国 등이 있었다. 유학승려로는 新漢人日文(旻), 南淵漢人請安、滋賀漢人恵恩、新漢人広済 등이 있었다.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백제의 才伎의 자손이라고 하는 恵日도 견수 유학생이었다. 그 대부분이 도래인(漢人)이며, 다카무쿠노구로마로(高向玄理), 미나부치노쇼안(南淵請安) 등은 무려 33년간이나 중국에 체재하여 수가 멸망하고 당이 들어서는 624년에는 신율령이, 637년에는 율령격식이, 각각 시행된 것을 눈앞에 견문하고 난 뒤 귀국하였다. 미나부치노 쇼안의 집이 개신파의 아지트가 되었고, 또 실제로 미나부치노 쇼안이나 다카무쿠노구로마로, 新漢人日文(旻) 등은 개신파의 적극적인 협력자로서 활동했다. 다카무쿠노구로마나 旻 등이, 개신 정부의 나라 박사가 된 것도 당연한 이치이다. 일찌기 소가씨는, 新来의 도래인(漢人)에 접근하여 정계를 제패하려고 했지만, 이번은 반대로 新来의 漢人의 흐름을 유학생이나 유학승려를 개신파가 장악함으로써 소가씨가 타도된 것이었다." 上田正昭『帰化人』(中公新書 : 昭和 51年)
(18) 『日本書紀』「皇極天皇」元年 正月
(19) 『日本書紀』「皇極天皇」元年 12月
(20) 사이메이(齊明) 4년 11월, 사이메이 천황이 와카야마의 시라하마온천[和歌山 白浜温泉]에 간 사이 소가노아카에(蘇我赤兄)가 아리마(有馬) 왕자를 부추겨서 역모를 도모하다가 책상 다리가 부러지자 아리마는 불길하다하여 중지하였는데 오히려 소가노아카에가 장정들을 이끌고 아리마 황자의 저택을 포위하고 포박하여 사이메이 천황에게 끌고가 문초를 당한 후 아리마 황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에 대해 가도와키데이지(門脇禎二)는 "당시 아스카에서 멀리 떨어진 이코마(生駒)의 집에 혼자 살고 있던 아리마 황태자(有馬皇子)는, 아버지 고토쿠 천황의 사후, 유년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게 몸을 대처해 왔다. 그러나 나카노에와 遠智娘(蘇我石川麻呂의 딸)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 벙어리인 탓인지 대왕 보황녀(사이메이 천황)가 특히 이 손자를 사랑했는데 이 왕자(建王子)가 죽으면서 아리마 왕자는 나카노에·오샤마(大海人) 이외에서는 가장 대왕 위에 가장 가까운 왕자로서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것을 헤아려인가 아리마왕자는 광인을 가장할 정도로까지 긴장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9세의 청년에게 소가노아카에(蘇我赤兄)는 사람들이 '천황의 세 가지 실정'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아리마 왕자에게) 궐기를 일으킬 것을 끊임없이 종용했던 것이다."(門脇禎二『飛鳥』(NHKブックス : 昭和 55年). 결국 아리마 황자의 처형 사건은 소가노아카에의 위계에 빠졌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보다는 사이메이 천황과 나카노에의 생각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키타야마시게오(北山茂夫)는 "아카에(赤兄)가 황태자의 라이벌로서 이목을 받고 있는 아리마 황자(有馬皇子)를 함정에 빠뜨리고 나카노에와의 관계를 한층 더 깊게 하려고 짠 연극이 이 사건의 본론은 아니었을까? 어린 왕자(아리마)가 감쪽같이 아카에(赤兄)의 모략에 걸려 버렸다."고 하고 결국 "이 사건은 아카에의 단독의 계략이 아니고, 미리 나카노에 황태자와 숙의 해 겉으로는 마치 소가노아카에 그 자신의 행동과 같이 보이게 하고 있었다." 北山茂夫『大化改新』(岩波新書 : 1979).
(21) 北山茂夫, 앞의 책.
(22) 田村圓澄 「大化改新 覚書」『九州史学15』 (昭和35年 3月号)
(23) 『古代専制国家』体系日本史(日本評論社 : 昭和 49年)
(24) "통설에서는, 을미의 변의 주도자인 나카노에와 나카도미가 그 후의 정국도 주도했다고 하는 것이지만, 그러면 무슨 이유가 있어 여제가 양위 해 효덕이 즉위했을까? 양위라고 하는 것은 그때까지 예가 없는 것이어서 나카노에에게 있어서, 선례를 파괴하면서까지 어머니인 여제를 퇴위 시킬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양위가 여제 스스로의 의사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나카노에에게의 양위이며, 효덕(가루 황자)에의 양위는 아니었던 것은 분명할 것이다. 효덕의 즉위는, 결코 나카노에나 나카토미의 책략이라기보다는 효덕자신의 의사와 그것을 지지한 이시카와마려(石川麻呂) 등의 의견에 의해서 실현되었다고 추정된다". 武光誠『古代女帝のすべて』(新人物往来社 : 1991)
(25) 『日本書紀』「推古天皇」20年 正月
(26) 天皇家의 菩提寺 泉涌寺에는 天武系天皇은 모시지 않는다. 泉涌寺에 있어서 위패가 놓여져 있는 것은, 天智天皇의 다음은 바로 光仁天皇이 되고 天武王朝(天武、持統、文武、元明、元正、聖武、孝謙、淳仁、称徳)8인의 위폐(位牌)는 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