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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구원의 여신, 사이메이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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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구원의 여신, 사이메이 천황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61> 미녀와 영웅 ②

(2) 백제 구원의 여신, 사이메이 천황

일본 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이메이 천황에 대해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그런데 이 부분들은 일본 고대사의 상당히 전문적인 부분이라서 한국인들이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알기 쉽게 요약하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을 건설한 주역을 텐지(天智) 천황 - 텐무(天武) 천황 - 칸무(桓武) 천황 이라고 할 때 이들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바로 텐지와 텐무의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세 분의 천황과 사이메이는 유난히도 부여(백제)와의 관계와 왕가의 혈통을 중시한 분들입니다. 특히 사이메이 천황과 텐지 천황은 백제의 부흥을 위해 전 일본의 국력을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쿠데타를 통해 등극한 텐무 천황은 외부적으로는 부여계(백제)와 다소 소원한 듯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혈통이 부여계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다져나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하면서 자신이 사이메이 천황과 백제 마니아 조메이(舒明) 천황이 아들임을 분명히 하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타당한 이야기입니다(텐무 천황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분석합니다).

여기서 텐지와 텐무의 관계나 당시의 사정을 알기위해서 사이메이 천황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의문투성이인 일본 고대사의 수많은 수수께기들 가운데서도 이 시대의 일들이 가장 복잡하고 말이 많습니다. 저는 그 복잡한 논쟁에 말려든다거나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들의 원류인 부여계가 어떻게 열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아마 수없이 많은 일본 고대사의 논객(論客)들이 보지 못한 부분을 제가 볼 수도 있고, 반대로 그들에게는 일상적인 얘기들을 제가 모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은 역사의 정점에서 살아간 시대의 여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친정인 소가씨(蘇我氏)와 아들 텐지(天智)와의 갈등 속에서 한편으로는 친정에 의존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대의 영웅이었던 아들 텐지의 손을 들어주어 천황가가 제대로 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이제 사이메이 천황의 일대기를 간단히 요약해 봅시다.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 592~628)에서 쇼토쿠 천황(称徳天皇 : 764~770)에 이르기까지 거의 2백여년 간 특이하게도 여제(女帝)들이 나타나 '여제의 시대'라고 하기도 합니다[주의 : 쇼토쿠(称徳) 천황과 쇼토쿠(聖德) 태자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이제 『일본서기』와 관련 자료들을 통해 사이메이 천황의 일대기를 봅시다.[이 과정에 나타난 일본 고대사 주요 쟁점들을 【쟁점】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이 부분들은 아직도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아마 영원히 미해결 과제로 남을 수도 있겠지요]

사이메이 천황(보황녀)은 스이코 천황과 비교한다면 천황의 직계 혈통이 다소 약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보황녀(宝皇女)는 다카무카왕(高向王)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아야(漢) 황자(皇子)를 낳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카무카왕(高向王)이나 아야 황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지금까지 논쟁이 극심한 상태입니다. 즉 이 다카무카는 누구이며 아야황자가 텐지인지 텐무인지 아니면 제 3의 다른 사람인지에 대해서 편을 갈라서 극심히 논쟁중입니다【쟁점①】.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보황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조메이 천황과 재혼(再婚)을 하면서 부터입니다.

스이코(推古) 천황이 서거하자 비다츠 천황의 손자이자 히코히토(彦人) 황자의 아들인 타무라(田村) 황자와 쇼토쿠(聖徳) 태자의 아들인 야마시로(山背) 황자가 각축을 벌이다가 타무라 황자가 등극하여 조메이(舒明) 천황이 됩니다. 조메이 천황은 즉위 후에 보황녀를 황후로 영입합니다. 보황녀는 이 때문에 유명해지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문제는 왜 이미 결혼한 유부녀가 황후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메이 천황이 강권으로 아내를 취했을 가능성이 있죠. 아니면 남편과 사별했거나 첫 번째 결혼을 숨겼을 수도 있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쟁점②】. 이 결혼을 준비한 것은 당대의 실력자인 소가노이루카(蘇我入鹿)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어느 경우라도 사이메이 천황이 뛰어난 미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 [그림 ③] 사이메이 천황

백제마니아였던 조메이 천황이 서거하자 보황녀가 등극하여 고오교쿠 천황(皇極天皇 : 642~645)으로 등극합니다[보황녀 = 고오교쿠 천황]. 이에 야마시로(山背) 황자의 불만과 움직임을 주시하던 당시 실권자인 소가노이루카가 선수를 쳐서 야마시로 황자를 비롯한 쇼오토쿠 태자의 자손이 사는 우에노미야(上宮)를 공격하여 일족을 전멸 시킵니다. 이에 대해서 소가노 이루카의 아버지는 한탄했다고 합니다. 자기 아들이 지나치다는 것이죠.

아마 이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던 같습니다. 천황가를 무참히 제거하고 부여계 전체를 위협하는 소가씨의 전횡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던 것이죠. 고오쿄쿠 천황의 아들 나카노에(中大兄) 황자는 이를 심각하게 바라본 듯합니다. 아마 자신도 야마시로의 전철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죠. 나카노에는 외삼촌인 가루(軽) 황자와 불교중심의 소가씨와 적대적인 나까또미노까마따리(中臣鎌足) 등과 의기 투합하여 소가노이루카를 제거하기로 결의합니다.

결국 천황의 어전(御前)에서 나카노에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소가노이루카는 참살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일본서기』는 매우 상세히 묘사하고있습니다. 이로써 일본을 지배하던 '사실상의 제왕'이었던 소가씨의 본가(本家)가 멸문이 된 것이죠. 이것이 유명한 을사정변(乙巳の変 : 잇시노헨)입니다.

고오교쿠 천황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친정가와 아들간의 참극(慘劇)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곧 바로 퇴위하여 아들인 나카노에(中大兄)에게 천황위를 물려줍니다. 그러나 나카노에는 스스로는 즉위 하지 않고, 외삼촌인 가루(軽)황자에게 황위에 추천, 고토쿠 천황(孝徳天皇 : 645~654)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황태자가 되어 실질적인 개혁업무를 총괄지휘하게 됩니다. 이 시대가 바로 유명한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쟁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왜 나카노에가 등극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쟁점③】, 다른 하나는 '다이카 개신이 과연 이 신정부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일까?'하는 점【쟁점④】입니다. 왜냐하면 다이카 개신의 기본적인 방침은 쇼토쿠태자(聖徳太子)·소가노에미시(蘇我蝦夷 또는 蘇我毛人)·소가노이루카(蘇我入鹿) 등이 이미 마련한 것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동향이기도 합니다.

나카노에는 황태자로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라이벌인 후루히토(古人) 황자와 을미정변의 동료였던 이시카와마려(石川麻呂)를 제거합니다. 개신정권이 들어선 후 8년 고토쿠 천황과 나카노오에 황태자 사이에 큰 불화가 일어납니다. 나카노오에는 왕도를 나니와(難波津)에서 아스카로 천도할 것을 제의했으나 고토쿠가 이를 거절하자 나카노오에는 왕족과 귀족, 관료들을 데리고 아스카로 떠났습니다. 이 때에는 전(前) 천황이었던 고오교쿠는 말할 것도 없고 고토쿠의 황후인 하시히토(間人)까지 포함되어있어 충격에 빠진 고토쿠는 이듬해 서거합니다. 그런데 당시 나이가 29세였던 황태자 나카노오에는 이번에도 또 즉위를 하지 않고 이전의 천황이었던 자기 어머니 고오교쿠(皇極)를 다시 천황으로 등극시키는데 이 분이 바로 사이메이(齊明) 천황입니다.

이렇게 나카노에 황자는 고토쿠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고13) 도읍을 옮기고 난 뒤 고토쿠 천황이 서거하자 이상하게도 다시 어머니 보황녀를 황위에 모셔 사이메이 천황이 되게하고 자신은 다시 그녀의 황태자가 됩니다[보황녀 = 고오교쿠 천황 = 사이메이 천황]. 그러면서 고토쿠 천황의 남은 자식인 아리마(有間) 황자도 살해합니다. 왜 이 때도 자신이 등극하지 않고 어머니를 다시 천황에 앉힌 것일까요? 아직도 의문이지요.【쟁점⑤】

이 때가 바로 반도부여(백제)의 멸망기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은 믿음직한 아들인 나카노에와 함께 군대를 모아 규슈에 옵니다. 백제 구원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부흥시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때 사이메이 천황은 이상하게 급서(急逝)하고 맙니다. 이에 대해서는 항간에는 소가씨(蘇我氏)의 저주가 내렸다고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도 나카노에 황자는 바로 등극을 하지 않습니다.【쟁점⑥】나카노에는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의 유해를 수도로 보낸 다음 군대를 지휘하여 한반도에 군을 보내지만 백강[白江 : 백촌강(はくすきのえ)]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맙니다. 반도부여도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죠.

『일본서기』의 사이메이 천황기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기사가 있습니다.

"(사이메이) 천황이 아사쿠라산(朝倉山)의 나무를 베어 궁궐을 지었기 때문에 신(神)이 노하여 대전을 무너드렸다. 또 궁전에는 귀신불(鬼火)이 보였다. 이 때문에 대사인 및 여러 근시중 가운데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14)

"황태자(나카노에)는 천황(사이메이)의 상(喪)을 옮겨서 이와세궁(盤瀨宮)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아사쿠라산(朝倉山) 위에 귀신이 있어 큰 갓을 쓰고 장례의식을 엿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15)

다소 황당하기도 하지만 이 기사는 『부상략기(扶桑略記)』나 『제왕편년기(帝王編年記)』등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16) 사람들은 이 귀신이 원령(怨靈) 소가노에미시(蘇我蝦夷)로 봅니다. 이 말은 다른 의미에서 사이메이 천황을 옹립한 사람이 소가에미시·소가이루카인데 그들을 참살한 것을 일종의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실제로 소가씨를 제거한 것은 사이메이 천황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쟁점⑦】. 소가노이루카가 사이메이 천황의 애인이라는 말도 심심지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아니면 백제원정의 실패로 피폐해진 국정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일본서기』의 편찬자가 기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제기된 수많은 쟁점들은 아직까지도 별로 해소된 것은 없습니다. 이 쟁점들에는 수많은 학자 논객들이 나름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길고 끝없는 논쟁에 대해 참여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부여계의 중심축들이 어떻게 형성되어가고 있는 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이 쟁점에 관해 분석해드릴 예정입니다.

필자 주

(13) 참고로 네즈마사시(禰津正志)는 자신의 저서 『천황의역사』에서, "태자의 정치는, 천황가와는 유리한 것이었지만, 태자는 천황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독단적인 인물이었으므로 호족의 반항을 불러 일으키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천황과의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다."라고 지적한다. 禰津正志『天皇の歴史』(三一書房 : 1976)
(14) "亦見宮中鬼火。由是、大舎人及諸近侍、病死者衆 "(『日本書紀』「斉明天皇」7年 5月)
(15) "是夕於朝倉山上、有鬼、着大笠、臨視喪儀。衆皆嗟怪." (『日本書紀』「斉明天皇」 7年 8月)
(16) "元年乙卯五月 … 西向馳去。時人言。蘇我豊浦大臣之霊也。七年辛酉夏。郡臣卒爾多死。時人云。豊浦大臣霊魂之所為也。"(『扶桑略記』第4 「斉明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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