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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문화의 스이코 천황에서 사이메이 천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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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문화의 스이코 천황에서 사이메이 천황까지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60> 미녀와 영웅 ①

제 21 장. 미녀와 영웅 - 스이코 천황, 사이메이천황, 텐지천황

들어가는 말

교토(京都)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는 야사카신사(八坂神社)인데 이 신사의 신이 바로 스사노오노미고토(素盞吾尊) 즉 스사노오입니다. 스사노오의 다른 이름은 고즈덴노(牛頭天王)라고 합니다. 이 신사는 2006년 현재 일본 전역에 7만 8965의 지역 신사를 거느리고 있고1) 교토에서 매년 7월 17일부터 일주일간 야사카 신사에서 열리는 기온마쓰리(祇園祭)는 디른 마쓰리2)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본 최대의 제사축제죠.

기온마쓰리가 의미하는 제사는 일본의 토신(土神)에 대한 제사로 야마토 왕조가 일본에 먼저 자리를 잡았던 가야계 왕조에 대한 위로의 의미가 강한 제사의식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쓰리는 한국어의 '맞으리' 즉 하늘의 신을 땅에서 맞는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 과정에서 "가마꾼들이 '왔소이, 왔소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거리를 활보하는데 이 의미는 '신이 오셨다(お出になった)'는 듯의 한국어."라고 합니다.3)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으로 유명한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교수에 따르면, 제21대 유라쿠(雄略) 천황(456~478)은 백제의 건국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4)

홍윤기 교수에 따르면, 6세기경의 고대 역사기록인 『구사기(舊事記)』의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신라 신도 제사를 담당해온 '모노노베(物部)' 가문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밝혀져 있는데 이 제사 때 외우는 강신(降神)의 축문이 반도어라는 것입니다. 즉 '아지매 여신(女神)'이 반도로부터 천황가 제사 자리에 오라고 부르는 초혼가(招魂歌)라고 합니다. 내용을 볼까요?

阿知女, 於介, 於, 於, 於, 於, 於介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

여기서 포인트는 阿知女입니다. 이 말이 왜 '아지매'인가 하는 점인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미 검증된 말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로 『일본서기』의 태초의 개국신(開國神)인 '이자나기노미코트'가 최초의 처녀 여신 '이자나미노미코토'에게 '여자'라는 말을 쓸 때 '오미나'라고 부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미나(をみな, 女)는 온나(おんな)이며 또한 매(め)라고도 부른다. 여신(女神)을 '오미나가미(をみながみ)'로도 부른다."[오미나 = 여(女), 가미 = 신(神) ] 라는 것입니다.5)

그러니 위의 말은 "아지매, 아, 아, 아지매 어서 오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이 '아지매'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아지매는 '아주머니(아줌마)'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쓰는 결혼한 여성에 대한 일반 호칭으로 사용하는 '아주머니(아줌마)'라는 말은 고대에서는 훨씬 더 고상한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홍윤기 교수에 따르면, '아주머니(아지매)'는 고대 신라에서 신분이 고귀한 여성, 신성한 여성, 즉 '여신'을 존칭하던 대명사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사실 '아지매'라는 말은 한반도의 경상도 사람이면 금방 알지요. 왜냐하면 경상도 지역은 고어가 워낙 많이 남아있고 '아지매'라는 말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말에 대한 방언들은 아짐 또는 아지미(전라), 아주매(충남), 아주마이(경남, 황해, 함경), 아주머이(강원, 경기, 경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1) 아스카문화의 스이코 천황에서 사이메이 천황까지

이제 5∼7세기에 걸친 일본 황실의 계보를 잠시 보고 상세한 내용을 검토하기로 합시다.

제29대 킨메이 천황(欽明 : 539~571)
제30대 비다츠 천황(敏達 : 572~585)
제31대 요메이 천황(用明 : 585~587)
제32대 스슌 천황(崇峻 : 587~592)
제33대 스이코 천황(推古 : 592~628)
제34대 조메이 천황(舒明 : 629~641)
제35대 고오교쿠 천황(皇極 : 642~645)
제36대 고토쿠 천황(孝德 : 645~654)
제37대 사이메이 천황(齊明 : 655~661)
제38대 텐지 천황(天智 : 661~672)
제38대 고오분 천황(弘文 : 672)
제39대 텐무 천황(天武 : 672~686)
제40대 지토오 천황(持統 : 686~697)

킨메이 천황이 부여계(백제계)라는 분명한 기록이 있었죠? 즉 킨메이 천황의 아드님인 비다츠 천황에 대해서『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분명히 백제인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킨메이 천황은 반도부여계(백제계)인 것이죠. 따라서 그 형제들인 요메이 천황, 스이코 천황 등도 백제왕족 즉 부여계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그림 ①] 천황가의 계보와 반도부여(백제) [번호는 천황의 순번]

『신찬성씨록』에 "대원진인(大原眞人), 그들은 백제왕의 후손으로 시호가 비다츠인 분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속일본기(續日本記 : 797)』의 내용과도 일치한다."이라는 기록이 있어6) 비다츠도 백제왕손이며 그의 형과 동생은 자동적으로 백제계 왕손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신찬성씨록』은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필사본만 남아있습니다.

킨메이 천황의 자녀들인 비다츠(敏達)·스이코(推古)·요메이(用明) 가운데 스이코·요메이는 어머니가 같고, 비다츠와 스이코는 부부(夫婦)입니다. 그러니까 스이코와 비다츠는 이복남매인데 결혼하였습니다. 고대 왕실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일본의 고대 통사로 13세기경의 왕조 불교사를 기록한 책인 『부상략기(扶桑略記 : 13세기)』에는 비다츠 천황이 왕궁으로 지은 것이 구다라대정궁[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이라고 합니다. 구다라 즉 백제라는 말이 나오고 있죠?

스이코(推古) 천황은 비다츠(敏達) 천황의 이복동생이자 황후였습니다. 비다츠 천황이 서거한 후 이복동생이자 처남인 요메이천황(2년간 재위)·스슌천황(5년간 재위)을 거쳐 스이코 천황이 등극하였습니다.

『일본서기』는 이례적으로 스이코 천황의 용모에 관하여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우며 예의가 바르고 절도가 있는 분(姿色端麗 進止軌制)"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군신이 즉위하기를 세 번 청하자 그 때서야 할 수 없이 천황위를 수락했다고 합니다.

스이코 천황은 등극후 친오빠인 요메이(用明) 천황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였는데 그가 바로 저 유명한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입니다. 그러나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 천황 29년에 서거하고 말았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열도에서는 화폐에 나올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자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지나치게 미화된 인물로 그려져 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특히 『일본서기』가 쇼토쿠 태자를 과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본대로 『성예초』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성명왕이 서거한 후 왜왕실의 쇼토쿠 태자로 환생했다고 합니다.

▲ [그림 ②]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菊池容齋繪 : 明治時代)
스이코 천황은 킨메이(欽明) 천황의 둘째 따님으로 그 어머니는 당시 반도부여 조정의 최고 대신이었던 소가노이나메[소가도목(蘇我稻目 : ?~570)]의 따님인 기다시히메(堅鹽媛)였습니다. 즉 스이코 천황의 모계이자, 킨메이 천황(성왕으로 추정됨)의 황후인 기다시히메(堅鹽媛)가 소가씨(蘇我氏)의 혈족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고대를 대표하는 아스카문화(飛鳥文化 : 592~645)는 스이코(椎古) 천황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절은 아스카데라(飛鳥寺)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일본에서 기와와 주춧돌을 놓은 건물이 등장한 것은 6세기 후반의 일이라고 합니다. 시미즈마사지(志水正司) 교수는 아스카 절터 발굴(1956~1957) 당시, 창건할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2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부여의 여러 사찰 터에서 출토된 수키와(圓瓦)와 동일한 계통의 것으로 이것은 백제의 기와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7)『부상략기』에 따르면, "스이코 여왕 원년(593) 아스카노데라 찰주를 세우는 법요식에서 만조백관이 백제 옷을 입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아스카문화는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문화의 시대로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 ?~626)가 불교전쟁(587)에서 토착종교 세력을 물리치고 이룩한 것입니다. 소가노마치는 제21대 유라쿠(雄略) 천황(456~478) 당시에 중용되어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습니.8)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나 가도와키데이지(門脇禎二) 교수 등도 소가노 가문이 백제계임을 단정하고 있죠.9)

소가씨 가문이 천황가의 황위쟁탈전에 본격 개입하데 된 것은 소가노이나메(蘇我稻目)때부터라고 합니다. 소가노우마코의 두 따님은 모두 킨메이 천황의 황후였습니다. 큰 따님이 기다시히메(堅鹽媛 : 蘇我堅鹽媛), 둘째 따님은 오아네노키미(小姉君 : 蘇我小姉君)인데 이로 부터 천황 세 분이 탄생합니다. 즉 킨메이 - 비다츠 - 요메이 - 스이코에 이르는 천황가의 계보에서 반도부여(백제)계의 아버지와 반도부여(백제)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분들이 열도의 지배자들이었죠. 이들을 흔히 소가계(蘇我系) 왕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10)

참고로 요메이 천황 서거후, 소가노우마코는 누나인 오아네노키미(小姉君) 황후(킨메이 6황후의 한 분)의 아드님인 스슌(崇峻) 천황을 등극시킵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 때부터 스이코 천황에 이르기까지 소가(蘇我)씨의 혈족이 열도를 다스리게 됩니다.

메이지 유신(1868) 이후 일본정부는 한반도와의 연계성을 없애기 위해 많은 지명들에서 백제(百濟)라는 이름을 제거하였는데 그 한 예로 구다라가와(百濟川)를 소가가와(蘇我川 : そががわ)로 바꾸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소가씨에 관해서 백제계라는 분석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소가씨의 역사는 반도부여의 역사와 열도부여의 역사를 잇는 중요한 고리의 하나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비다츠 천황의 친손자인 조메이(舒明) 천황은 7세기 초에 나라 지역에 구다라강(百濟江) 옆에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데라(百濟寺)를 지었고 자신은 구다라궁에서 생활하다가 서거(641)했을 때 구다라대빈(百濟大殯)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다라 대빈은 백제식의 3년 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연유로 인하여 사에키아리카요(佐伯有淸) 교수는 조메이 천황은 당대에는 구다라대왕(百濟大王)으로 불리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11) 이 구다라데라는 현재는 사라졌지만 3만 평방 미터의 규모로 당시에는 최대의 사찰이었습니다. 조메이 천황은 구다라데라에 9층탑을 조성하였는데 그 탑의 높이가 무려 80여 미터에 달했다고 합니다.

앞서 본대로 조메이 천황(舒明天皇) 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백제에서 온 손님들을 조정에서 대접하였다. 상서로운 연꽃이 검지(劍池)에서 피어났다. 한 개의 줄기에 피어있는 두 송이의 연꽃"12)

이 기록은 조메이 천황 당시에 백제의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상서로운 연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백제와 일본을 하나의 줄기로 보고 있다는 암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조메이 천황은 비다츠 천황의 증손녀(보황녀)와 결혼합니다. 바로 이 보황녀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사이메이(齊明) 천황입니다. 보황녀는 고오교쿠 천황(皇極天皇)으로도 등극합니다. 사연인 즉 조메이 천황이 서거하자 그 아내(황후)가 등극을 하는데 그 분이 바로 고오교쿠 천황(皇極天皇)입니다. 고오교쿠 천황(皇極天皇)은 3년 정도 나라를 다스리다가 고토쿠 천황(孝德天皇)에게 선양합니다. 그런데 이 고토쿠 천황이 등극한 지 9년만에 서거하자, 다시 천황에 오르게 되는데 이 때의 묘호가 바로 사이메이 천황(齊明 天皇)입니다.

그러니까 '조메이(舒明) 천황비(비다츠 천황의 증손녀) = 고오교쿠 천황(皇極天皇 : 642∼645) = 사이메이 천황(齊明 天皇 : 655∼661)'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이메이 천황(齊明 天皇)은 두 번이나 천황에 등극한 매우 특이한 분입니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중조(重祚)'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이메이 천황은 열도의 역사에서 최초로 중조를 한 분입니다. 사이메이 천황 즉위를 전후한 7세기 중반의 일본 국내의 상황은 정치적으로 다소 혼란하고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필자 주

(1) 홍윤기 『역사기행』27 신라신 제사터 교토 야사카 신사(『세계일보』2006)
(2) 마쯔리가 최초로 시작된 때는 749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3) 重金碩之『風習事典』(啓明書房 : 1981)
(4) 金澤庄三郞『日鮮同祖論』(刀江書院 : 1929)
(5) 金澤庄三郞『廣辭林』(三省堂 : 1925)
(6)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 續日本記合"(『新撰姓氏錄』)
(7) 志水正司 『古代寺院の成立』(六興出版 : 1985)
(8) 門脇禎二『飛鳥』(1995). 목만치(목리만치)는 개로왕의 조신으로 문주왕을 등극시켰던 사람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의 침공으로 백제가 '사실상' 멸망하자, 이 때 개로왕의 아드님인 문주왕(475~478)이 남으로 피신하여 웅진(현재의 공주)을 왕도로 삼아 등극하였고, 이 일을 이끌었던 목리만치 대신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성씨를 만든 것이 소가(蘇我)씨였다는 것이다. 즉 목만치의 새로운 이름은 소가노마치(蘇我滿智 : 소아만지)였다고 추정된다. 앞서 본대로, 소가노마치가 부여계라는 것과 그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실은 그의 자손들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소가노마치의 아들은 소가노가라코(蘇我韓子)로 '한국의 아이'라는 의미이고, 소가노가라코의 아들은 소가노고마(蘇我高麗)로 역시 같은 의미이다. 소가노고마의 아들은 소가노이나메(蘇我稻目)이고 그 손자는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이다.
(9) 水野祐 『天皇家の秘密』(1977), 門脇禎二『古代を考える飛鳥』(1995)
(10) 遠山美都男 『謎にみちた古代史上最大の雄族』(1987)
(11) 佐伯有淸『新撰姓氏錄の硏究』(1970)
(12) 『日本書紀』「舒明天皇」 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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