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국가정보원 직원이 북한의 기습 남침 가능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개인문서를 소속 기관의 승인도 없이 언론사에 보내고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발표하는 등 돌출 행동을 해 파장이 일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국정원은 김성호 원장에 대한 교체설이 나오는 분위기 속에서 직원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워 보인다.
또한 국정원이 안보 관련 비밀을 다루는 정보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손상시켰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 원장은 이미 지난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신변과 관련된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북한 정보 관리의 기본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미국 정권교체기 남침 가능성 높다"
국정원 소속 국가정보대학원의 김영환 교수는 15일 오전 일부 언론에 '대국민 안보보고서'라는 제목의 개인보고서를 이메일로 보내고 자신의 '사이월드' 블로그에도 이를 게재했다.
해외정보 분야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김영환 교수는 보고서 서문에서 "작금의 안보 상황은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기에는 너무도 위급하게 전개되고 있기에 감히 우리 국민들에게 국가안보보고서를 직접 올리기로 결심했다"며 7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글을 적극 전파해 달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북한 보위부 요원을 포함해 상당수의 북한 사람들과 친분을 나눈 경험이 있다"며 "그 결과 이미 10여 년 전부터 북한 체제가 심각한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보고서 본문에서 보안사 부사관 출신인 고(故) 정지용 씨 등의 증언에 따른 <월간조선> 및 <조선일보> 보도 등을 인용, 북한이 경기도 김포 인근까지 장거리 지하터널(땅굴)을 연결시켜 놨다면서 "북한의 기습남침을 방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특히 "미국이 정권교체(2009.1.20)를 앞두고 있는 점도 김정일로서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라며 "임기 말의 부시 대통령이나 아직 취임하지 않은 버락 오바마 당선자 모두 또 다른 전쟁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현재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남침용 지하터널 조사 국방부가 막았다"
그는 또 이 같은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중간보고 과정에서 국방부가 "조직의 명운을 걸고" 자신의 보고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조기경보 발령' 차원에서 이 글을 직접 공개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정지용 씨 등이 관련 내용을 청와대 및 국회에 진정했을 때 국방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좌절된 적이 있다며 "방어 대책이 지연됨으로써 오히려 김정일에게 결전을 앞당길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대통령과 정부, 그 중에서도 특히 국방부에 대해 장거리 지하터널에 대한 대책을 포함한 전방위적인 남침 방지책 수립을 촉구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장거리 지하터널의 존재를 부정하는 국방부에게 지하터널을 찾으라고 한다면 이는 사실상 찾기를 포기하는 것"이므로 국방부는 군사적 대응책만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해 국방부에 대한 불신을 거듭 드러냈다.
또한 그는 전쟁의 불씨를 해소하기 위해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의 권력 엘리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통일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북한에 기업하기 좋은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줌으로써 '대동강의 기적'을 이루게 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국정원 "대북 전문가 아냐…직원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
이 보고서가 몇몇 기자들에게 보내지고 일부 포털 사이트에도 유포되자 국정원은 즉각 진화에 나섰다.
국정원은 이날 오후 '대국민 안보보고서 관련 입장'이라는 보도자료를 내고 "교수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른 의견으로 국정원의 공식 보고서나 논문이 아니며 국정원의 입장이나 견해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국정원은 김 교수에 대해 "북한 파트에서 근무한 경력이 없으며 현재 정보대학원에서 북한 관련 강의를 하지 않고 있는 등 대북 전문가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국정원은 이어 "소속 직원의 개인적인 행동으로 일부 혼란을 일으킨 데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며 김 교수가 국정원 소속임을 시인했다.
김 교수는 보고서에서 고려대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 및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에서 연수를 했으며, 주 모스크바 대사관과 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에서 근무한 뒤 현재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겸 첩보학팀장을 맡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김 교수가 밝힌 학력과 경력은 맞지만 대북 파트에서 일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며 "한 직원의 철없는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말했다.
"반정부·반미 선전선동에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 강조 눈길
전직 외교안보 당국자는 "국정원에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다 보니 이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며 "북한이 땅굴을 김포까지 파 놨다는 주장은 이미 낭설로 밝혀졌는데 안보 위기감을 자극하려는 보수 언론을 인용해 황당한 보고서를 썼다"고 말했다.
내용의 신빙성 여부와 상관없이 국정원 직원이 안보 문제에 대해 이 같은 '개인플레이'를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초유의 일이다.
김 교수가 보고서를 공개한 이유에 대해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오늘날의 위기상황을 직시토록 함으로써 우리 사회 내부의 '김일성 민족'들이 전개하는 반정부·반미 선전선동에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언급한 대목을 주목, 공안 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와 관련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김 교수에 대한 징계 여부에 대해 이렇다 할 답변을 하지 않았다. 김 교수의 블로그에 올린 보고서는 10시간이 지난 15일 오후 5시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이날은 공교롭게 국정원이 작년 중앙행정기관 및 광역 자치단체의 보안관리 실태를 평가한 결과를 발표한 날이어서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국정원은 평가 결과 특허청과 경상남도 등 21개 기관이 90점 이상을 받았다며 "해킹메일 차단, 홈페이지를 통한 개인정보 노출방지 대책 수립 및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 설치 등은 대부분 잘하고 있는데 반해 무선랜 무단사용 점검, 보직변경 직원 대상 보안조치와 정보보호 예산 확보 등은 미흡했다"고 총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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