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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민주주의, 정치개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창비주간논평] 제도적 디자인에 대한 연구와 관심부터

정부와 한나라당이 '속도전'에 의한 '전쟁'을 선포하며 각종 입법안 통과를 추진했다가 야당의 강력한 저항 앞에 일단은 그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야당은 사상 초유의 약체정당으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지지와 지원을 등에 업고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바로 이같은 결과로부터 이명박정부의 권력기반이 기실은 대단히 취약하고 불안정하다는 점이 간파되었다. 그래서 현재처럼 이명박정부가 허세와 위선의 권력정치를 더 지속하고자 한다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대통령은 엊그제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회 폭력사태의 모든 책임을 야당에 떠넘기면서 제2의 입법전쟁을 강행할 것임을 예고했다. 이제 정국은 더욱 짙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급기야는 사회 전반의 혼란으로 점화될 위기를 맞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국회 폭력사태를 민주주의와 경제 살리기의 적으로 규정하고 강도 높은 '정치개혁'을 주문했다. 그래서 조만간 국회에서 단상을 점거하는 행위, 의사진행을 물리적으로 방해하는 행위 등이 폭력행위로 규정되어 이를 처벌하는 입법안이 추진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수 여론이 반대하는 각종 입법안들을 마치 군사작전 벌이듯 일방적으로 강행처리하려는 집권세력의 태도를 다수결이라는 형식논리로 방관해주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의에 합당한지는 정말 의문이다.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 "다수의 지배"이기는 하나, 소수를 추방하고 봉쇄하여 특정 집단의 지배를 항구화하려는 '다수의 횡포'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애덤 셰보르스키(Adam Przeworski)가 "불확실성의 제도화"라고 정의하듯이 소수파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다수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소수에게도 토론의 자유와 권리를 광범위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입법전쟁의 발단은 현정부의 욕심과 조급증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이같은 민주주의의 정의에 걸맞는 정치가 이루어지지 못해왔다. 대부분의 정치는 힘을 내세워 권력을 극대화하고 지속해보려는 권력정치(power politics)였다. 한국사회의 극단적 정치대결과 만성적 정국교착 현상은 바로 이런 정치풍토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번 입법전쟁의 근본적인 발단도 압도적 다수의 힘을 앞세워 거의 모든 권력을 일거에 탈환하려 한 이명박정부의 과도한 욕심과 조급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정치는 거의 예외없이 다음과 같은 씨나리오로 움직여왔다. 첫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력분파들은 등장하자마자 과도한 권력독식 유혹을 끊임없이 받게 되면서 '힘의 정치'를 추구한다. 둘째, 그같은 권력행사 방식의 파생적 결과로 여당은 정권의 거수기 내지 동원부대로 전락하면서 일차적으로 집권세력 내에서 힘의 쏠림 현상이 발생한다.

셋째, 집권세력 내에서의 힘의 쏠림은 반대세력으로 하여금 극한적인 저항과 무한투쟁을 전개하게 만드는 유인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이런 계기들이 순차적으로 맞물려 정국교착이 발생하고 일종의 소용돌이식 상승작용이 일어난다. 넷째, 정국교착의 빈번한 발생과 장기화는 궁극적으로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책임으로 돌아가기 십상이고 점차 레임덕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지난날 우리 사회는 '고비용 정치'와 '보스정치'의 폐단을 청산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치개혁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데는 별로 유효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정치의 병폐를 발본색원하는 새로운 정치개혁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개혁'은 이명박 대통령이 적시한 권력정치에 대한 저항행위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권력정치 그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 추진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만성적 정국교착과 극단적 정치대결의 핵심 원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국민들은 힘을 내세운 독단과 탐욕의 정치가 자신의 일상적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느껴가고 있다. 현재 정치상황 추이를 볼 때 조만간 한국사회에 커다란 정치적 격변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권력정치의 구조를 타파하려는 대안에 대한 논의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것이다. 진보진영은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제도주의적 해법과 운동주의적 해법 사이에서

정치개혁에서는 구체적인 목표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학계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여러 대안들이 개진되고 있지만 지리멸렬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정치개혁 논의들은 주로 제도주의적 해결책에 기대를 걸고 있다. 대통령 중임제를 도입하거나 선거주기를 일치시키자는 주장, 대통령제라는 정부형태를 아예 내각제나 이원정부제로 바꾸자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제도주의적 해법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논의들은 주로 대의정치의 틀 내에서 제도들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같은 기능적 논의들에 치중해 있어서 대중의 사회적 기반을 동원할 수 있는 비전과 의지를 결여하고 있다.

정치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적 참여를 통한 책임정치의 강화라는 큰 줄기를 꽉 잡아내야 한다. 즉 정치개혁은 언론과 전문가집단, 권익집단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정당들과 함께 건설적으로 국정에 기여하는 거버넌스(governance) 개편이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정치개혁은 비로소 '전략'이 되고 '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진영은 대체로 제도주의적 해결책에 대해 다분히 회의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제도주의적 해결책보다는 운동주의적 해결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이런 경향은 지난 촛불집회 중에 진보진영 내부에서 일어난 '직접민주주의 대 대의민주주의' 논쟁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그러나 제도적 해결책에 대한 관심은 아주 중요하다. 87년 헌정체제가 주는 반성적 교훈은 민주화를 이룩해낸 시민적 동력이 제도화 과정에서 헌정체제에 내재화되지 못하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해법은 시민 참여를 통한 거버넌스 개편

사실 역사적으로 운동과 정당이 분리된 채 민주주의가 발전해온 경우는 없으며, 서구의 정치제도에서도 양자는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가령 미국에서는 민의의 위임해석에 기반한 대중호소(going public)가 '대통령'이라는 제도적 존재에 이미 내재화되어 있어, 그것이 삼권분립의 원리와 상호작용하면서 정치를 역동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예비경선이라는 시민참여제도를 정당정치 영역에서 발전시킴으로써 기율이 느슨하고 타협이 용이한 정당체제를 만들어낸 것도 그런 사례다.

한국의 진보진영도 이제는 어떻게 시민 주도에 의한 국민투표권, 입법발의권, 소환권 등 직접민주주의 기제를 강화할 것인가, 어떻게 이를 대의적 권력기구들에 투영시키고 그 사이에서 가장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지점까지 고민의 영역을 확대시켜야 한다. 그것은 불가불 제도적 디자인에 대한 각별한 연구와 관심을 필요로 한다. 앞으로 정치개혁의 목표와 대안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진보진영에서 활성화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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