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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병산에 올라 그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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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병산에 올라 그리워하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45> 댓재~삽당령/9.17~19

산행 마흔 째. 금요일.

지난 이틀 동안의 산행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무릉도원과 비견할만한 아름다운 계곡인 무릉계(武陵溪)를 품고 있는 두타산과 청옥산의 마루금은 정작 무심(無心)했다. 볼만한 것도 없었고 내세울만한 것도 없었다. 두타와 청옥은 경북 문경의 조령산 구간과 더불어 백두대간을 지나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으로 인해 감춰진 진주로 회자되는 산이다. 부드럽고 편안한 구간과 빚은 듯이 아담한 암릉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조령산과 같은 비경(秘境)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드러내 보이지 않는 무심(無心)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가진 것들을 베푼 무심(無心)의 아름다움이었다. 소금강이라 불리는 무릉계곡과 무릉반석(武陵盤石)뿐 아니라 태암, 미륵암, 반학대, 능암, 쌍현암, 용추폭포 같은 빼어난 경치를 골짜기와 산자락에 풀어놓고 정작 두타와 청옥의 마루금은 청빈하다고 할 밖에 없을 정도로 조촐했다. 야생화조차도 변변히 품지 않고 있었다. 그 산길 걸으며 마음을 비운 고승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렇게 무심(無心)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취해 걸었다. 깊은 골 흐르는 구름을 따라 걷고, 청명한 가을 하늘 흐르는 구름에 실려 가듯 걸었다. 걷다 보니 자병산이 눈앞에 있었다. 절로 걸음이 멈추어졌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길이 끊어져 있었다.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산은 파헤쳐지고 무너져 있었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흐르던 하늘길은 끊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욕심 탓이었다. 생명의 가치보다 재화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당연한 결과였다. 가슴 아팠다.

백두대간은 하늘길이다. 백두대간은 하늘이 만들어준 길인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이 품어 낸 하늘길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흐르는 하늘길이다.
백두대간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며 소통의 장소였다. 하늘은 이 산줄기를 통해 들을 베풀고 강을 흐르게 하여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사람들은 이 산줄기를 통해 하늘의 지혜를 얻었을 뿐 아니라 생존을 위한 재화도 얻었다. 그 뿐인가. 이어진 하나의 산자락에 함께 몸 기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동질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런 백두대간이 끊어졌다는 것은 소통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 간의 소통이 끊어지고,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도 끊어졌으며,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할 모든 생명들과의 소통도 끊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단절이다. 무너진 자병산은 소통 끊어져 단절된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그래서 더욱 아팠다.
산은 자신을 비우며 사람을 살리고 있는데, 사람은 탐욕으로 산을 베고 허물고 있었다. 마음 참담했다.
잠 못 이뤄 마음 뒤척인 밤은 깊었다. 별 총총한 긴 밤이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만나다 ©이호상

길고 깊었던 밤 지나고 아침이 왔다. 마음 뒤척여 무거워진 몸을 추슬러 산행 준비를 하였다. 생계령으로 향했다. 오늘 산행은 고뱅이재를 지나고 석병산과 두리봉에 올랐다가 삽달령에서 내려서는 약 13km의 거리였다. 바람 선선했다. 선선한 바람이 뒤척여 흐트러진 마음을 추슬러주었다.
숲으로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릉 서대굴 안내판이 보였다.

강원도 기념물 제36호인 이 굴은 '범록굴'이라는 다른 이름도 지니고 있다. 산계리 석병산 중복 벼랑에 있어 생계령에서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석회암 동굴이다. 약 250m까지는 탐사되었으나 그 이상은 확인되지 않았다. 동굴은 세로로 땅 속 깊이 뻗어 있다. 동굴 안에는 작은 공간들이 발달해 있고,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동굴 바닥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그리고 꽃모양의 석화(石花) 등이 둘러싸여 있어 매우 아름답다. 동굴 안이 위험하여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한 피해가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동굴 안이 위험하여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한 피해가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때론 '위험한 것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길에 고사목 쓰러져 길을 막고, 수리취는 바람에 한들거렸다. 산길 지나며 암벽 사이로 바라보니 눈부시게 파란 하늘에 새털구름 흐르고 산줄기는 멀리 물러나 있었다. 조릿대 숲길을 지났다. 철쭉과 조록싸리 많았다. 931 암봉에 오르니 멀리 대관령이 보였다. 대관령이 품에 안길 듯하였다. 경상남도 산청군 중산리에서 첫 걸음을 뗀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강원도의 산줄기를 지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이곳까지 온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정직한 발걸음이었다. 제 발로 이 땅을 느끼며 걸어온 길이다. 몸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정직하다는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다.
어수리와 구절초, 쑥부쟁이, 붉은 엉겅퀴 핀 산길을 지나 촘촘히 가지를 뻗은 숲길을 지나고 나니 바람 시원했다. 강릉 산계리와 정선 임계리를 동서로 잇는 고개인 고뱅이재였다. 헬기장을 지나 석병산을 향했다.
▲석병산에서 돌아보다 ©이호상

석병산(石屛山, 1055m)은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에 위치해 있다.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마치 산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석병(石屛)이라 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백두대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함께 갖춘 산으로 정상에 서면 강릉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날씨 맑은 날에는 멀리 동해의 수평선이 보인다. 황홀한 광경이다. 주위에 만덕봉(萬德峰, 1035m), 대화실산(大花實山, 1010m), 노추산(魯鄒山, 1322m) 등이 있고 주수천(珠樹川)의 지류와 임계천의 지류가 발원한다.
석병산은 석회암으로 형성되어 석화동굴, 서대굴 등 곳곳에 동굴들이 산재해 있다. '일월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석병산 정상에 올랐다. 거대한 바위는 칼로 잘린 듯 겹겹이 쌓여 있었고 망치에 부서진 듯 울뚝불뚝했다. 눈앞 발길 아래는 천길 벼랑이었다. 석병산(石屛山)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이 외로웠다. 하늘 파랬다. 그리움 일었다. 뒤 돌아 보았다. 자병산이 거기 있는 듯했다. 아직도 자병산 거기 있어 석병산과 마주보며 서로의 아름다움을 때로 자랑하고 때로 시샘하고 있는 듯했다. 회색빛 돌로 병풍을 두른 석병산과 자줏빛 돌로 병풍을 두른 자병산이 형제처럼 마주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는 듯했다. 서로를 자랑 삼으며 기뻐하는 듯했다. 그 자병산이 그리웠다. 끊긴 산줄기 그리웠다.
석병산과 자병산은 그 이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짝을 맞춘 이름을 지닌 산이다. 동남쪽으로 마주보고 서서 산길 지나는 이들을 위로하였을 것이다.
제 짝을 잃고 홀로 남은 석병산에 올라 쓸쓸했다.
제 짝을 잃고 외로운 석병산에 올라 그리워했다.
바위틈에 바위구절초 피어 있었다.
그들도 외로워보였다.

그런 내 맘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한 대장이 일월문을 보러 가자고 채근했다. 지난 밤 마음 뒤척인 탓인지 몸 무거웠지만 일월문을 향했다. '일월봉'이라는 석병산의 다른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월봉 아래에 있다. 아마도 일월봉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인 것 같았다.
▲일월문 ©이호상

일월문으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조심스럽게 길을 내려갔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일월문이 보였다. 일월봉 우측의 거대한 바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으로 숲이 보였다. 온 세상이 다 들어 있는 듯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참으로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밤이 되어 건너편에서 떠오른 달빛이 일월문을 비추면 장관이라고 전한다. 참으로 그럴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황홀했다. 깊은 밤 달 떠올라 일월문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보다 더 황홀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있을까.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울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조릿대 숲을 지나 두리봉(斗里峰, 1033m)에 올랐다. 두루뭉술해서 두리봉이라 불리게 된 봉우리는 말 그대로 두루뭉술했다. 부드럽고 완만했다. 마당 같았다. 탁자들도 여럿 놓여 있었다. 작은 나무판으로 조악하게 만들어져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표지판도 두루뭉술한 봉우리의 모습 때문인지 정겨웠다.

산을 내려가자 다시 조릿대 숲이 이어졌다. 삽당령(揷唐嶺, 680m)으로 내려섰다. 삽당령은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와 송현리의 분수령으로 강릉을 적시고 동해로 흘러드는 강릉 남대천,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으로 몸을 섞는 송현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 고개를 넘을 때 길이 험하여 지팡이를 짚고 넘은 후 지팡이를 길에 꽂아 놓고 갔다 하여 '꽂을 삽(揷)' 자를 써 삽당령이 되었다고 한다.
▲삽답령 ©이호상

모두들 이번 주간의 산행을 마쳤다는 생각 때문인지 다소 들떠 있는 듯했다. 막걸리 오고가고 말소리 커져 있었다. 맑고 푸르른 오후였다. 삽당령의 넓은 도로에는 지나는 차 거의 없었다. 경찰관들이 나와 간간이 지나는 트럭 운전사들에게 안전운행에 대한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햇살 눈부셨다.
마음조차도 낯선 오후였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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