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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왕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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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왕의 후예들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59> 천황가의 조상신, 성왕 ③

(2) 부여계의 성지, 히라노 신사

이제까지 교토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벚꽃의 신사인 히라노 신사가 바로 성왕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의 사학계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민간에서는 백제의 성왕과 관련된 신사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일본 황실 법도집인『연희식(延喜式)』에 의하면22), 히라노 신사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황태자(皇太子)의 친제(親祭)가 정해진 신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즉 히라노 신사는 '스메오오미가미(すめおおみかみ)' 즉 '황대어신(皇大御神・皇大神)'이라고 칭해져 궁중신(宮中神)과 같이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마끼신에 대하여 이마끼스메오오미가미(いまきすめおおみかみ : 今木皇大神)라고 높혀부르기도 합니다.

『연희식』에 의하면 '스메오오미가미(すめおおみかみ)' 즉 '황대어신(皇大御神・皇大神)'이라고 불리는 신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 카스가노가미(春日神)와 이마끼신 등의 세 분뿐이라고 합니다.23)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봅시다.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사실상 실존인물로 보기는 어렵고 대체로 금관 가야계 민족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카스가노가미(春日神)는 후지와라씨·나카토미(藤原氏・中臣氏)씨의 씨족신의 총칭입니다.24) 그러니까 한 사람이 아닌 것이죠. 후지와라나 나카토미는 일본을 대표하는 가문들 가운데 하나죠. 그런데 이마끼신은 한 분의 분명한 실존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이마끼신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죠?

『몬도꾸 천황실록(文徳天皇実録)』에는 칙사를 히라노신사에 보내고 있습니다.25) 황성을 보호하는 신사(皇城鎮護 神社)로 22개사가 지정되었는데 히라노 신사는 5위 안에 들었다고 합니다. 히라노 신사는 메이지 4년에 관폐대사(官幣大社)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폐(官幣)란 국가가 재정이나 운영을 맡는 것을 의미합니다.26) 즉 이런 까닭으로 히라노 신사는 기둥문(鳥居)에 「히라노스메오오미가미(平野皇大神)」의 편액을 내걸 수 있고 히라노마쯔리(平野祭)에는 황태자가 봉폐(奉幣)하는 규정이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역대 천황의 행차도 이십여 차례 이상으로 천황가의 숭경(崇敬)도 두터웠습니다. 그리고 이 신사의 신들이 일본의 주요 가문인 겐씨(源氏 : 미나모토씨), 헤이씨(平氏 : 타이라씨), 오에씨(大江氏)、스가와라씨(菅原氏) 등의 공가(公家 : 문신)의 씨족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마끼신이 헤이안궁(平安宮) 왕실에서 가장 높은 위계인 정1위(正1位)를 차지하였는데 이 과정을 간략히 봅시다. 『몬도꾸 천황실록』에 따르면 이마끼신은 종2위, 쿠도신·후루아끼신 등은 종4위 등으로 모셔졌다가27) 그 후 신의 서열[神階]이 올라가, 죠간(貞観) 원년(859년)에 조정은 이마끼신에 대하여 최고위의 정1위(正一位)의 신계를 하사합니다.『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는 히라노신사가 "야마시로노쿠니 카즈노군(山城国葛野郡) 히라노 제신 4사"라고 기재되어 명신대사(名神大社)로 분류됩니다.28)

그래서 국학자인 니시쓰노마사요시(西角井正慶) 교수(국학원대학)는 히라노 신사는 고래로 일본 황실에서 매우 높이 받드는 곳이며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이후에는 황실의 칙사가 참여하여 봉폐의식(奉幣儀式)을 거행했는데, 히라노 마쓰리(平野祭) 즉 히라노 신사의 제사의식이 있던 4월 10일에는 천황이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칙사는 참례하여 봉폐의식을 지냈다고 합니다.29)

히라노 신사는 981년 3월 엔유(圓融) 천황(969~984)이 직접 참배한 이후 역대의 천황들이 참배했다는 기록들이 히라노 신사에서 간행한 서적에 적혀있습니다.30) 히라노 마쓰리(平野祭)는 해마다 4월 2일 거행되는 것으로 예로부터 황실이 이 신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천황이 친히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황실의 칙사가 파견되어 봉폐(奉幣)의식을 지냈습니다.31)

일본 왕실에서 제정된 법령 즉 『정관식(貞觀式 : 871)』에 따른다면, 대대로 천황들은 고대의 천신인 백제신 두 분과 신라신 한 분에 대해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의식은 927년경에 제정된 『연희식(延喜式)』에 다시 명문화되었습니다.

『연희식』에 따르면, 일본 황실에는 황실의 안녕을 위해 달마다 지내는 제사가 월차제(月次祭)이고, 신상제(新嘗祭 : 니나메노마쓰리)는 1년에 한번 11월 23일 밤에 올리는 황실의 가장 큰 제사라고 하는데 칸무천황 당시에 헤이안 궁 경내에 북쪽에는 가라카미노야시로(韓神社) 즉 백제신들을 모신 사당을 세우고 남쪽에는 소노카미노야시로(園神社) 즉 신라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고 합니다.32) 여기서 말하는 가라카미(韓神)는 백제신을 의미하고 소노카미(園神)는 신라신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9세기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의례집(儀禮集)인 『정관식』에는 "일본 천황(天皇)이 신상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신은 신라신(新羅神)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百濟神)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 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33) 이 기록은 이후에도 여러 서적들에게서 무수히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신은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 즉 스사노오이고, 백제신은 오우진 천황(應神天皇)과 성명왕(성왕)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연희식』제 1권은 황실의 조상님께 드리는 제사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서두에 나타나는 '신기(神祇)'편에서는 일본 황실과 관계가 있는 신들은 모두 285위가 있다고 합니다. 이 많은 신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신으로 왕궁 안에 모시고 있는 신이 스사노오(가야계), 오우진(근초고·근구수왕계), 성명왕(개로왕·곤지왕계) 이라는 것이죠. 현재에도 일본 황실의 경내에는 신전(神殿)이 있고 이 세 분의 신을 시작으로 하여 285위의 신들이 봉안되고 있으며 황실의 실체라고 하는 세 가지 신령스러운 황실징표 즉 삼신기(三神器 : 거울, 옥, 검) 가운데 거울만을 모셔놓고 있다고 합니다.

(3) 성명왕의 후예들

이제 교토의 히라노 신사로 다시 돌아갑시다. 히라노 신사에서 모시는 신들은 천황가의 조상신들이고 이들은 이마끼신, 구도신, 후루아키신, 아이도노의 히메신 등의 순서로 모셔져있습니다.

다카야나기미쓰토시(高柳光壽) 교수 등이 저술한 『일본사 사전(日本史辭典)』에서는 히라노 신사는 교토시 키타구(北區)에 있는 신사로 이 신사의 제신은 백제계인 이마끼(今木), 구도(久度), 후루아끼(古開), 히메(比賣) 등 네 분의 신이며 794년 이마끼신(今木神)을 다른 세 위의 신과 함께 칸무 천황이 몸소 나라(奈郞) 땅에서 현재의 터전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마끼신을 백제계로 보는데, 앞서 보았듯이 당시의 사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만한 사람이었던 후지와라노 키요스케(藤原淸輔)는 킨메이 천황(欽明天皇) = 히라노(平野)의 명신(明神)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킨메이 천황과 히라노신은 백제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 [그림 ④] 『쿄하부다에(京羽二重 : 1685) 』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책으로 오늘날 쿄토의 명소 가이드 북과 같은 것인 『쿄하부다에(京羽二重 : きょうはぶたえ - 1685) 』이라는 책에는 히라노 신사의 제신(祭神)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今木神=ヤマトタケル。 源氏の神。[겐(미나모토)씨 가문의 신]
久度神=仲哀天皇。   平氏の神。[헤이(타이라)씨 가문의 신]
古関神=仁徳天皇。   高階氏の神。
比売大神=天照大神。  大江氏の神。
縣の神=天穂日命。   菅原氏、中原氏、清原氏、秋篠氏の御神也。

위에서 보면 이마끼신이 겐(源 : 미나모토)씨 가문의 신이고 구도신이 헤이(平 : 타이라)씨가문의 신이라고 하고 있군요. 이 두 가문은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입니다. 그리고 메노카미 즉 히메신(比賣神)은 칸무천황의 어머니인 야마토노니카사(和新笠 : ?~789)인데 오에시(大江 : おおえ) 가문의 신으로 되어있군요. 오에시 가문은 겐씨, 헤이씨 등과 더불어 고대부터 근세의 대표적인 일본 귀족 가문입니다.34)(야마토노니카사는 무령왕의 직계후손으로 일본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 가운데 한 분입니다. 앞으로 다시 분석할 것입니다).35)

우선 이마끼신 ― 텐지 ― 고닌 천황·야마토노니카사 ― 칸무 천황 등에 이르는 복잡한 후손들의 파생과정을 살피기에 앞서 칸무 천황의 가족관계와 그 후속 천황들을 개괄적으로 보고 넘어갑시다.

▲ [표 ①] 칸무 천황의 직계 후손 천황과 가족관계

먼저 구도신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헤이씨[平氏(へいし) 또는 타이라우지(たいらうじ)]를 살펴봅시다. 헤이(타이라)씨의 성(姓)의 어원은 헤이안경(平安京)의 '헤이(平)'와도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36) 지금까지의 분석을 토대로 본다면 헤이씨(平氏) 즉 칸무헤이씨(桓武平氏)는 모두 백제 무령왕·성왕의 후손이라는 말이 됩니다. 제50대 간무 천황으로부터 파생한 칸무헤이씨는 사성(賜姓)입니다. 즉 황족이 신하로 격이 떨어지게될 때 받는 성이라는 말입니다. 일본의 동부 지역들에 황손들이 부임지로서 가서 영주화(領主化 : 自領化)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후일 이런 영주 세력들이 무사세력들로 성장해 간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황족이 신하로 격이 떨어지면서 새로운 성을 하사받아가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주로 황실의 재정형편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봅니다(황태자가 될 가능성이 없는 황족들의 경우도 이렇게 일찌감치 나가는 경우도 있겠지요).

대표적인 예로 타이라노기요모리(平淸盛)를 들 수 있습니다. 타이라노기요모리는 12세기 중반 칸무천황의 후손으로 칭하면서 최초의 무가정권인 타이라정권(平氏政權 : 헤이씨 정권)을 열어 기나긴 무가통치(武家統治)의 '바쿠후(幕府)의 시대'를 열었던 사람입니다.37)

다음으로 이마끼신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겐지[源氏(けんじ) : 미나모토씨] 가문을 봅시다.

칸무 천황의 직계 후손들은 이후 제51대 헤이제이 천황(平城天皇), 제52대 사가 천황(嵯峨天皇)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황족들 가운데 사가천황 때 사성을 받아 나간 가문이 바로 겐지(源氏 : けんじ - 미나모토씨) 가문입니다. 사가천황 이후에는 천황의 명을 따서 겐지(源氏)를 하사하는 경우가 있어서 사가 겐지(嵯峨源氏), 닌묘 겐지(仁明源氏), 몬도쿠 겐지(文徳源氏),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요제이 겐지(陽成源氏) 등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나죠. 이들 가문들은 바로 무령왕·성왕의 직계후손들입니다. 이들 겐씨 가문 가운데는 특히 세이화 천황(칸무천황의 고손자)의 직계후손인 세이와겐씨(淸和源氏) 즉 미나모토요리토모 집안이 유명합니다.

세이와 겐씨의 후예인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 1147~1199)는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를 세운 장군입니다. 카마쿠라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무로마찌바쿠후(室町幕府 : 1136~1573)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 1305~1358)나 에도바쿠후(江戶幕府 : 1603~1867)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역시 세이와겐씨(淸和源氏) 가문이라고 합니다.38)

▲ [그림 ⑤] 아시카가 다카우지

앞서 말씀드린 타이라정권(平氏政權)은 일본의 독특한 바쿠후(幕府)체제의 시작입니다. 호겐의 난(保元の亂 : 1156)에서 겐씨(源氏)를 제압하고 성립한 타이라(헤이)씨 정권 역시 칸무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39) 호겐의 난과 헤이지(平治)의 난(1159)으로 중앙정부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야마토 왕조의 고대사회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이 때 권력을 장악한 타이라노기요모리의 권력 전횡에 다시 겐씨(源氏)가 반기를 들고 겐씨 무사단과 헤씨 무사단은 5년간 내전(1180.5∼1185.3)에 들어갔는데, 이를 겐페이갓센(源平合戰)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에서 결국 겐씨무사단이 승리하여 타이라씨 일족은 멸망합니다. 이 전쟁은 마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故事)를 방불케하는 두 가문(겐씨와 타이라씨)의 기나긴 전쟁이었습니다. 칸무의 후손들이 천하를 두고 쟁패를 벌인 것이지요. 즉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갔던 천황의 먼 친족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한 것이지요.

▲ [그림 ⑥] 겐페이갓센(源平合戰) 전쟁도[海北友雪(1598~1677)作]

그런데 이 타이라 가문의 시조신을 모신 곳도 히라노 신사라고 합니다. 즉 성왕으로 알려진 이마끼노가미(今木神)가 일본 무가(武家)의 양대 축을 이루는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의 시조라는 것입니다.40)

이를 보면 무령왕·성왕 - 칸무 천황의 후손들이 1천여 년 이상을 열도쥬신을 이끌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41)

필자 주

(22) 『연희식(延喜式)』은 황실 법도에 대한 율령 시행을 위한 세부 규정으로 헤이안 시대 초기의 연희(延喜) 연간에 착수되어 연장(延長) 5년(927)에 완성된 모두 5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23) 『歷史讀本』2003·10月號.
(24) 카스가노가미(春日神 : かすがのかみ)는 카스가노묘진(春日明神) 또는 카스가 곤겐(春日権現)이라고도 칭해진다. 카스가 다이샤(春日大社)로부터 권청을 받은 신으로 신사의 제신을 나타낼 때 주제신(主祭神)이라고도 하고 카스가노다이진(春日大神) 등이라고 쓰여진다. 카스가노가미(春日神)를 모시는 신사는 일본 전국에 약 1천여개의 신사가 있다. 카스가노가미는 후지와라씨·나카토미(藤原氏・中臣氏)씨의 씨족신인데 카스가 다이샤(春日大社)에 모시기 시작한 것은 768년의 일로, 그 이전에는 카스가씨(春日氏)의 씨족신을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25) 『文徳天皇実録』仁寿元年(851)
(26) 『延喜式』의 제1 편 「神妙」에는 쿄토 헤이안의 북쪽으로 위치한 "히라노 신사는 왕실 법도에 의해서 왕궁에서 직접 관할하고 있는 중대한 사당"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27) 『文徳天皇実録』仁寿元年(851)
(28) 신사 앞 기둥문의 편액에는 「히라노 타이샤(平野大社)」라고 명기되어 있고 제신에 대해 「平野大神」「皇大御神」라고 하는 칭호도 사용되고 있다.
(29) 西角井正慶『年中行事辭典』(東京堂 : 1958)
(30) 『平野神社由緖略記』
(31) 西角井正慶, 앞의 책.
(32) "宮內省坐神三坐 月次祭 新嘗祭 園神社 韓神社 二坐 "(『延喜式』「神祇」 第一)
(33) 『貞觀儀式』「園倂韓神祭」
(34) 오에(大江 : おおえ)씨는 고대의 씨족인 하지씨(土師氏)가 원류로 추정된다. 칸무 천황이 즉위 10년(791) 친족관계에 있는 하지제상(土師諸上) 등에 오에다(大枝)의 성을 주었는데 866년경 성을 바꾸어 오오에(大江)가 되었다. 오에씨(大江氏)에게는 뛰어난 와까(和歌) 작가나 학자가 많아, 조정에 중용되었다. 1184년 가와치 겐씨(河内源氏)의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를 받들었던 오오에노히로모토(大江広元)은 카마쿠라 바쿠(鎌倉幕府)의 핵심인사가 되었다. 이 가문으로부터 유명 무가(武家)인 모리(毛利)씨가 나왔다.
(35) 高柳光壽, 竹內理三『日本史辭典』(角川書店 : 1976)
(36) 칸무 천황과 그의 夫人인 多治比真宗(769-813 : 多治比長野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난 葛原親王(786-853)이 바로 桓武平氏의 시조라고 한다.
(37) 일본의 武家政治는 호켄(保元)의 난(1156)으로 시작되는데 천황가의 권력 쟁탈의 과정에서 천황과 귀족(宮家)의 취약성을 정확히 간파한 타이라노기요모리(平淸盛)가 가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함에 따라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타이라씨는 바쿠체제의 틀을 잡은 것이기도 했다.
(38) 홍윤기, 앞의 책, 333쪽.
(39) 타이라노기요모리는 최고의 관직인 태정대신에 오르는 한편 기나이(畿內), 사이고쿠(西國) 등의 무사들과 주종관계를 맺었다.
(40) 김현구, 앞의 책, 177쪽 참고.
(41) 홍윤기, 앞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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