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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은 허리가 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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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은 허리가 잘리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44> 댓재~삽당령/9.17~19

산행 서른 아흐레 째. 목요일.

산행 준비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오니 남은 별 새벽하늘에 반짝이고 있었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마당 한 쪽에 코스모스 피어 한들거리고 뒤편에는 장작으로 쓰려고 잘라놓은 장작들이 널려 있었다. 빛바랜 천 조각처럼 어둠은 옅어지고 아침은 산 너머에서부터 희부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이기령(耳基嶺, 810m)으로 향했다. 동해 곤로동과 정선 부수베리를 잇는 고개이다. 이기령으로 오르는 비포장 길은 매우 거칠고 꼬불거렸다. 계곡을 바라보았다. 맑은 물 흘러 아름다웠다. 조금 더 올라가자 깊고 넓어진 계곡에 운무 가득했다. 차창을 열고 깊이 호흡했다. 새벽 숲의 신선한 공기가 가슴 깊숙이 젖어 들었다. 산길이 아니라 구름길을 가는 듯했다. 어제 밤에는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이었다.
이기령에 도착했다. 야영장이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 줄지어 선 낙엽송 숲 자락에 야생화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청옥, 두타를 지나며 누리지 못한 호사를 누리는 듯했다. 상월봉을 향해 들어가는 숲길은 아늑했다. 이정표 외에도 지친 몸 쉴 나무 의자가 있었다. 정선국유림관리소에서 세워놓은 백두대간 안내판도 있었다. 백두대간에 대한 소개와 유래를 소개한 후 가치에 대해 정리해 놓았다. 우리 민족의 상징이며 생태계의 중심축이고 또한 문화적 특성을 구획하는 울타리라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몸 기대어 살아가는 땅을 올바로 인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고마운 마음이었다.

날씨 쌀쌀했다. 상월산(970.3m)을 향했다. 낙엽송 가득하고 조릿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 불었다. 지나는 길마다 저마다 그리움 품은 듯 풀잎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 바라보며 내 마음도 흔들렸다. 헬기장 지나는 길에 야생화 만발했다. 엉겅퀴 무리지어 피어 있고, 빛바랜 금마타리와 억새가 물결일 듯 출렁이고 있었다. 구절초와 쑥부쟁이도 무리지어 가득했다. 두타와 청옥이 '실컷 봐라!'하며 나를 보고 웃을 것만 같았다.
▲생명 움트다 ©이호상

상월산에 올랐다. 고사목 여러 그루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에메랄드빛이었다. 뿌리를 드러낸 채 말라 죽은 큰 소나무 밑둥치에 구절초 세 송이 함초롬히 피어 있었다. 예뻤다. 마음 따스해졌다. 정겨웠다. 미소 짓게 했다.

그래, 삶이란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언제나 살만한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에 마음 한 자락 풀어 놓고 상월산을 내려오니 이내 원방재(690m)였다. 여름 내내 깊어진 숲은 울창했으나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드리워 길을 일러주었다. 잠시 머물러 살펴보니 오래 전 나무로 만들어 놓았던 이정표가 조릿대 무리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한 때는 많은 이들에게 길을 알려주었으나 이제는 저 홀로 남겨져 쓸쓸했다. 붙여 놓았던 글씨들은 떨어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지나 온 세월이 버려진 이정표에도 남아 삶의 소중함을 말없이 일러주고 있었다.

1022봉을 지나 백봉령으로 향했다. 키 높이까지 자란 조릿대 빽빽하여 몸에 걸리고 얼굴 찔렀다. 산줄기 987.2m, 863m, 832m 봉우리로 차츰 몸을 낮추어가자 이내 백봉령이었다.
▲카르스트 지형 ©이호상

백봉령(白鳳嶺, 780m)은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으로 정선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했던 고개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에는 '엎드릴 복(伏)자'를 써서 백복령(白伏嶺)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원래 이름이 아니다. 일제에 의해 바뀐 이름이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대동여지도'에는 백복령(白福嶺)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택리지'에는 백봉령(白鳳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흰 봉황'이라는 뜻이다. 또한 산경표에는 '일백 백(百)'자를 써서 백복령(百福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증보문헌비고'에는 백복령(百福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희복현(希福峴)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하고 있다. '복을 바라는 고개'라는 뜻이다. 이렇듯 백봉령은 여러 개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이름이 상서롭거나 복을 바라는 의미의 이름이지만 현재 공식적으로 쓰고 있는 이름인 백복령(白伏嶺)은 그 뜻이 사뭇 다르다.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고개'라는 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국립지리원이 아직도 이 고개의 이름을 백복령(白伏嶺)으로 쓰고 있다면 마땅히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현지의 이정표에는 모두 백봉령으로 쓰여 있다는 사실이다. 백봉령이라는 이름은 '하얀 봉황의 고개'이니 그 뜻도 좋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 글은 현지의 이정표와 사람들의 뜻을 따라 이 고개를 백봉령(白鳳嶺)으로 표기하였다.

백봉령이었다. 대간 길 이어가려 했으나 그리하지 못했다. 백두대간은 백봉령을 지나 자병산(紫屛山, 872.5m)으로 굽이치며 돌았으나 지금은 길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유실되어 있었다. 끊어져 있었다.
▲©이호상

백봉령으로 들어서자 자병산에서 석회석을 개발하고 있는 한라시멘트에서 설치해 놓은 '접근금지'라고 쓴 경고문과 함께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는 석회석 광산구역입니다.
발파 시 돌이 나는 등 위험 요소가 있으니
출입자는 당사 직원의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안내판에는 간단한 약도도 그려 있었다. 자병산은 직진 방향이었다. 숲을 헤치고 들어가니 눈앞에 자병산이 보였다. 그 모습, 참혹했다. 완전히 파헤쳐져 있었다. 산의 머리는 무너져 있었다. 산은 흰 내장을 그대로 드러낸 채 계속 파헤쳐지고 있었다. 석회석을 캐고 운반하기 위해 차가 지나도록 만들어 놓은 간이도로는 멀리 보니 마치 밧줄 같고 그물 같았다. 산을 꽁꽁 동여 맨 듯했다. 자줏빛 병풍을 드리운 것 같이 아름다운 산이라 하여 자병산(紫屛山)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고 있던 산은 그 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자병산은 해발고도가 1000m도 안 되는 산이지만 빼어난 자연경관과 생태적으로 풍부한 동식물상을 자랑하던 곳이다. 삵과 고슴도치, 수달 등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도 살고, 백리향, 만병초, 금강애기나리, 한계령풀, 돌마타리 같은 희귀식물들도 뿌리 내려 살아가는 곳이었다. 더구나 자병산은 석회암지대라서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생태학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던 산이다. 생태계는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백두대간은 허리가 잘리고 ©이호상

어떻게 자연 생태계에서 한 생명으로서의 위치 밖에 지니지 못한 인간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산을 보호하고 숲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지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처참하고 참담한 모습을 봐야 산을 사랑하고 숲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않겠는가 말이다.

가슴 아팠다. 눈물 흘렸다. 단 한 번의 단절도 없이 흘러 내려왔다는 백두대간은 끊어져 있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1,400km를 이어온 백두대간은 이 곳 자병산에서 그 허리가 끊어져 있었다. 이 땅의 허리가 잘라졌지만 아파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아프게 했다. 절망하게 했다.
한민족 우리 모두가 반만년 몸 기대어 살아온 땅을 있게 한 백두대간, 열 개의 큰 강을 품어 흐르게 함으로 생명 이루고 마을 이루어 오순도순 살게 해 준 산줄기, 대륙과 맞닿아 있어 삼면이 바다인 이 땅에서 생명의 통로 역할을 하는 산줄기인 백두대간의 허리가 잘려져 있었다. 백두대간은 더 이상 단절 없이 흐르는 산줄기가 아니었다. 석회석을 캐기 위해 자병산을 파헤치고 철도에 깔 자갈을 얻기 위해 금산을 절단 내어 곳곳이 끊어져 있었다.
무너진 산자락 바라보았다. 마음 아팠다. 부끄러웠다.
▲백두대간은 내를 건너 이어지고 ©이호상

끊어진 백두대간 길을 작은 내를 건너 이어 갔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물이 산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물길을 건너 작은 골짜기를 벗어났다. 도로가 나왔다. 도로를 지나 생계령 가는 길목에서 샘을 만났다. 물을 마셨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맑고 찬 물이 흘러들었다. 정신 들었다. 빈 물병에 물을 채우고 다시 산길을 이어 갔다. 오르막길이었다. 야생화 가득했다. 수리취, 금마타리, 개망초, 기린초 흐드러지게 피어 마음 위로해 주었다. 바람 불자 흔들렸다.

'우린 이곳에서도 잘 자라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이렇게 말하며 나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물 왈칵 쏟아졌다. 어린 참나무들이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눈물 훔치며 걸었다. 넓은 길이 나왔다. 굵은 신갈나무 늘어서 있었다. 답답한 가슴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마음 편안했다. 눕고 싶었다.

생계령(生溪嶺, 640m)에 도착했다. 산계리와 임계면을 잇는 고개이다. 옥계면 산계리 사람들이 정선 임계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었던 고개로 산계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고개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이 고개에서 도토리 열매를 채취했다. 생계령은 거기서 나온 이름이다. 슬픈 이름이다. 가슴 저미는 이름이다.

어둠 깊어지고 있었다.
숲가에 앉아 깊어지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들이 어둠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 한 동안 앉아 있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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