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대약진' 운동에서 배운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대약진' 운동에서 배운다

[中國探究]<17>

중국에게 있어서 지난 2008년은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쓰촨 지진 등 국내외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사히 올림픽을 치러냈고, 비록 일부 문제가 있었으나 개혁개방 30년간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다만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실시되었던 '대약진' 운동 50주년이었던 역사사실은 아무도 회고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실패한 정책의 후유증이 얼마나 심대했는지에 대한 자괴감과 수치심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에게 있어서 '대약진' 운동이란 어떤 의미일까?

1949년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한 중국은 소련과 사회주의 형제 국가로서 '소련 일변도'의 정책을 추구하였다. 국가정책의 대부분이 소련을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후르시쵸프의 등장으로 상황은 급변하였다. 그가 추진한 스탈린 격하운동과 미국과의 밀월관계 등은 신생사회주의 중국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욱이 건국초기 취약한 중국의 공업 분야를 지원하던 소련의 기술자들이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자 마오저뚱은 '자력갱생'의 전략으로 맞서면서 체제위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른바 '대약진' 운동을 실시했다.

'대약진' 운동은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성격인 '만만디'라는 본래의 느린 기질과는 달리 급속하게 사회주의 사회를 성공시키고자 추진하였다. 그렇게 해서 내건 슬로건이 '10년 만에 영국을 따라잡고, 15년 만에 미국을 이기자!'(超英干美)'였다. 이렇게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모든 가치를 '많이, 빨리, 잘하고, 절약하자(多, 快, 好, 省)'에 두고 중국의 '고속발전'을 추구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대약진' 운동은 중국국가 통계국의 공식자료에서도 지적하듯이 2,68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를 경험하였다. 또한 절대 권력자 마오쩌뚱이 권력 2선으로 물러나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더욱이 이 운동의 결과는 중국 현대사에서 '대동란'이라고 부르는 '문화대혁명'을 가져오게 된 씨앗을 잉태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이렇듯 지도부의 정책적 실수는 중국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마치 '광란의 시대'를 연상하는 '대약진' 운동의 어처구니없는 정책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이러한 정책이 실시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국민의 문맹율도 일조하였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蔣介石)도 자신이 실패의 원인을 중국인들의 문맹에 두고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공산혁명이 성공한 1949년의 중국인들의 문맹률은 80%에 달하였고, '대약진' 운동을 거친 뒤인 1964년의 일부 조작된 통계수치로도 문맹률이 52%에 달해 국민의 절반이 문맹이었던 시기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맹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평가받는 '대약진' 운동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먼저 '4대 해충(쥐, 참새, 파리, 모기)' 제거운동이다. 이 가운데 참새잡기는 중국과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운동이었다. 당시 6억 7천만 인구 중에 누군가 이러한 생각을 했다. 계산은 한 쌍의 참새가 일 년에 부화할 수 있는 새끼는 약 10-40마리라고 추정하자. 만약 한 마리가 일 년에 4근(1근은 500그램)의 식량을 소모한다면 한 예로 쓰촨성 인왕현에 살고 있는 참새를 320만 마리로 가정할 때 매년 1,280근의 양식을 소모한다. 그런데 한사람이 일 년 평균 400근을 소비한다고 가정하면 이들 참새가 소모하는 양식은 결국 중국인 3만 2천명이 일 년을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방송되자 전국적으로 참새를 잡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진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 운동은 1958년 2월 중국 쓰촨성 치옹라이현을 필두로 참새와의 전쟁이 이루어졌다. 이 현에서는 처음 한 사람 당 참새 30-50마리를 잡도록 할당했다. 이렇게 되면 2년 뒤 한 마리의 참새도 없는 현이 된다는 계산이었다. 그들은 148개 전투지역을 확정하고 모두가 참새 잡이에 나서 구체적으로 218,007명이 이 사업에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 명이 다치자 '영광스런 희생'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경험은 전국으로 방영되었고 수도 베이징까지 영향을 미쳤다. 1958년 4월 19일 역사 명소인 천단(天壇) '전투지역'에서 하루에 966마리 참새를 잡는 성과를 얻었다고 공식 보도하였다. 아이들은 나뭇가지로 만든 새총으로, 국민들은 꽹가리를 치고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참새 잡이에 몰두하였다. 참새 잡이 운동은 이렇게 밤낮없이 진행되었고 잡은 참새는 검사를 받고 한 곳에 모아 모두 태웠다.

벼농사와 관련해서도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어느 간부가 이렇게 말했다. "벼를 심으면서 왜 칸을 넓게 심는가? 벼와 벼 사이를 촘촘히 심으면 한 줄을 더 심을 수 있고 수확이 배로 늘어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견도 훌륭한 정책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정책의 결과 벼와 벼 사이에 바람이 통하지 않고 되었고 벼들이 썩게 되면서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자 모두 쓸어져버려 벼농사는 전국적으로 망치게 되었다. 농업국가인 중국이 수 천 년 간 지어온 농사의 지혜를 캠페인식 정책 때문에 잊어버렸던 것이다. 결국 벼농사는 망했고, 양식이 없는 국민들은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참새 잡이로 천적이 사라진 논에는 해충이 들 끌어 농사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대약진' 운동의 핵심 정책이었던 철강생산도 주먹구구식 이었다. 이 정책이 채택되자 전 국민은 집집마다 소형 용광로를 갖추고 철강을 생산하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영국과 미국을 이기려면 철강 생산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집집마다 국민들 모두가 용광로를 만들고 대대적인 철강 생산 사업에 전 국민이 동원되었다. 정부 선전에 흥분된 어느 부인은 남편과 경쟁까지 하면서 밤잠을 설쳐가며 어떻게 하면 이 사업을 잘할까 고민하였다. 그녀가 찾아낸 방법이 흙으로 만든 용광로가 불길에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 흙에 섞어 바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말 사나운 불길에도 용광로가 터지지 않았다. 그러자 많은 여자들이 모두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여 생산한 철강제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제품이었다. 그런데 수치상으로 1959년 전 세계의 철강생산의 1위가 중국이었다는 아이러니는 무엇으로 설명할까? 이렇게 전 국민이 철강 생산을 하는 과정에서 용광로에 사용할 연료는 어디서 해결했을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의 모든 산의 나무들이 잘라져 나갔다. 그 결과 민둥산이 된 산은 산사태가 나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경험하는 우리에게 중국의 '대약진' 운동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결국 이와 같은 캠페인식 방법으로는 효과적인 경제건설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설익은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정부도 문제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도 꼭 옳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신중함과 진지함이 더욱 요구되는 것은 그 영향력이 무엇보다 크기 때문이다. 마치 한바탕 미친 굿판과 같았던 중국의 '대약진' 운동을 회고하면서 역사가 진보했다는 것은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시기를 극복했다는 것은 아닐까?

* 올해부터 <중국탐구>는 한인희(대진대 중국학과 교수) 강준영(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박한진(KOTRA 중국 전문가) 장리리(중국 외교학원 교수) 양평섭(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병곤(통일연구원) 임대근(외대 중국어과 교수) 강진석(한양대 연구교수) 등 여덟 분이 차례로 집필합니다. (매주 금요일 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