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거버넌스(governance)와 거번먼트(government)는 원래 '다스림[政]'을 뜻하는 동의어다. 다만 후자가 공권력을 갖고 다스리는 '정부'라는 뜻으로 자주 쓰임에 따라 더 넓은 의미의 이런저런 다스림을 가리킬 때 '거버넌스'라는 낱말을 택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가가 아닌 기업(business corporation)이 다스려지는 방식을 corporate governance라 하며 우리말로는 '기업의 지배구조'라고 (약간 부정확하게) 번역한다. 또한, 정부가 일방적으로 통치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여러 세력과 협동하고 합의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행태를 거버넌스라 칭하면서 더러 '협치(協治)'로 옮기곤 한다.
그러나 완전한 전제정치가 아닌 한에는 정부권력의 행사 자체가 여러 세력의 협동을 통해 이뤄지게 마련이다. 예컨대 입헌군주제만 해도 군주가 의회 등 헌법기관들과 '더불어 다스리는' 체제이며, 여기에 정당정치가 가세하면 민·관 사이에 '정치권'이라는 독특한 국정참여집단이 형성된다. 삼권분립은 국가의 입법·행정·사법부가 일정하게 분리돼서 협동하며 통치하는 체제요, 언론을 '제4부'라 일컬을 때는 언론도 국가 거버넌스의 한몫을 담당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정경유착은 정치권과 재계가 서로 상대방의 다스림에 간여하는 나쁜 체제지만 그 또한 거버넌스의 한 형태다. 이 모든 것을 '협치'라는 새 낱말을 만들어 지칭하는 데에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을지라도, 그것은 '거버넌스'의 특정 용법에 대한 해석이지 정확한 번역은 아닐 터이다.
나라 다스리기가 고장난 대한민국
2009년 새해를 맞으며 이런 낱말풀이를 해보는 것은 대한민국의 나라 다스리기(=거버넌스)에 심각한 고장이 난 징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거번먼트)의 고장 사태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의회 기능이 실종되고 독립된 사법부 권력이 위축되는 등 삼권분립이 무너져가는 가운데, 정부권한을 온통 틀어쥔 행정부는 행정부대로 스스로 내건 목표를 달성할 능력이 태무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더하여 언론이 자신의 탐욕 때문이건 정부의 탄압 때문이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시민사회의 운동들도 국정의 방향설정에 참여할 능력을 결한 상황이라면, 나라의 거버넌스가 총체적인 위기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정부의 난조는 다분히 예견 가능한 것이었다. 2007년 대선에서 후보의 도덕성 문제는 '경제 살리기' 구호 속에 묻혀버렸지만, 지도자의 도덕성을 개인윤리 차원에서보다 그의 통치능력과 연관시켜 판단할 것을 촉구하는 발언이 당시에도 없지 않았다. "국민 앞에서 거짓말을 너무 거침없이 한다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짓이요, 시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부패를 척결하며 서민생활을 안정시킬 능력을 원천적으로 내팽개치는 길입니다."(각계인사 33인 시국성명, 2007.12.17)
신뢰의 결여가 통치능력의 결함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경제위기 국면에서 거듭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신뢰만 해주면 문제를 풀어갈 다른 능력은 있는 걸까? 함부로 단정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 세간의 불신이 '능력'에 대한 불신을 포함하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CEO 대통령'의 신화는 어느새 무너졌고, 정주영 회장 휘하에서 진짜 CEO(최고경영자)가 배출될 여지가 없었으리라는 깨달음이 뒤늦게 확산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정주영식 거버넌스가 통하는 시대도 아니지 않는가.
이명박정부의 신뢰성은 2008년 촛불시위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심하게 손상되었다. 끝없이 꼬리를 문 촛불행렬을 청와대 뒷산에서 내려다보며 즐겨 부르던〈아침이슬〉을 들었다던 눈물겨운(?) 발언 이후에 곧 대대적인 촛불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러다가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모습에서 정부의 권위는 거의 완전한 파탄에 빠졌다. 정치지도자가 국민 앞에서의 말바꾸기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바람에 설혹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실효를 보기 어렵게 되었거니와,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빙자해서 미국을 포함한 세계의 흐름에 역행하는 규제완화와 부자들의 특권강화에 몰두하는 행태는 도덕성의 문제를 넘어 초보적인 통치능력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의 입법현안을 국회의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달성할 것을 공언하며 '전쟁'을 선포하고 '속도전'을 다짐한 상태다. 비록 국회의장의 입장표명 이후 원내대표들의 회담이 열림으로써 한 박자 늦춰지기는 했으나 다수 국민의 반대와 야당의 저항을 물리력으로 진압하고 방송법 개악 등 세칭 'MB악법'을 통과시킬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그럴 경우 대통령과 여당은 승리를 해도 이른바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 즉 전투에는 이겼으나 너무나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만 고대 그리스 피루스왕의 전례를 고스란히 재연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명박정부가 스스로 운명을 재촉할 때 나라는 어찌되는가? 경제위기의 한복판에 헌정위기마저 겹친다면 민생이 완전히 망가질 것은 물론, 극도로 심란해진 국민이 또 한번 불행한 선택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막연히 4년 뒤에 보자고 벼르는 것은 4년을 어찌 견딜 거냐고 한숨짓고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한가한 짓거리다.
그러니 어찌할 건가?
유일한 해답은 남은 4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을 대통령에게 남겨주면서 나머지는 내각과 입법부, 사법부, 언론, 시민사회 등의 몫으로 배분하는 정교한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나라의 거버넌스 체계를 다시 짜는 일이다.
이것이 말처럼 쉬울 수는 없다. 대통령의 '대오각성'으로 될 일이라면 애초에 사태가 이 지경에 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실은 이명박 대통령 아닌 그 어느 대통령이라 해도 자기가 획득한 권력을 그런 식으로 선선히 나눠줄 사람은 없다.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도, 정부 내에서 책임있게 행사할 권력을 상당부분 자진해서 방기한 전례를 남기기는 했으나 정부와 비정부 분야의 진정한 파트너십을 설계할 의지도 경륜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른 한편 민주정부 아래서는 시민사회도 거버넌스 혁신을 위해 총력전을 펼칠 동기가 약하다. 죽기살기로 달려들어도 될까 말까 한 일이건만 정부가 알아서 해주기를 촉구하거나 안해줄 때 질책하는 역할에 안주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시대야말로 획기적인 시민참여 확대를 위한 절호의 기회다. 지금은 나라 다스리기의 새로운 체계를 만들지 못하면 국가 전체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민주화 20년의 성취, 아니 대한민국 60년의 성취마저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가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거버넌스의 일부를 담당할 만한 책임성과 전문성을 함양하면서, 정당·사회단체·노동조합·종교계 들이 연대하여 입법부의 활성화, 사법부의 독립, 언론의 건전성 등을 확보할 범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는 현재로서는 요원해 보이는 일이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발상과 열성으로 연대를 추구해야 된다는 성찰이 여기저기서 이미 시작된 것 또한 사실이다.
시민참여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거버넌스'의 개편까지 안 가고 '거번먼트' 차원에서 국정위기에 대처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거국내각이다. 그러나 이따금 거론되는 박근혜 전 대표나 그 어떤 인물이 총리가 되더라도 대통령의 역할에 대한 일종의 범국민적 협약이 없는 상태라면 실제로 얼마나 힘을 쓸 것이며 도대체 그 자리를 맡으려고나 할 것인가? 이처럼 거국내각도 거당내각도 안되다 보면 한국의 이른바 보수세력에도 분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자신들의 단기적 잇속 챙기기에만 급급한 세력으로서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난 무리들과, 대한민국의 정당한 성취를 간직하고 지키려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갈라설 때가 온다는 것이다. 당장에는 후자가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들이 가세함으로써 대한민국 거버넌스의 쇄신은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어차피 선택은 파국 아니면 새로운 거버넌스다. 내년 봄에 대규모 군중시위가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막기는 어려울 듯하며, 정권이 하기에 따라 겨울이 채 가기 전에 그런 사태가 도래할 수도 있다. 그 주력부대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노래하는 촛불군중일지 아니면 횃불 들기도 마다 않는 배고프고 성난 군중일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아마도 양자의 결합으로 시작되기 십상인데, 정부로서는 후자의 '불법 폭력시위'를 오히려 선호할 가능성도 크지만 그것이 정부에 꼭 유리한 씨나리오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졸고 〈'선진화 원년'과 '잃어버린 10년'〉, 《월간중앙》 2009년 1월호 참조). 어느 경우든 2008년 초여름의 별처럼 아름다운 축제마당이 그대로 재연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관건은 '촛불소녀'로 상징되는 발랄함과 유쾌함이 한층 절박해진 군중과의 결합을 통해 또 한번 새로운 시위문화를 창출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중의 토론과 합의를 이어받아 언론과 여러 전문집단, 권익집단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정당들과 함께 건설적으로 국정에 기여하는 ― 단순한 시위참여가 아니라 국가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 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자면 길을 닦는 작업이 상당정도 미리 진척되어 있어야 하며, 그랬을 때 한국사회에서 국민주권과 민중자치, 그리고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 2009년의 새로운 촛불과 함께 큼직한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물론 2009년이 종착점은 아니다. 도중의 가장 눈부신 이정표가 못 되어도 좋다. 그러나 전진이 계속됨을 실감할 때 어떤 경제위기도, 정치혼란도 견뎌낼 만해지고 이겨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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