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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성명왕, 킨메이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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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성명왕, 킨메이 천황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53>

(2) 성왕, 성명왕, 킨메이 천황

지금까지 우리는 킨메이 천황이 백제의 성왕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고바야시 교수와 홍윤기 교수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고바야시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 일본 사학계가 수용하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즉 전체적인 정황은 납득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사이사이의 수수께끼를 이어줄 수 있는 증거들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가 일부 타당한 만큼 충분히 검토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먼저 성왕이 킨메이 천황이라는 이유들을 시각을 바꿔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첫째는 『일본서기』에 나타난 킨메이 천황기는 킨메이 천황 자체의 기록보다는 성왕의 기록이나 백제 관련 기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기의 기록은 백제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인용된 자료도 대부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제본기(百濟本記)』라는 책입니다. 무려 14회나 인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백제본기』는 게이타이(곤지왕의 아드님) 천황기부터 나타나고 킨메이 천황기 이후에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게이타이 천황기에는 『백제본기』의 인용이 5회에 걸쳐있습니다(게이타이 3년, 7년, 8년, 9년, 25년).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기는 『백제본기』를 기반으로 쓰여졌으며 그 내용도 대부분이 한반도와 관련된 내용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열도인(일본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즉 『일본서기』킨메이 천황기에 보면 일본측 사료에 의한 것은 없고 『백제본기』라는 점, 킨메이 천황이 임라의 부흥에 지나칠 정도로 강력한 의지를 가진 점, 임나일본부가 천황이 파견한 기관이라면서도 직접 일본 정부가 천황의 칙령을 전하지 않고 성왕을 통해 간접지배하는 하는 점 등은 열도인들도 불가사의하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킨메이 천황기에는 일본부가 스스로 군사력을 행사하거나 행정적인 권력을 행사한 기록도 없지요. 사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말도 이시대에는 없었던 말이지요. 일본은 반도부여(백제)의 멸망기에 나타난 용어입니다(이 부분은 다시 상세히 해설합니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기에는 성왕 즉 성명왕은 11회나 나타납니다. 이 가운데 성왕의 연설문을 매우 길게 인용한 것은 4회에 걸쳐 나타나는데 킨메이 천황이 행한 연설은 없습니다. 킨메이 천황의 조서만 나올 뿐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물론 성왕의 기록에는 성왕이 천황의 뜻을 받들어 말을 하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킨메이 천황의 실체가 불분명합니다. 당시 천황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를 감안한다면 성왕이 천황의 뜻을 받들 이유도 없는 것이고 부여계의 서열상으로 봐도 성왕이 킨메이 천황보다 높을 가능성 크므로 킨메이 천황은 성왕일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구체적으로 『일본서기』킨메이 천황기를 보면 천황이 생생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불교가 전래되는 시기에 국한됩니다. 나머지 시기는 마치 '그림자 천황'이라고 해야할 정도로 실체가 나타나지 않는 '얼굴없는 천황'입니다. 그러면서도 엉뚱하게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고 있습니다. 열도(일본)가 왜 고구려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지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러나 성왕과 그의 아드님인 위덕왕에 대해서는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기는 마치 성왕과 위덕왕의 생생한 전기를 보는 듯합니다. 희한한 말이지만 위덕왕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한 것도 『삼국사기』에는 없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킨메이 천황의 즉위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즉 즉위년도도 문제이지만 킨메이 천황 이전의 천황들의 즉위 및 재위 그리고 그들의 죽음도 의문 투성이입니다. 무엇보다도 게이타이 천황과 그의 직계 자제들이 몰살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만약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가 몰살되었다면 가장 유력한 천황의 후보는 사촌인 성왕이 될 수가 있죠. 킨메이 이전의 천황은 안칸(安閑)·센카(宣化) 천황인데 이들은 『일본서기』에서는 정상적으로 등극한 듯이 묘사를하고 있지만 이들의 죽음들은 전사나 암살로 보는 것이 대세입니다. 안칸 천황은 즉위 후 2년이 채 못되어 죽고 센카 천황도 4년만에 죽는데 이들의 죽음은 다른 천황과는 달리 유언도 없으며 죽음에 대한 어떤 묘사도 없이 짧게 "천황이 서거했다[天皇 崩]"라고만 되어있습니다.

핵심이 되는 기록은 바로 『일본서기』입니다. 중요한 내용이니 모두 인용해보겠습니다.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태세(太歲) 3월 군사가 안라(安羅)에 가서 걸모성(乞毛城)에 주둔하였다. 이달에 고려(고구려)가 그 왕을 시해하였다. 또 들으니 일본의 천황과 태자, 황자들이 모두 다 죽었다고 하였다."7)

여기서 고구려왕은 안장왕(519~531)인 듯 합니다. 문제는 게이타이 일족이 모두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위 계승 서열로 친다면 자연스럽게 성왕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안칸(安閑)·센카(宣化) 천황은 게이타이 천황과 함께 사망한 것이 됩니다. 문제는 다시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이들을 죽인 사람이 누군인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킨메이와 게이타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킨메이 천황은 배다른 형인 센카 천황이 죽은 후 즉위 했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일본서기』의 기년에는 몇 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대해 열도에서는 많은 견해들과 극심한 논란이 있습니다.

히라코 다쿠레이(平子鐸嶺)는 게이타이 천황의 사망 연도를 『고사기(古事記)』의 527년(丁未年 4월 9일)으로 하여 그로부터 각각 2년씩을 안칸(安閑) 천황과 센카(宣化) 천황이 천황에 등극하였고 531년에 킨메이 천황이 즉위 했다고 주장합니다. 즉 게이타이 천황이 527년에 서거했다는 말이죠. 이에 대하여 기타사다키치(喜田貞吉)는 킨메이 천황이 531년에 즉위한 것은 맞지만 킨메이 천황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534년에 안칸(安閑)와 센카(宣化)를 옹립 하는 등 킨메이 천황의 조정과 안칸・센카 천황의 조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른 바 병립왕조 시대(두 개의 왕조가 동시에 존재)가 있었지만 센카가 죽음으로써 킨메이 천황조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야시야 진사부로(林屋辰三郎)는 키타(喜田)의 견해에 동의 하지만, 게이타이는 암살되었다고 주장했고 미즈노 유우(水野祐)는 게이타이 천황이 527년에 죽었지만 센카(宣化)는 가공의 인물일 뿐이고 안카(安閑)가 8년간을 재위하여 535년에 킨메이 천황이 즉위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시라사키쇼우이치로우(白崎昭一郎)는 안카(安閑)의 재위는 4년이고 그 다음은 4년 동안은 센카(宣化)・킨메이(欽明) 두 조정이 병립했다고 보았습니다. 참고로 유명 역사 소설가인 구로이와쥬코(黒岩重吾 : 1924∼2003)는 『일본서기』게이타이 천황조의 기록을 토대로 천황 및 태자, 황태자가 동시에 죽었고 안카나 센카는 즉위도 못하고 연금·암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서기』의 연대를 판별하는 것은 일단 분명한 사건을 중심으로 다른 나라들의 사서에 나타나는 연대와 비교하는 방법이 가장 타당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킨메이 천황의 등극도 킨메이조에 나타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선별하고 이것을 다른 사서와 비교한다는 말입니다. 『일본서기』에는 킨메이 천황 15년에 백제 성왕이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리입니다. 성왕의 전사는 다른 사서 즉 『삼국사기』에서는 554년이므로 킨메이 천황은 사실상 539년에 즉위한 것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도(일본)에서는 게이타이 천황이 서거한 이후 거의 10여년을 정치적 혼란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 가족들이 모두 전멸한 것이고요.

다음으로 게이타이 황족들을 몰살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간단하게 한번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결과만으로 본다면 킨메이 천황이 정권을 장악했으니 황족들을 시해한 자들은 킨메이 천황 계열의 사람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킨메이(欽明)라는 시호(諡號)를 보면 킨메이 천황이 이들을 몰살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도 합니다. 즉 킨메이(欽明)라는 말 자체가 '매사에 공경하고 도리를 밝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킨메이 천황이 게이타이 계열을 몰살했다면 이런 시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상한 것은 안칸 천황에서 안칸(安閑)의 의미도 '편안하고 안정되었다'는 의미이고 센카(宣化)도 '덕이 있는 정치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인데 3년도 못 채우고 몰살당한 왕들에게 올리는 시호로는 적합한 것이 아니죠? 만약 그렇다면 이 안칸천황이나 센카 천황은 가공(架空)의 천황으로 이름만 나오는 천황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게이타이 천황이 서거한 때부터 대략 10여년 간은 극심한 정치적인 혼란기였거나 후사(後嗣)가 없어서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통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 [그림 ④] 킨메이 천황릉(奈良県高市郡明日香村大字平田 소재)

이 많은 주장들에 대하여 아직도 속 시원하게 밝혀줄만한 역사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 자손들이 거의 전멸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만약 안칸이나 센카 천황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면 게이타이 천황은 후사 없이 서거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개로왕 - 곤지왕(유라쿠 천황)의 직계 혈손들은 무령왕 - 성왕 계열 밖에는 없는 것이죠. 당시 생존하고 있는 부여계의 가장 큰 어른은 바로 성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체 부여계의 운명을 결정할 사람은 성왕이었고 성왕이 양국의 제왕이었을 가능성도 크다는 점입니다. 설령 킨메이 천황이 성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왕과 깊은 관계를 가진 친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째는 성왕 당시 일본출신 관료들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왕 때는 무려 13여 년간 백제에 있던 일본출신 관료들을 관례적으로 일본에 파견해왔는데 성왕의 서거 시점을 기점으로 중단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본에 일본 출신의 관료들을 보내는 것이 관례라면 성왕의 서거 후에도 이 일은 지속될 터인데, 그것이 성왕 서거의 기점에서 즉각 중단 되는 것도 이상합니다.

카사이 와진(笠井倭人)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성왕 때에는 일본계 백제관료들이 대거 일본으로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는 킨메이 2년 7월(성왕 19년)에 시작하여 킨메이 15년 554년에 끝이 납니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모두 20여 건의 외교단을 파견하는데 그 가운데 11건은 일계 백제관료 또는 일본 출신 사람들이 포함된 것으로 전체의 60%에 가깝습니다.8) 이 부분도 의심스럽죠? 즉 아무리 성왕이 서거했다고 해도 13여년 간 지속되어온 일이 갑자기 중단될까요? 만약 관례적으로 많은 일본계 백제관료들이 일본으로 갔다고 하면 성왕의 서거로 인하여 중단될 사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 해봅시다. 고바야시야스코(小林惠子) 교수의 지적과 같이 성왕이 서거하지 않고 일본으로 갔다면 더 이상 일본계 백제관료가 올 이유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바야시야스코 교수의 견해가 옳다면, 성왕은 일본의 안정을 위해 심복(성왕 직속 친위세력)들을 지속적으로 파견했을 것이고 본인이 직접 일본을 가게 되었을 경우 더 이상 일본계 백제관료를 파견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째, 야마토와 고구려의 대외 교섭 상황입니다. 고구려와 부여계는 오랜 숙적 관계였는데 라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고 한강유역을 다시 신라에게 상실함으로써 야마토 정부는 고구려와의 교습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고구려와 왜왕권의 공적인 교섭이 시작된 것은 570년경입니다. 『일본서기』에는 킨메이천황 31년(欽明紀 31년 : 570), 비다츠 천황 2년(敏達紀 2년 : 573), 동 3년(574)에는 3차에 걸친 고구려사신의 왜국파견 기록들이 나타납니다.9) 이전 시기에도 일부 고구려인들의 열도 방문 기록이 없지는 않지만 570년 경의 일본 열도에는 왜 - 고구려의 공적 교류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국내외적인 큰 정치 불안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고구려 안강왕(安原王 : 531~545)의 사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대란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왕의 작은 왕후 측에서 무려 2천명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이어 즉위한 양원왕(陽原王) 13년(557)에는 모반 사건이 일어납니다.10)

그런데 문제는 일본 열도와 고구려가 공식적인 교섭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킨메이 천황의 서거를 전후로 한 때라는 것이죠. 만약 야마토 왕조가 성왕과 무관하다면 고구려와의 교섭은 훨씬 이전에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을 기다려서 고구려와 교섭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해가 안되지요. 그러나 만약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동일인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즉 성왕은 부여세력의 중흥을 위해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이 당시 성왕은 고구려에 대해 매우 큰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가 위기에 처한 일도 많았습니다. 만약 성왕이 신라병에 의해 554년 서거했다고 하면, 야마토 왕조가 고구려와의 교섭을 미룰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70년경에 고구려와 대외적인 협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한 것은 성왕이 가진 특별한 이유 때문일 것으로 보면 이해가 쉽게 됩니다. 즉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으로 신라와 연합하여 원래의 부여지역을 회복했으나 신라의 공격으로 또 한 번 큰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신라와의 교류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와의 협력도 불가능한 상태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심리적 공황상태라고 해야겠죠?

이제는 역으로 일본 측에서 킨메이 천황으로부여 성왕과의 연관성을 추적해봅시다.

첫째, 킨메이 천황이 부여계(백제계)라는 분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즉 킨메이 천황의 아드님인 비다츠 천황이 부여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 아버지도 부여계가 되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보면, 비다츠 천황에 대해서 『신찬성씨록』은 분명히 백제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킨메이 천황은 반도부여계(백제계)인 것이죠. 이 점은 홍윤기 교수도 충분히 지적한 부분입니다.

둘째, 킨메이 천황이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이 고구려를 정벌합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의 대장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많은 전리품을 킨메이 천황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엇 때문에 일본이 고구려를 공격합니까?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23년 8월 초에 천황이 대장군을 보내 고구려를 칩니다. 이 때 고구려왕은 담장을 넘어 도망가고 야마토의 대장군은 고구려 궁중을 점령해 왕의 침실 장막 7개, 철옥(鐵屋·지붕 위에 얹는 철제 장식물) 1개, 미녀 원(媛)과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빼앗아 와서 킨메이 천황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열도의 군대가 고구려의 왕도를 점령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죠?

열도의 야마토 정부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대병력을 바다 건너 이동 시키고 가야와 신라를 지나고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야 하는 등 열도가 고구려를 침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고구려의 국력을 감안해본다면, 일본이 국력을 총동원해야할 정도의 병력과 장비를 운송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고구려 정벌이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거나 그 만큼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징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공격 주체가 사실상 백제(반도부여 : 남부여)의 왕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하는 야마토의 대장군도 백제장군이 아니면 납득하기 어렵죠. 그러나 킨메이 천황이 반도부여왕을 겸임하거나 성왕과 동일인이면 아무런 논리적 모순은 없어집니다.

문제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킨메이 23년 즉 562년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에는 어떠한 왜군의 공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백제의 공격도 없었습니다. 이 시기의 『삼국사기』를 그대로 인용해 봅시다.

① 「고구려 본기」의 경우 "평원왕 2년(560)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하였다. 3년(561) 4월 이상하게 생긴 새가 궁정에 날아들었고 6월에는 큰물이 있었다. 4년(562) 2월 진(陳) 나라의 문제가 왕에게 영동장군의 벼슬을 주었다."(『삼국사기』「고구려 본기」양원왕)

②「신라 본기」의 경우 진흥왕 19년(558)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부호들을 국원에 이주하게 하였다. 23년(562) 백제가 신라 국경의 민호를 침략하므로 왕이 이를 막아 1천여명을 잡아죽였다."(『삼국사기』「신라 본기」진흥왕)

③「백제 본기」의 경우 "위덕왕 6년(559) 일식이 있었다. 8년(561)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는데 신라병이 출격하여 패하니 죽은 자가 1천여명을 헤아렸다."(『삼국사기』「백제 본기」위덕왕)

어느 경우를 보더라도 왜병이 고구려를 침공한 사실이 없군요, 더구나 백제군이 신라나 고구려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킨메이 23년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죠? 만약 사실이라면 562년의 사건이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의 사건이었겠죠.

만약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위의 사건과 비교적 비슷한 사건을 꼽으라면 성왕 28년의 기록입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백제가 고구려를 압박하는 기간은 성왕 26년(548)에서 성왕 28년(550) 동안의 기간입니다. 따라서 킨메이 천황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유사한 상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의 기록을 이 시기로 소급해 보면 이 비밀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쉽게 해소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당시 고구려 공격의 주체는 반도부여(남부여 : 백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성왕 26년~28년)는 고구려의 양원왕(545~559)에 해당하는데 양원왕 대에서는 고구려가 백제에 상당히 밀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죠. 즉 『삼국사기』에는 양원왕 4년(548) 봄 정월, 예의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6년(550)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을 함락시켰으며, 10년(554) 겨울,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킨메이 23년조의 기록은 아마도 550년 백제의 성왕이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한 것을 과장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표 ①] 킨메이 천황 시기 일본 천황들의 시호

여기서 사족(蛇足)을 하나 달면서 『일본서기』의 편집과정을 짐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하게도 만약 우리가 『고사기』의 기록에 따라 킨메이 천황이 528년(또는 527년) 즉위했다고 가정하면, 킨메이 23년이 바로 양원왕 6년경에 해당하므로 『일본서기』의 기록과 『삼국사기』가 일치하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킨메이 천황의 재위 기간은 32년인데 성왕의 재위 기간도 정확히 32년입니다. 마치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정치적 압력 속에서도' 무엇인가 흔적을 남기려고 한 듯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사건들을 일관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짜집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서기』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적당하게 편집한 것인데 그런 편집의 과정에서도 그 흔적들은 남기고 있다는 것이죠(하지만 이렇게 정치적 의도로 역사를 자의적으로 편집·변조하는 것은 열도쥬신[日本]이 매우 위험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할 행태입니다).

따라서 킨메이 천황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사실이 아니지만 만약 이 사건이 분명히 실재했던 사건이라면 그 주체는 백제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사건은 양원왕 6년 사건(551)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지요. 결국 이 사건은 성왕이 킨메이 천황과 동일인이라면 상당한 일관성을 가지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 여러분들은 성왕이 킨메이 천황과 동일인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킨메이 천황과 백제의 성왕이 동일인물인가 하는 점을 여러 가지 자료를 동원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견해는 고바야시 교수에 의해 제기된 것이지만, 홍윤기 교수의 견해뿐만 아니라 제가 분석한 견해만으로도 아직은 증거가 많이 부족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좀 더 다른 각도에서 킨메이 천황과 백제 성왕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필자 주



(7) "取百濟本記爲文。其文云。大歲辛亥三月。師進至于安羅營乞。是月。高麗弑其王安。又聞。日本天皇及太子皇子俱崩薨。由此而。辛亥之歲當廿五年矣。後勘校者知之也。(『日本書紀』繼體天皇 25年)"
(8) 笠井倭人「欽明朝百濟の對倭外交 日系百濟官僚をとして」『古代の日本と朝鮮』(上田正昭·井上秀雄 編, 學生社 : 1974)
(9) 李弘稙,「日本書紀所載 高句麗關係 記事考」(『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1971), 山尾幸久,「大化前代の東アジアの情勢と日本の政局」(『日本歷史』229, 1967), 栗原朋信,「上代の對外關係」(『對外關係史』, 山川出版社, 1978), 李成市,「高句麗と日隋外交」(『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歷史』, 岩波書店, 1998)
(10) 『日本書紀』欽明紀6年, 7年條와 그 分註의 「百濟本記」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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