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성왕, 두 얼굴의 대왕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성왕, 두 얼굴의 대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52>백제 성왕이 킨메이 천황? <상>

제 18 장. 백제 성왕이 킨메이 천황?

들어가는 글

1985년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당시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사실은 우리 조상도 백제인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일본의 간다히테카즈(神田秀一) 교수라고 합니다.1)

▲ [그림 ①] 쇼와 천황(히로히토 천황)

2001년 한일 공동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천황은 "나 자신으로 말하면 칸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으로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씌어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2)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발언은 일본의 천황이 한국과의 관계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발언이 상당한 파문을 낳아서 한국에서는 여러 공중파에서 이것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부산을 떨었습니다.

▲ [그림 ②] 칸무 천황상(桓武天皇像 : 延暦寺蔵)

그런데 희한하게도 일본에서는 이 내용이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서만 언급을 했을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특성과 한국의 특성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도 볼 수 있었던 대목입니다. 일본 천황의 발언은 무언가 의도성이 있는 듯한 반면, 한국은 "백제가 일본을 만들었어"라는 식으로 떠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일본은 한족(漢族)처럼 냉정한 반면, 한국은 흉노계 유목민의 특성이 많은 듯합니다. 이른 바 '냄비근성'입니다.

일본 천황이 한국과 일본과의 황실에 있어서 혈연적 고리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후 2004년 여름, 아키히토 천황의 당숙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 당시 62세) 왕자가 충남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을 참배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가져온 술과 과자, 향 등을 놓고 참배하였는데, 당시 오영희 공주시장에게 향로와 향을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기증한 향은 1300여년 묵은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최고급품이었습니다. 이 일은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것이지만 아사카노 왕자가 아키히토 천황의 윤허를 받고 온 것이며 그는 천황에게 상세히 보고하겠다고 밝혔습니다.3)

(1) 성왕, 두 얼굴의 대왕

반도부여 즉 백제의 대표적인 성군으로 성왕(聖王 : ?~554)이 있습니다. 백제의 제26대 왕(재위 523∼554)으로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쳐서 백제가 부여의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만주를 주름잡던 부여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려고 온힘을 기울인 임금입니다.

성왕은 무령왕의 둘째 부인의 소생으로 그 어머님은 황족이 아니라 호족의 따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왕의 모후는 '황후(또는 왕후)'로 불린 것이 아니라 '대부인'으로 불리었기 때문입니다. 부인의 죽음을 '수종(壽終)'이라하여 기록상으로는 황제나 황후의 죽음을 의미하는 붕(崩), 왕과 왕비의 죽음을 의미하는 훙(薨), 대신이나 고위 관직자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졸(卒), 일반인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사(死)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고 있습니다. 제 22대 세이네이(淸寧) 천황의 경우 그 어머니도 황태부인으로 불렸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 드린대로 곤지왕 즉 유라쿠 천황에게는 왕이 된 세 분의 아드님들이 있는데 동성왕, 무령왕, 게이타이 천황 등입니다. 그런데 성왕이 무령왕의 아드님이고 킨메이 천황은 게이타이 천황의 아드님이므로 이 두 분은 서로 사촌지간이 됩니다.

성왕은 지방통치조직 및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양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들입니다.

그런데 성왕은 『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명왕이라는 말은 마치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본 딴 묘호(廟號)로도 들립니다. 묘호에도 개국시조에게서나 사용될만한 성스러울 '성(聖)'을 쓰고 있습니다. 열도(일본)에서는 성명왕을 천지의 이치에 통달한 영명한 군주로 보고 있습니다. 성왕의 휘(諱)는 명농(明襛)이며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입니다. 성왕은 아버지인 무령왕과 함께 부여의 대표적인 성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반도에서는 성왕을 그리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왕은 523년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고, 그 다음해에 양(梁)나라 고조(高祖)로 부터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529년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후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공동대처를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고 538년 협소한 웅진(熊津 : 현재 충남 공주)으로부터 넓은 사비성(泗沘城 : 현재 충남 부여)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쳤습니다. 아마 이때 지방통치조직들을 정비한 듯합니다. 그리고 성왕은 일본에 불경을 전하여 일본이 세계적인 불교의 나라가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것은 성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551년 신라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漢江)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합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죠. 한강 유역은 76년간이나 고구려에 빼앗겼던 군(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553년 한강 유역을 신라가 차지하자 이에 왕자 여창(餘昌 : 제27대 위덕왕)과 함께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지만 대패하고 관산성(管山城)에서 신라의 복병(伏兵)에 의하여 전사하고 맙니다(554).

▲ [그림 ③] 옥천(관산성)의 전경과 지도(옥천군청 자료 및 대동여지도)

이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왕에 대한 행적입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성왕의 행적에 대해서 별 다른 의심이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교수는 자신의 저서『두 얼굴의 대왕(二つの顔の大王)』에서 킨메이 천황이 바로 백제의 성왕이라고 주장합니다. 고바야시 교수는 황실의 자료 등을 열람할 기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제국에 전해지는 자료들을 두루두루 검토해 본 결과, 『일본 서기』나 『고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일본 열도의 역사가 실은 동아시아 역사의 일환이며, 정권 담당자 즉 천황이 한반도 제국의 왕을 겸임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경우, 백제 성왕은 540년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다가 패한 후 곧장 왜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그때부터 가나사시노미야궁(金刺宮)에다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왜국왕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센카 천황(宣化天皇)이 사망한 연대는 공교롭게도 540년으로 백제의 성왕의 우산성 공격시기와 일치합니다.4) 그러니까 성왕은 553년 관산성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일본으로 가서 킨메이천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미 왜 5왕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왜국왕 = 백제왕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울 일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에서는 펄쩍 뛸 일들입니다. 물론 일본왕이 백제왕을 겸하여 지배했다고 하면 일본 학자들은 환영할 일이고, 반대로 백제왕이 일본왕을 겸했다고 하면 한국에서 반길 일일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반도부여와 열도부여는 그저 범부여 연합국가입니다.

다만 고바야시야스코 교수의 견해에 대하여 일본의 사학계는 매우 냉담합니다. 고바야시 교수의 다른 저서에 대해서도 일본의 사학계는 주목하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고바야시 교수의 견해는 대체로 작위적이고 비약적이며 지나친 경우가 많습니다. 일부 비판자들은 그녀의 견해를 '말장난'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야스코 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한일고대사에서 비켜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성왕 - 킨메이 천황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들을 분석해봅시다.

먼저 『일본서기』를 봅시다. 『일본서기』에는 킨메이 천황 15년 12월조에 백제의 성명왕(성왕)이 하부한솔(下部扞率) 문사간로(汶斯干奴 : Munsa Ganno)를 일본에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킨메이 천황의 재위연도는 대체로 539년~571년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킨메이 15년이라면 이 해는 기록상으로 성왕이 전사한 해입니다.5)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이 554년 7월에 전사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같은 해 12월에 사신을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상한 것은 백제가 표를 올렸다고 하는데 그 내용에는 긴급히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성왕의 서거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왕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없을 터인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 동안 일본 천황가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홍윤기 교수는 킨메이 천황이 바로 성왕이라는 점을 누누이 지적해왔습니다. 홍윤기 교수는 『대초자(袋草子 : 1158)』의 기록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일본역사학연구회(日本歷史學硏究會)가 편찬한 『일본사연표(日本史年表 : 1968)』에 의거하여 이 같은 논의를 전개합니다. 구체적으로 홍윤기 교수의 견해를 한번 봅시다.

첫째 킨메이천황의 즉위년이 532년이고 불교가 일본에 전해진 538년인데 이 때가 반도에서는 성왕의 치세라는 점, 둘째 『신찬성씨록』에 킨메이 천황의 아들인 비다츠 천황이 백제왕족이라는 근거를 들어 그의 아버지인 킨메이 천황 역시 백제왕족이라는 점, 셋째 『신찬성씨록』에 비다츠 천황의 성(姓)이 '진인(眞人)'인데, 이 성은 텐무 천황 13년(686)에 제정된 팔색(八色)의 성 가운데 제1위의 성씨로 황족에게만 주어진 성(姓)라는 점(결국 백제왕족=일본황족), 넷째 야마토 시대 당시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인 동북의 아이누(에조 또는 에미시)의 저항을 진압한 명장들이 대부분 백제왕족이었다는 점, 다섯째 비다츠 천황의 손자인 조메이(舒明) 천황이 백제 대정궁(大井宮) 백제 대사(大寺)를 건립하는 등 유난히 백제관련 토목사업을 많이 했고 백제궁에서 서거한 후 백제대빈(百濟大殯 : 백제의 3년상 장례의식)으로 안장했다는 점, 여섯째 성왕의 존칭인 성명왕(聖明王)과 킨메이(欽明) 천황의 호칭에서 '明'자를 공유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서 홍윤기 교수는 킨메이 천황 = 성명왕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나아가 홍윤기 교수는 『일본서기』에 "비다츠 천황(敏達 天皇)은 킨메이 천황의 둘째 아들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그 첫째 아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일체의 기사가 없는 점에 주목하여, 바로 이 점이 킨메이 천황 = 성왕이라는 하나의 증거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즉 킨메이 천황의 첫째 아들이 역사의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왕의 첫째 아들인 여창(餘昌)이 백제의 위덕왕으로 등극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의 문헌에서는 킨메이 천황의 첫째 아들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6)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이상한 기록도 있습니다. 킨메이 15년(554) 성왕이 서거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백제왕 여창(후일 위덕왕)은 556년 왜국으로 동생인 혜왕자(惠王子)를 파견하고 성왕 서거 후 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왕위에 등극합니다(557). 위덕왕은 4년간 등극을 미루어 놓았고 그 동안 남부여(백제 : 반도부여)에는 왕이 없었던 것이죠.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홍윤기 교수는 "556년 1월 혜왕자가 백제로 귀국을 하는데 아매신(阿倍臣) 등 조신(朝臣)들이 거느리는 1천여명의 군사가 호위하여 백제로 돌아가게 했다."는 『일본서기』의 대목도 성왕이 킨메이 천황인 증거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실제로 고대의 역사에서 호위병 1천여 명은 예사로운 규모가 아닙니다. 단순히 동맹국이라도 이런 예우는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보세요. 해외에 군대를 파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사람이 여행하듯이 가면 될 일이 아니지요. 엄청나게 긴 보급로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에도 수백 명을 외국에 파견하는 것도 힘든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버지 성왕이 아들을 보내면서 많은 군대를 보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말입니다. 이 혜왕자는 후일 혜왕(惠王 : 598~599)으로 등극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하는 내용들로 성왕과 킨메이 천황을 같은 인물로 보기에는 증거들이 아직도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의문스러운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이제부터는 좀 더 다른 증거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필자 주

(1) 홍윤기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한누리미디어 : 2008) 446쪽.
(2) 『朝日新聞』(2001.12.23)
(3) 『中央日報』(2004.8.5)
(4) 小林惠子『二つの顔の大王』(文藝春秋 : 1991)
(5) 『日本書紀』에는 킨메이 천황 15년에 백제 성왕이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왕의 전사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554년이므로 킨메이 천황은 사실상 539년에 즉위한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6) 홍윤기 「日本古代史 問題點의 새로운 규명 - 平野神의 文獻的 考察을 중심으로 -」『日本學』第24輯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