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체인점을 가진 "반즈앤노블(Barns & Noble)" 못지않게 대형서점인 "스트랜드(Strand)"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북적거리고 있었다. 본래 고서점으로 인기를 모았던 이곳은 이제 신간서적도 취급하고 있다. 근처에는 스텀프나 불루맨 그룹갈은 오프 브로드웨이 쇼가 벌어지는 극장들이 있는 12가와 브로드웨이 사이의 이 책방은 "스트랜드 할인가격" 정책으로 싼 값에 책을 팔아 그 또한 인기였다.
오바마, 링컨, 루즈벨트
"반즈앤노블"이나 또 다른 대형서점 체인인 "보더즈(Borders)"나 "스트랜드" 그 어디를 둘러봐도 역시 오바마 책은 인기 순위 1위였고, 그와 함께 루즈벨트와 링컨 책도 아울러 대중들의 주목거리였다. 평균 400 페이지에서 700여 페이지를 넘나드는 책들이 일반대중들에게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현실은 부럽다. 그건 활발한 출판지성의 문제를 넘어서서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지 않게 만드는 힘이다.
링컨행정부를 분석한 도리스 컨스 고드윈의 <정치적 경쟁자로 구성한 정부(Team of the Rivals)>는 아직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오바마 정부의 지침서로 통하는 분위기다. 진보적 언론인 로버트 커트너가 쓴 <오바마가 직면한 도전(Obama's Challenge)>은 선거가 끝나기도 전에 오바마를 차기 대통령으로 설정하고 그가 감당해야 할 과제들을 치밀하게 분석해서 주목을 끌고 있었다.
책방 점원의 정치의식
도리스 컨스 고드윈의 책을 집어 들자 "보더스"의 점원 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오바마가 이렇게 정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내가 대답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바마 정부에서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쇄도한다면서요?" 이 말에 점원이 반색한다. "저도 신청했습니다. 오바마 정부에서 무언가 미국의 미래를 위해 기여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나는 그의 눈이 진지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거 정말 좋은(good) 징조에요." 그러자 이 점원이 얼른 나의 말을 수정한다. "좋은 징조 정도가 아니라 대단한(great) 변화입니다."
▲ ⓒ로이터=뉴시스 |
자신의 계급에 반역하다
텍사스 대학 역사교수 브랜즈가 쓴 <자신의 계급에 반역한 대통령, 루즈벨트(Traitor to His Class: the Privileged Life and Radical Presidency of Franklin Delano Roosevelt)>도 흥미로웠다. 브랜즈는 루즈벨트가 대공황으로 붕괴되어가던 미국인들의 영혼을 변모시켰다고 강조한다. 여러 가지 비판이 있지만, 루즈벨트가 자신의 출신배경에도 모순되고 당시의 현실에서 대통령으로서는 쉽지 않은 대단히 급진적인 선택을 했을 때 미국은 희망과 변화의 의지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퀸즈 칼리지의 영어학 명예교수 프레드 카플란이 쓴 <링컨 전기(Lincoln: The Biography of a Writer)>는 언어의 달인 링컨을 다루고 있다. 오바마가 뛰어난 연설솜씨와 작가적 자질을 내보이고 있는 것과 비견되면서 대통령의 말, 그 언술의 힘에 대한 새로운 주목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자기 생각, 자기철학을 자기의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이 미국 전체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일에 지침이 되는 수준을 갖춘 지적 능력이 탁월한 대통령이 있는 나라는 그만큼 행복하다.
링컨에게서는 통합적 지도력을, 루즈벨트에게서는 위기의 시대에 진보적 선택을 취하는 오바마는 진보의 꿈으로 하나 되는 미국을 이끌고자 한다. 그가 진정 성공하기를 빈다.
오바마, 미국의 새로운 자화상 그려가고 있어
임기 말년을 맞이하는 부시는 이라크의 한 기자가 던진 신발을 피하느라고 허리를 굽히는 수모를 겪었지만, 오바마는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딱 벌어진 체격을 과시하는 모습이 언론에 실리는 인기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다만 그런 대중적 호기심에서 그의 인기는 그치지 않는다. 그가 보이는 품격, 언어의 진지함, 정책의 진보적 내용, 이런 것들이 모두 합쳐서 오바마 시대의 미국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는 중이다.
오바마가 과연 성공하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이미 그가 보인 것만으로도 미국은 탁월한 지도력의 가능성을 가진 인물을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자신감을 회복한 상태다. 패권이 아니라 지도력으로 존경받는 미국을 꿈꾸는 그는 그 자신이 이미 품격, 격조, 진지함으로 꽉 찬 인물이다.
맨해튼의 리버사이드 처치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를 본 후 우연히 슈라이버 박사 부부와 만났다. 슈라이버 박사는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대학 유니온 신학대 전 총장으로, 70-80년대 한국 민주주의 투쟁사와 깊은 인연을 가진 인물이다.
"우린 결국 해냈어. 오바마를 얻었잖소." 슈라이버 박사가 자랑스러움에 차서 말한다. "미국은 이로써 전환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슈라이버 박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한다. "그런데 한국은 새로 대통령이 된 인물이 좀........" 그러다가 이내 말을 잇는다. "우리도 지난 8년 꽤나 애먹었지." 미국의 현실에 대한 지독하리만치 비판해왔던 나로서는, 이제 미국의 미래를 부러워할 처지가 되었다.
우린 지금 엄청나게 애먹고 있지
그래, 그렇게 우리는 지금 애를 먹고 있다. 보통 애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니다. 8년간 세상을 암울하게 휘저어 놓은 미국에서는 이제 새로운 희망이 태어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지금 대단히 포악한 권력의 난도질로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희망이 으스러지고 있다. 열흘 전 잠시 떠나온 서울의 거리가 지금 어떤 기운에 지배받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경제는 부자들에게 몰아주고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하게 만들 작심을 하고 있다. 14조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4대강 정비 사업으로 위장한 대운하 전초사업에 투입되어 토건주의자들의 배를 불리고 자연생태계는 복구 불가능한 지점으로 갈 상황이다. 교육은 권력과 자본의 독선과 지배를 옹호하는 선전장으로 바뀌어갈 판이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프로파간다 세뇌다. 자신들에게 영원히 충성할 신민들을 길러내겠다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
언론과 방송은 민주주의 해체의 첨병으로 길러볼 작정인가 보다. 방송은 권력과 대자본의 사유물로 강탈해가겠다고 한다. 너희는 입 다물라, 우리만 말 한다. 너희는 생각하지 마라, 우리가 생각한다. 너희는 꼭두각시다, 우리가 조정하는 대로 말하고 움직여라. 이게 이명박 정권의 언론방송 정책이다.
난폭한 자들의 얼굴
이명박 정권에게는 품격, 지성, 격조, 희망, 역사의 진보, 그런 것 없다. 촛불정국에서 겪은 교훈은 "틈 주지 말고 밀어 붙여라, 지들이 덤벼봐야 결국 밀린다. 문제는 힘이다. 힘은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이 정권의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자들의 얼굴은 한 결 같이 난폭하다. 고르고 골라서 모두 그런 자들로 채운다.
누군가 그랬다. 얼굴이 메시지라고. 링컨의 얼굴, 오바마의 얼굴 그건 이미 그 자체로 메시지다. 격조와 품위와 지도력이다. 이명박의 얼굴, 이상득의 얼굴, 최시중의 얼굴, 어청수의 얼굴, 홍준표의 얼굴, 박희태의 얼굴, 강만수의 얼굴, 유인촌의 얼굴, 신재민의 얼굴, 등등의 얼굴은 모두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 반대편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실직하는 비정규직, 해직된 교사들, 분노하는 언론방송인들, 촛불을 다시 든 시민들, 그리고 양심적인 정치 지도자들과 시민운동가들.
2008년의 교훈은 분명하다. 함께 손을 굳게 잡고, 희망의 역사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흩어지면 공멸이다. 작은 차이를 내세워 큰 목표를 무산시키는 어리석음과 결별해야 한다. 오바마는 통합의 지도력과 진보적 가치를 하나로 묶어냈다. 그건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데 기본이다.
"통합의 지도력과 진보적 가치를 하나로" 묶어내야
우리도 다르지 않다. <통합의 지도력과 진보적 가치가 하나가 되는 길>을 이루어낼 때 이 난국을 돌파하는 희망의 능력이 태어난다. 오바마를 부러워하고 있기만 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전망(vision)과 힘"이다. 다시 모여, 희망을 나누어야 한다. 다시 모여 힘을 내야 한다. 모이는 것부터 변화다. 모인 사람들은 누구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 그로써 변화의 힘은 진화한다.
권력과 자본의 동맹 파시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우리 안의 분열을 신속하게 극복하고 진보적 목표를 공유한 하나가 되는 길 뿐이다. <통합과 진보>, 이 두 과제를 하나로 엮는 일, 그것이 이 시대 우리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기쁜 일은, 우리가 지금 다름 아닌 바로 그 방향으로 하루하루 행군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승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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