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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은 무엇인가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66>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④

근대주의적 해석의 등장

근대주의적 해석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기본적 원리들을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였던 기존 해석에 대한 불만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또한 2차대전 이후 많은 식민지들이 해방되며 '민족 내지 국가형성'이 사회과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여 싹텄다. 이 과정에서 민족을 인위적 구성체로 보는 생각이 자라난 것이다. 새로운 민족주의 이론이 사회과학자들, 특히 사회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이유이다.

이들은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즉 최근 2세기의 산물로 보며 그 원인으로는 산업화, 자본주의, 근대국가, 도시화, 세속화와 같은 여러 근대적인 현상들을 든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요인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같은 요인을 받아들여도 사람에 따라 그 비중은 각각 다르다.

그래서 이들을 뭉뚱그려 근대주의자로 부르기는 하나 견해 차이가 크므로 일반적인 규정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근대주의적 해석의 내용을 가장 널리 알려진 세 사람의 주장을 통해 간략히 살펴보자.

어네스트 겔너와 산업화

겔너(Ernest Gellner)는 다른 학자들이 민족주의 이론에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60년대부터 민족주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가 체코 프라하의 유대인 가계 출신으로 나치 독일의 박해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사가 그의 학문적 관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 그림 1. 겔너(1925-1995): 그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영국 런던경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지냈다. 말년에는 프라하에 민족주의연구센터를 만들고 그 소장직을 맡았다. 그는 우파적인 성향이 강하고 강한 유럽중심주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 전의 민족주의 연구자들은 대체로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로 보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스 콘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에 대해 사회학적, 구조적 접근을 처음 시도했다. 그가 민족주의 연구의 새로운 길을 연 개척자로서 많은 찬사를 받고 있는 이유이다.

그는 민족주의를, 전통사회와 근대사회를 명확히 구분하는, 에밀 뒤르껭이나 막스 베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 사회학의 전통 속에서 보았다. 그래서 농업사회와 산업사회를 엄격히 구분하고 민족주의는 산업화의 결과로서 농업사회에서는 불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농업사회는 신분으로 나눠진 수직적 사회이므로 동질적인 문화가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산업사회는 산업화에 의해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갖는 수평적인 사회이므로 동질적인 문화의 형성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 위에서 민족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고도의 분업이 이루어지는 산업사회의 요구 때문이다. 고도로 분화된 산업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전문화된 노동이 필요하고 그 전제는 숫자계산이나 문자의 해득이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다루기 위해 최소한의 지침을 읽을 수준은 되어야 하고 같이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업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런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통의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그 대규모성 때문에 국가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국가가 주도하는 대중화된 공공교육을 통해 신분이나 지역을 넘어선 동질적인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고도(高度)문화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민족주의의 기반이 된다.

민족주의란 이 고도문화에 정치적 보호막을 만들려는 노력이다. 산업화와 함께 이미 낡아 버린 왕조국가 대신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만들려고 할 때 이렇게 고도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적 이념이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부구조를 구성하는 것이 민족주의적 교육과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체계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보호하는 유일한 기관인 국가이다.

이렇게 보편적인 문자해득이나 중앙집권적 국가, 대중교육 등 산업사회의 여러 요소들에 의해 민족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민족이 민족주의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기존의 상식을 넘어서는 매우 도발적인 것으로 그 후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

베니딕트 앤더슨과 상상의 공동체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인류학자이나 1983년에 <상상된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고찰>이라는 책을 통해 민족주의 논의에 뛰어 들었다. 그는 시간이나 죽음, 영속성 같은 인류학에서 많이 다루는 개념들을 민족주의 연구에 도입하여 그 나름으로는 민족주의 연구를 풍부하게 했다.

▲ 그림2. 앤더슨(1936-)의 <상상의 공동체> 표지: 영국계로 중국 곤명시 출생인 맑시스트 인류학자 앤더슨은 미국 코넬 대학 교수이다. 유명한 맑시스트 역사학자인 페리 앤더슨의 형이다.

그는 근대에 들어와 전통적인 종교공동체나 왕조적 질서가 사라진 빈 공간을 메운 것이 민족이라는 대체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이건 공동체적 결속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족의 등장에는 시간관의 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초월적인 시간관 대신, 근대에 들어와서는 사람들이 현세적인 시간관을 갖게 됨으로써 같은 시간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시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16세기 이래 발전한 인쇄자본주의이다. 인쇄자본주의가 만든 문화적 동질성이 소설이나 신문 같은 인쇄 매체들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어 한번도 본 일도 없고 또 평생 만날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의 공동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생기며, 본국인들로부터 차별을 받던 식민지 태생의 백인들에 의해 18세기 후반에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족주의가 처음 생겨났다. 민족 형성은 그 결과물이다.

유럽에서는 1820년경부터 민족주의가 나타나는데 그것도 각 나라의 개별 문어(文語)와 그 확산을 뒷받침하는 인쇄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한 것이 문자해득의 증가, 상공업의 발전, 통신이나 국가기구의 성장 등 다른 요인과 함께 각 왕조의 영토 내에서 언어적 통일을 가져오도록 하는 강력한 자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세력은 부르주아 계급이다. 그러나 민족의 형성은 대중과의 연관 하에서 이루어졌다. 초기의 민족주의가 인민주권, 농노제의 폐지, 대중교육, 선거권의 확대를 요구함으로써 대중을 끌어 들일 수 있었고 그리하여 대중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의 대중적 민족주의는 곧 지배 엘리트나 정부에 의한 관제 민족주의에 의해 대치되었다. 그것은 유럽국가들이 다종족국가들로서 왕조들의 정통성이 민족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 후반에 많은 왕조들은 지배종족의 언어를 국어로 정착시키고 다른 종족들을 동화시킴으로써 왕조의 정통성을 민족과 결합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관제 민족주의이다. 러시아의 로마노프왕가가 벌인 러시아화정책이 대표적이다.

관제 민족주의는 유럽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의 광범한 식민지역에서도 행해졌고 식민화를 면한 일본이나 태국 같은 나라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모방되었다. 또 2차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많은 신생국가에서도 받아 들여졌는데 이것은 유럽 제국주의의 의해 창조된 비정상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역시 언어는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고 특정한 민족적 결속체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앤더슨은 민족을 형성하는 데 있어 언어와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19세기 후반 이후의 민족주의를 관제 민족주의라는 틀로 설명한다. 그러니 민족주의를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다.

에릭 홉스봄과 발명된 전통

홉스봄(Eric Hobsbawm)은 저명한 맑스주의 역사학자로 그 전에도 민족주의에 대한 여러 글들을 썼으나 자신의 민족주의 이론을 체계화 한 것이 1990년에 낸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이다. 이 책은 서양에서도 민족주의 이론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읽히는데 그것은 그가 역사학자로서 이론을 구체적인 역사현실과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자들보다는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이론에 크게 독창적인 점은 없다. 대체로 겔너의 주장을 뼈대로 하고 여기에 동유럽 민족주의의 발전과 관련한 미로슬라브 그로흐의 이론을 결합하고 있다. 그로흐의 이론은 관제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는 민족주의를 기본적으로 봉건적인 지방분권을 벗어난 근대적인 영토국가와 관련해서 설명한다. 또 근대적인 특정단계의 기술이나 경제발전과 관련해서 본다. 이렇게 산업화, 자본주의와 관련해서 보면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또 위의 사람들과 비슷하게 민족은 민족주의에 의해 형성되며 그 과정에서 가공이나 발명, 사회공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발명된 전통'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이유이다. 스코틀랜드인의 체크무늬 치마 같이 많은 민족적 전통들이 실제로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인위적으로 발명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민족의식은 대중이 민족적 관념의 주창자들에게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형태를 취한다고 본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공식이념만을 통해서는 알 수 없고 하층계급이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족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1830-70년 시기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대체로 프랑스혁명기의 혁명가들을 본뜬 것으로 대중주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기 프랑스인들을 프랑스인이 되게 한 것이 프랑스어가 아니라 자유와 법, 프랑스어를 배우려는 의지였던 것과 같이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종족, 언어, 종교, 영토, 역사적 경험 같은 것에 덜 의존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이후 1914년까지는 민족주의가 급속히 뿌리 내렸고 종족과 언어가 민족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으며 종족주의가 인종주의 때문에 강해진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 이후의 시기가 그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1950년까지의 민족주의는 통일지향적이고 해방적이며 역사변화의 중심 역할을 한 데 비해 20세기 후반의 시기는 분열적이고 부정적이며 역사변화의 주된 힘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민족이라기보다 대개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종교적-문화적 동일지역의 해방을 위해 싸운 초민족주의적 운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채용했다는 점에서만 민족주의적이며 국가나 민족과는 전혀 무관한 지식인들의 건축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민족주의 원리와 운동이 아시아, 아프리카의 전 세계로 확산된 20세기 후반의 민족주의 운동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또 1990년 이후 사회주의 붕괴 후의 민족주의 재발도 1차대전 이후의 미결된 민족문제의 재정리라는 입장에서 본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20세기 말에 지구화에 직면하여 급속하게 힘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주의적 해석의 문제점들

먼저, 겔너는 민족주의를 정치적 단위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되어야 한다고 믿는 원리라고 주장한다. 즉 국가의 영토적 경계선과 민족적 경계선을 일치시키려는 운동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홉스봄도 겔너의 정의를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들이 민족주의를 어느 국경선 내부만의 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 종족이 다른 종족들을 억압하는 관제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민족주의를 억압이데올로기라고만 생각한다.

반면 왜 많은 민족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는가 하는 동기의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다. 사실 민족주의 운동은 역사적으로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의 경쟁이나 억압에서 촉발되는 예가 많다. 이런 경쟁이나 억압은 근대에 와서 심해졌고 내부적인 갈등들도 그것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 이 점을 도외시하면 민족주의에 대해 반쪽자리 이해 밖에 할 수 없다.

둘째로, 이들은 기본적으로 비역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종족주의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 산업화나 자본주의 발전 이전에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도 홉스봄은 역사학자이므로 그 이전에 있었다고 믿는 원(原)민족에 대해 일부 언급하기는 하나 실제의 이론 구축에서는 그것도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셋째로, 이들의 주장은 많은 경우 역사적 현실과 맞지 않는다. 겔너는 산업화가 민족주의를 만들었고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의 주장은 그만두고라도 산업화가 왜 민족주의를 만드는지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다.

더 중요한 것은 산업화와 민족주의의 선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족주의는 산업화보다 먼저 나타났을 뿐 아니라 많은 지역의 민족주의는 산업화와 전혀 관계가 없다.

앤더슨도 민족주의가 18세기 말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개인적인 추리에 불과하다. 또 민족이 종교나 왕조가 쇠퇴한 빈자리를 대치했다고 하는데 이는 인류학적인 상상이다. 종교나 왕조적 전통과 결합한 민족주의 운동도 많다.

또 인쇄 자본주의가 상상된 공동체를 만든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전근대의 많은 공동체들이 갖고 있는 문화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문자가 아니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은 어디에서도 가능하다. 유럽의 발전한 지역도 19세기 말에 가서야 일반인들이 문자해득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18세기 말까지 소급하는 것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넷째로, 이들은 프랑스혁명을 본뜬 대중주의적·자발적 민족주의와, 종족이나 언어 등 객관적 요소에 의존한 종족적 민족주의 사이를 구분하고 전자를 높이,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서유럽형과 동유럽형 민족주의의 구분이다. 동유럽형에는 비유럽지역 민족주의도 포함된다.

그러나 둘 사이의 구분은 그렇게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프랑스혁명기의 프랑스 민족주의에 자발주의적 요소가 나타나기는 하나 그것은 명목일 뿐이지 그 본질을 이루는 것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족적 민족주의이다. 이것은 민족주의 이론에서 끈질기게 나타나는 서유럽중심주의로서 이런 미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민족주의에 바로 접근할 수 없다.

다섯째로, 홉스봄에게서 분명히 나타나지만 민족주의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이다. 지구화가 진전 중이므로 얼마 안가 민족주의는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순진한 생각으로 역사의 근본적인 동인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화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세계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억압성이 강화된 국제사회를 가져온다. 이것은 우리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확대를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억압이 강화될수록 반발도 커질 수밖에 없다. 선진국에 의해 강요되는 지구화는 쉽지 않다.

또 지금과 같은 국제적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나아가 온난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가시화하면 민족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훨씬 강화될 수밖에 없다. 모든 민족들이 살아남으려고 애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홉스봄도 문제의식이 있는 척하나 이런 것을 보면 영국이라는 혜택 받은 선진국의 책상에서 세계의 불평등에는 눈감고 공론이나 하는 서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민족주의 문제와 관련한 개별 논점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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