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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민족국가와 범부여연합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50>야마토 다마시 ①

제 17 장. 야마토 다마시

들어가는 말

한국과 일본 양국의 사학계는 『일본서기』진구황후 49년조의 기사문제, 임나일본부, 칠지도, 왜5왕의 군호문제,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왜 등에 대하여 각각의 입장에서 기나긴 역사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2005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구성되어서 한일의 관계사들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역시 양국 사학계의 대립은 지속되어왔습니다.1) 한국의 사학자들은 백제는 일본에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일본은 백제에 대하여 군사원조를 제공한 특수한 용병관계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한 발짝의 진전도 보지 못합니다.2)

보다 진일보한 역사인식으로 평가할만한 견해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6세기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에 관해서 "백제의 요청에 대해 일본 열도에서는 이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댓가는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선진문물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적이었고 그런 관계 속에서 양국 왕실간의 혈연적인 교류가 있었다."라고 하는 김현구 교수의 견해나 "백제, 가야제국, 왜국 이들은 지역적인 협력관계로 그 배후에는 신라 혹은 고구려와의 대립이 있었고, 그 밖에는 넓게 중국의 남북조, 5호 16국, 그런 틀 속에서 백제, 가야제국, 왜국과의 지역적인 협력관계, 그러한 것이 고대사회"라는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 교수의 발언입니다.3)

이 발언은 상당한 부분에 있어서 편협한 국수주의적인 발상에서부터 한걸음 나아간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명은 아니죠. 왜냐하면 수백년에 걸친 왜·백제와의 관계는 단순히 지역적인 협력관계로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국운을 걸고 백제를 지원하는 야마토 정부의 입장이 단순히 "지역협력"의 수준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물론 이 지역협력의 강도나 응집도에 따라 범부여(USB)의 의미와 상통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김현구 교수의 지적 또한 지나치게 막연한 표현에 불과합니다.4) 즉 백제가 요청한 것에 대해 이를 지원한 사람이 있었다는 식은 부여계의 역사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을 결여한 것이죠.

(1) 기마민족국가와 범부여연합

일본의 역사는 야마토 왕조에서부터 시작됩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은 왜라는 범쥬신을 기본 토대로 하여 역시 쥬신의 일파인 부여계의 이동에 의해 성립됩니다. 물론 열도에는 많은 선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부여계는 이들 선주민들을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한 방식으로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일본인들의 정신적 기저에는 외부 세력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내재해 있음을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하여 제기한 바 있습니다.

일본의 고대사의 비밀을 체계적으로 밝힌 대표적인 사학자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선생입니다. 에가미 나미오 선생의 견해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를 규명하는 데는 가장 적절하고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에가미 나미오 선생의 분석들은 전체 쥬신사를 총괄적으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 항목에서는 에가미 나미오 선생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면서 전체 쥬신사와의 관련성을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합니다. 에가미나미오 선생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요약해 봅시다.

▲ [그림 ①] 에가미 나미오(1906~2002)

일본 고대사는 죠몽 문화 (수렵과 채집) ― 야요이 문화(미작문화) ― 고분전기(야요이의 변형 발전) ― 고분 후기 등으로 발전해 갑니다. 죠몽문화(繩文文化)는 벼농사 생활을 기반으로 한 야요이문화(彌生文化)로 급변하는데 그것은 비한족계열(非漢族系列)의 벼농사 민족이 산동(山東)과 양쯔강 일대로부터 서일본(西日本)으로 이주하여 농경 생활을 하다가 급속히 동일본(東日本) 일대로 나아가서는 먼 동북(東北) 지방의 남부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벼농사 문화는 죠몽문화와 융합하여 야요이 문화가 성립되는데, 이 문화의 성격은 벼농사에 의존한 소박한 농민문화로서 평화적이고 비군사적(非軍事的)이며 주술적(呪術的)인 특성을 지니는 제사문화(祭祀文化)로 이 문화는 동남아시아 제민족 특히 현재 중국의 중남부 지역의 원주민의 문화와 매우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요이 시대를 이은 시대를 고분시대(古墳時代)라고 하는데 이 시대가 이전의 야요이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가미 선생에 따르면, 고분 시대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눠지는데 그 가운데 고분문화 전기를 주도한 세력은 야요이 문화와 동일 계통으로 보이고 그 문화 담당자는 대부분 야요이문화의 내적 발전의 결과로 보이고 이 전기고분 문화를 가진 이들이 바로 왜인(倭人)이라고 합니다.5) 이 부분은 상당한 문제가 있죠.

이상의 에가미 선생의 견해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왜는 중국에서 오래 전에 일본으로 밀려들어온 중국 계통의 사람이라는 말이고, 둘째 현재의 일본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마치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일본으로 향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토착화된 왜인이 다시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가야와 같은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식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임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죠). 달리 말하면 가야인 = 일본인(왜인) 이라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동화같은 이야기입니다.

먼저 왜인(倭人) 개념을 봅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왜인은 동이족의 비칭(卑稱)일 뿐만 아니라 산동, 요동, 만주지역의 연안 등에 광범위 흩어져 살고 있는 쥬신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에가미 선생은 왜인은 쥬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양쯔강 일대의 사람이 일본으로 와서 왜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본에 토착화한 한족(漢族)이라는 것이죠. 에가미 선생 역시 '새끼 중국인' 근성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무엇보다도 고대의 시기에 양쯔강 일대의 사람들을 왜인으로 부른 예는 신뢰할만한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인이라는 말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로 『한서(漢書)』이후이면서 주로 만주와 한반도 지역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다음은 항로의 문제입니다. 지도를 펴 놓고 동지나해를 살펴봅시다.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양쯔강에서 일본으로 바로 갈 수 있었을까요? 이런 믿을 수 없는 긴 항로로 대규모 인구이동을 했다고 주장은 증명할 방법도 없지요.
▲ [그림 ②] 양쯔강에서 서일본(규슈)으로(?)

설령 양쯔강에서 일본으로 직행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극히 일부이지 다수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통상적으로 일본에 전래된 벼농사는 화남 경로, 화중 경로, 화북 경로 등으로 보고 있는데 그 가운데 화중 경로나 화북경로는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요시노 마코토(吉野誠)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게 좋겠군요.

"야요이 초기의 유적에서 보이는 특징 가운데 하나로 고도로 발달된 논과 함께 고인돌을 들 수 있습니다.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널리 볼 수 있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남방식의 고인돌이 야요이 초기, 즉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기에 규슈 서북부에서 왕성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도래했던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것은 벼농사의 전파 경로가 직접 한반도를 경유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6)

여러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일본에로의 벼농사의 전래 경로는 산동반도에서 북상해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 북부로 전해져 계속 남하했다는 주장과 한반도 남부로 직접 전래되었다는 주장 등 두가지 견해로 나뉩니다.7) 어느 경우라도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일본으로 전래된 경우는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요시노마코토 교수는 "일본 열도의 벼농사 문화가 한국의 무늬없는 토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반도에서 벼농사 기술과 고인돌, 청동기 등을 포함해 고도로 발전한 문화가 유입됐으며, 상당히 많은 사람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볼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8)

이 문제는 이 정도로 하고 다시 계속해서 에가미 선생의 견해를 봅시다.

에가미 선생에 따르면, 고분 후기에 들어서면 이전과는 달리 금·은으로 만든 관(冠) 귀걸이·검·대금구(帶金具)·허리띠 등 실로 금으로 찬란하게 장식한 대륙 왕후의 복식품(服飾品)이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기마전(騎馬戰)에 적합한 대륙제의 괘갑(挂甲)이나 기마전용 철제화살촉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이 고분 문화는 선비나 흉노, 부여, 고구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인데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반도부여로부터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또 지금까지 본대로 수많은 사료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고분시대 후기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왕조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가미 나미오 선생은 "고분문화의 전기와 후기 사이에 단절(斷切)과 비약(飛躍)이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9)

에가미 나미오 선생은 부여 또는 고구려계로 추정되는 기마민족 계열이 신예무기와 말을 가지고 한반도를 경유하여 북규슈(北九州) 나 혼슈(本州) 서단에서 침입하여 AD 4세기 경에는 기내(畿內 : 기나이) 즉 야마토 지역에 진출하여 그 곳을 정복하고 강력한 야마토(大和) 왕조를 수립하여 일본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림 ③] 일본 고대사 관련지도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야마토 왕조의 실체를 부여 또는 고구려라고 보고 있지만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고구려는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남하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위나라의 전쟁 후유증으로 인하여 일시적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국왕이 전사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혼란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에 세력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열도로 옮겨 올만한 세력은 반도부여가 유일했던 것입니다. 종합적인 연구결과 부여계의 남하가 가장 타당합니다. 이 부분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고증하였습니다.

일본의 신화에서는 국신(國神)과 천신(天神)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가미 선생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은 국신은 열도의 선주민 특히 왜인(倭人)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고 천신(天神)은 요동 만주 지역의 기마씨족으로 천손족(天孫系) 또는 천황계(天皇系)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와 같이 왜인과 부여계를 완전히 구분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열상으로 본다면, 왜(倭)라는 개념과 부여계가 완전히 다른 민족으로 파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의 선후는 있겠지요.

그리고 에가미 선생과 연구자들은 한반도 남부의 가야 세력과 연합하여 현재의 규슈의 후쿠오카로 침입하여 한반도의 가야지역과 규슈의 쓰쿠시(築紫 : 현재 규슈의 후쿠오카) 지역에 왜·한 연합왕국(倭韓連合王國)이 성립되었으며 왜왕(倭王)은 우선 쓰쿠시에 수도를 두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AD 4세기 초의 일로 보이는데 이 왕국이 점점 융성하여 4세기 중엽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견줄만한 대 세력이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10)

여기서 말하는 이 왜·한 연합왕국(倭韓連合王國)에 대해서는 저는 분명히 범부여연합국가(USB)라고 명시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왜·한 연합왕국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구한 부여계의 역사는 수많은 사서에 기록되어있어 우리가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 계통성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는데 반하여 왜·한 연합왕국은 실체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에가미 선생은 이 범부여 연합국가의 모습을 일본을 중심으로 파악하여 왜·한 연합왕국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가미 선생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친 오우진 천황 시대에는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 남부의 제국과 고구려에 대한 각종 국제적인 갈등의 주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야마토 조정은 대고구려 연합전선의 주도와 더불어 기나이(畿內) 지역의 정복을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안으로는 나라 배후를 튼튼히 하고 일본을 건국하여 수도를 동쪽으로 이전하였고, 이를 토대로 밖으로는 대고구려에 대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려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에가미 선생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전략을 '한반도 작전'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11)

마치 진구황후의 한반도 정벌이 있었던 것처럼 '신화의 현실화'를 하려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태평양 전쟁 당시와 같이 야마토 지역에는 대본영(大本營)이 있고 이 대본영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듯이 보이는 군요. 마치 노회(老獪)한 정치가의 발언같기도 합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까지 한반도 남부 제국에서 열도 쥬신(일본)을 대고구려 작전의 주도자로 보기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습니다. 이 시기까지 대고구려 작전을 주도한 세력은 반도부여(흔히 말하는 백제) 세력로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 또한 이제까지 충분히 검토했다고 봅니다.

에가미 선생이 말하는 '한반도 작전'의 주체는 야마토 조정일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 야마토 조정은 근초고왕·근구수왕이었고, 이후 주도자들은 개로왕·곤지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고대일본의 국가 건국은 한반도의 쥬신 세력(부여계)이 직접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들은 요동과 만주 지역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이라는 동일한 혈통을 지녔으며 이들 기마민족이 열도(일본)를 정복하여 일본 최초의 왕국인 야마토국(大和國)을 세웠고 이 야마토 왕가의 혈통이 오늘날 일본 천황가로 그 맥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12)

이런 까닭에 현대 일본인들은 일본문화와 일본의 정체성의 시작을 야마토 왕조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무사도(武士道) 정신도 대부분의 내용은 일본정신 즉 야마토 다마시[日本魂 또는 大和魂]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즉 일본의 시작은 야마토 시대라는 것입니다.13)

그러면 여기서 이 야마토(大和)라는 말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자 주

(1)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1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태를 계기로 양국 정상 간 합의에 따라 2002년 출범, 2005년 5월까지 제1기 활동을 전개한데 이어 2007년 6월부터 제2기 활동을 시작하여 2009년 12월까지 활동할 예정이다.(『연합뉴스』2008년 11월 30일)
(2)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31쪽.
(3) 『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501쪽, 491쪽.
(4) 김현구 교수의 지론은 백제는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일본은 군사적 지원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왕실의 혈연적인 교류가 있었고, 이 같은 왕실의 혈연적인 관계는 필연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김현구 교수에 따르면, 초기에는 많은 왕녀들의 이동이 있었고 후반에는 왕자들의 이동이 많았다 한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참고. 그러나 종합적으로 볼 때 이 같은 인식은 부여계 전체적인 역사의식이 결여된 분석이다.
(5) 江上波夫「韓日古代史 - 騎馬氏族を 中心として」제4차 삼한 학술발표회(1995. 10.23 서울 롯데호텔) : 삼한역사문화연구회 『삼한의 역사와 문화』(자유지성사 : 1997) 221-223쪽. 이 자료는 국내에서 보이는 자료 가운데 생전의 에가미 선생의 생각을 가장 잘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 추정된다.
(6) 요시노 마코토(吉野誠) 『동아시아속의 한일천년사』(책과함께 : 2005) 25쪽.
(7) "어느 주장이든 송국리 유적의 돌칼이나 돌도끼, 동검 그리고 벼의 종류는 야요이 문화 초기에 해당하는 가라쓰시(唐津市)의 나바타케(菜畑) 유적 등과 비슷하다."요시노마코토(吉野誠), 앞의 책, 26~27쪽.
(8) 그 하나의 예가 한반도 남단의 김해시 예안리 유적에서 발굴된 인골은 일본 야마구치현의 도이가하마 유적에서 나온 인골과 매우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요시노마코토(吉野誠), 앞의 책,
(9) 江上波夫, 앞의 논문.
(10) "니니기노미고도 천손강림(天孫降臨)이라는 것은 한반도에 남하한 북방계 기마민족에 속하는 임나왕(任那王)이 남한의 가라(加羅)를 작전기지로 그곳의 왜인과 협력하여 쓰쿠시(築紫)에 침입한 것의 신화적 표현으로 실제 임나의 왕은 '하쓰구니시라스스메라 미고도' 즉 슈진천황(崇神天皇)이었다. 임나(任那)의 어근(語根)은 '미마'이며 '나'는 토지를 가리키는 것에 대해 슈진천황의 이름인 '미마기이리히꼬'의 미마는 임나(任那)의 '미마'를, '기'는 성(城)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미마기이리히꼬'가 바로 '임나(任那)의 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 건국이다. 따라서 그것이 성공하여 우선 임나(任那)와 쓰쿠시(築紫 : 현재 규슈의 후쿠오카)로 왜한연합왕국(倭韓連合王國)이 성립하고 왜왕(倭王)은 우선 쓰쿠시에 수도를 두었다. 이것은 4세기 초엽의 일로 보이는데 이 왕국이 점점 융성하여 4세기 중엽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견줄만한 대세력이 되었다." 江上波夫, 앞의 논문.
(11) 江上波夫, 앞의 논문.
(12) 에가미 선생은 생전에 한국에서 행한 강연에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일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위로부터 따지고 보면 결과론적으로 일본 천황은 백제계입니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 천황이 제사 지낼 때 밥그릇, 수저 그리고 마늘이 올라갑니다. 또한 입고 있는 복장이 백제식 복장입니다. 천황 다시말해서 일본민족은 백제의 후예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은 본디 한 뿌리입니다. 그러니 한국사람인 여러분은 일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국 강연회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의 이론은 여러 가지 모순된 논리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지만, 야마토의 건설자들은 부여계임을 인정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13)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야마토 왕국이 수립된 직후에, 한반도에서 사람들(백제인 : 반도부여인)이 야마토 지역(나라 현에 속하는 야마토 분지로 추정됨)으로 대량 이주해 온 사실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고 이 때문에 한국인형의 체격이 세토나이카이 해안과 혼슈우와 킨끼 지방의 일본인들 사이에 매우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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