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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한다"

[정세현의 정세토크]<12> 되돌아 본 남북관계 1년

중국 진시황의 아들인 2세 황제 때 조고(趙高)라는 환관이 권세를 이용해서 진실을 왜곡한 일을 두고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금년 1년간의 남북관계를 뒤돌아보면 자꾸 이 말이 생각납니다.

남북관계의 '위기'가 분명한데 정부에서는 '조정기'라고 하고, 이대로 가다간 점점 더 나빠질 것이 뻔하고 외국에서도 그렇게들 보는데 우리 정부만 "지금의 현상들은 금단현상이다. 곧 좋아질 것이다"고 우기고 있으니 이것이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올 1년의 남북관계를 정리한 정부 홍보자료가 며칠 전에 이메일을 통해서 들어왔어요. 그걸 보면서 아...이거 참,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 그런 보고서를 쓸 수밖에 없는 통일부 후배들이 참 안 됐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실은 따로 있는데 집권세력의 권세에 눌려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면서, 한반도 평화나 우리의 국제적 위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에 대해 '괜찮은 정책이고 앞으로 좋은 성과를 낼 것이다'는 자료를 만들어 내자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컸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통일부 후배들의 마음고생이 아닙니다. 집권세력의 시각과 고정관념 때문에 진단이 달라지면 처방이 달라지고 치료법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처럼 조정기, 금단현상 운운하는 상황에서는 남북관계는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버릴 수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는 겁니다.

정부 홍보자료의 指鹿爲馬

첫째, 남북 당국차원의 관계는 다소 경색됐는지 몰라도 민간 차원의 교류 왕래, 경제협력은 예년 수준만큼 됐다는 내용. 그 얘기는 이번 홍보자료 말고도 여당 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말했었죠. 그런데 그걸 믿을 국민이 어디 있습니까?

인적왕래가 작년에 15만9000명이었고, 올해는 17만4000명으로 늘었다고 했는데,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나기 전까지 상반기에 평양, 남포, 원산, 사리원 등지에 다녀 온 사람들 숫자에다가 개성공단을 매일 출입해야만 하는 기업인들의 출입 총 횟수를 더한 것에 불과해요. 입주 기업 수가 작년에 비해 1.5배 정도 늘었으니 그런 식으로 하면 22~23만 정도는 됐어야 합니다.

재작년에 10만 명 선, 작년에 15만9000 명 선이었다는 점을 고려하고, 증가율을 감안하면 최소 23~24만 정도는 됐어야죠. 금강산 사건 이후에 정부가 민간 방북을 콱 막아버리면서 17만여 명밖에 못 가게 됐는데...그러니까 북한의 개방개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평양 등 북한지역 방문을 정부가 막았다는 사실을 가리고 싶었던 거죠. 어쨌건, 당국 관계는 좀 뭐 했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변함없이 왕래가 잘 됐다는 건 사실과 다른 얘기입니다.

남북 교역량도 재작년에 13억5000만 달러, 작년엔 18억 달러인데, 그런 추세라면 금년엔 적어도 22~23억 달러 정도는 됐어야 해요. 작년보다 적은 액수인 16억 달러 교역이 됐다지만, 이건 개성공단에 원자재가 들어갔다가 다시 상품이 돼서 나오는 것을 보탠 게 대부분일 겁니다.

남북간에 평화를 구축하려면 군사적 틀을 짜기 전에 경제적으로 상호의존성부터 키워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개성공단 이외의 지역과의 교역도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평양이나 원산, 남포. 청진 등 북한 전역이 경제적으로 여러 갈래로 남쪽과 얽히고설켜야 경제적 이유 때문에도 관계가 안정되고 평화가 뿌리를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년 들어 그런 관계가 일체 끊어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년 수준은 된다는 얘기는 그냥 하는 얘기라면 몰라도, 정책적으로 의미 있는 설명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가당착이 되지요. 차라리 "남북관계 조정기에 나타나는 금단현상 때문에 금년에는 모든 수치가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 차라리 앞뒤 논리라도 연결되지 않겠습니까?

둘째, 대북정책에 대해 몇 가지 자문자답하는 부분이 있더군요. 억울하다는 투예요. 우리 정부가 대북 강경정책을 쓴 적이 없는데, 강경정책을 써서 북한이 반발하고 남북관계가 경색되어가는 걸로 아는 국민들이 있다는 대목. 전에도 말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절대 강경정책이 아니에요.

강경정책이라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인게이지먼트(개입)정책입니다. 그런데 이 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난 10년간의 인게이지먼트를 푸는 디스인게이지먼트란 말예요. 북한이 자세를 바꿔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그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다, 북한의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악의의 무시'전략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경정책이 아니라는 말은 맞지만, 상황 악화의 책임을 벗어 보려는 설명치고는 좀 옹색한 논리죠.

그런데다가 인수위 때부터 강조했던 '비핵 개방 3000'이 북한을 자극한 건 부인할 수 없어요. 특히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개성공단 2단계 사업을 시작할 수 없다"는 얘기는 그 연장선에서 나온 얘긴데, 그동안 남북이 합의했던 걸 이행하지 않겠다는 말이기 때문에 북으로서는 자연히 반발하게 됐던 겁니다. 이쪽에서 강경하게 몰아붙여서 저쪽이 세게 나오는 게 아니라, 조용히 약속을 깨버리니까 상대방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 아니에요? 강경정책만이 상대방을 화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남북 간에 6.15공동선언도 있고 10.4선언도 있지만 남북기본합의서가 제일 잘 됐다"는 발언도 북한한테는 자극적이었을 거라고 봐요. 자기네 당대의 최고 지도자가 서명한 합의서가 두 개나 있는데 16~7년 전 총리급에서 서명한 합의서를 들고 나오니 북으로서는 새 정부가 김정일 위원장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했을 겁니다.

"북한을 선제타격 할 수 있다"는 합참의장의 3월 하순 국회 발언도 유도심문에 걸려 나온 거라고는 보이지만, 어쨌건 북으로서는 불안해졌을 거고 그래서 4월 초부터 대남강경 총공세를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홍보자료를 보면 인수위 시절과 2~3월 중에 남북간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싹 빼고, 북한이 4월 초부터 강수를 두기 시작하고 강경노선을 걷기 시작했다는 얘기만 하더라구요. 허허, 그거 참...이 자료만 보면 많은 국민들이 '아, 우리 정부는 아무 실수 없이 잘하고 있는데 북쪽이 지레짐작으로 까닭없이 저 혼자 강수를 두는 구나!'하고 생각을 하게 돼있더라 이겁니다. 홍보라는 게 워낙 아전인수하는 속성이 있기는 하지만, 도가 좀 지나치면 오히려 신뢰를 잃는 거 아닌가요?

북한이 우리 대북정책을 오해하고 있다는 대목도 있어요. 사실은 잘해주려고 하는데 오해를 하고 자꾸 강수를 둔다고 돼있는데, 이거 얼마나 궁색한 얘깁니까? 70년대부터 남북이 서로 성명도 많이 주고받았고, 회담에서 얼굴 붉힌 적도 많았지만, 우리가 진정성을 가지고 말하는데도 오해 때문에 북쪽이 세게 나오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한 적은 없어요. 우리 쪽도 마찬가집니다. 북쪽이 남쪽과 관계를 잘 풀어가고 싶을 때 진정성을 가지고 내놓은 말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해서 강수를 두거나 무시한 적은 없었어요.

남북 간에 몇 가지 용어에 차이가 좀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상대방 의사의 문맥도 못 짚어내고 숨은 뜻도 못 찾아낼 정도로 남북 언어의 이질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무슨 '오해'니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느니 합니까?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란 말은 결국 '너희들이 변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얘기죠. 시간이 가면 결국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함의가 있으니까 북쪽이 반발하는 거예요. "북한에 잘해주려고 한다"는 것도 남북관계를 일종의 시혜 관계로 본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라도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 나쁠 수 있지요.

'시작이 늦더라도 제대로 된 남북관계를 해야 한다'고도 했는데 '제대로 된 남북관계'라는 말, 사전적인 의미로는 나쁘지 않아요. 최소한 상호주의는 해야겠다는 얘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북은 달리 받아드릴 겁니다. 아마도 시혜자로서 남쪽이 절대적인 우위에 서고 수혜자로서 북쪽은 굴종적으로 끌려가는 관계라고 생각할 거 같아요.

남북관계를 풀어 나가려면 이런 말들이 북쪽에 자극적으로 꽂히게 된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용어와 표현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북쪽을 아예 상대 안하고 살 수 있다면 몰라도, 좋든 싫든 북쪽과 관계를 개선해 나가야 통일도 할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이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의 운명이라면, 북쪽이 남쪽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최소한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생각해 가면서 말도 하고 제안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 도라산역에 멈춰버린 남북 열차 ⓒ연합뉴스
멸공통일주의자들이 장악한 통일부를 원하나?

또 하나 걱정스러운 건...지난주에 어떤 일간지를 보니까 고위 공무원 물갈이 관련해서 청와대에서 마뜩찮게 생각하는 부서에 통일부가 포함되었더군요. 북한한테 휘둘린다는 거지요. 지금 상태를 가지고 휘둘린다고 하면 어떤 상태를 바람직한 걸로 보는 건지....

그동안 통일부가 뭘 했습니까? 상부지침에 따라 북한의 강수에 '일희일비 하지 않았'고 '의연하게 대처'했는데, 북한에 휘둘렸단 얘기는 무슨 얘기인고? 통일부가 북진통일, 멸공통일 논리를 펴야 만족하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통일부를 아예 없애려고 했던 사람들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정말 걱정입니다.

역사교과서 문제도 심각한 일이예요. 교과서뿐만 아니라, 무슨 현대사 특강이라는 걸 밀어붙이는 것 같던데...그게 얼마나 설득력이 없었으면 강의를 듣던 여고생이 뛰쳐나오고, 인터넷에 왜 그런 걸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올렸겠어요?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데...오히려 역효과 날 텐데...

금년 1년을 뒤돌아보면, 새 정부가 지난 10년의 대북정책을 수정 보완하는 게 아니라 완전 부정하다 보니, 70~80년대의 남북관계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조치들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20~30년 전의 국민의 수준과 지금의 수준이 다르고, 국제정세와 남북의 위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70~80년대 대북정책이나 제의는 항상 조건이 있었어요. 북한이 뭘 하면 우리가 이런 걸 할 용의가 있다. 그러면서 북한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걸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제안하고 그랬는데...북쪽도 그런 짓 많이 했죠. 평화공세라는 거 말입니다. 상대방이 하는 것에다가는 늘 위장이란 말을 붙여서 서로 '위장 평화공세'라고 했죠.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가 지금처럼 이렇게 하다 보면 그 때처럼 조건부 대북 제안이나 하면서 시간이 갈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국제정세가 우리한테 그럴 여유를 주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지 않을 거예요.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 북핵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북미수교까지 인센티브로 제시하면서 거물급 특사도 보낼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물론 미국이 그런다고 북한이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협조적으로만 나가진 않을 거예요. 오바마 정부를 상대해서도 전술적으로는 과거에 썼던 방식들을 계속 쓰겠죠.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클린턴 임기 말 기회를 놓치고 나서 부시 시대에 힘들었기 때문에, 오바마 시대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 정세는 큰 틀에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일본을 중시하던 부시와는 달리 오바마가 중국과 적극 협력하면서 동북아 정세를 풀어나갈 때, 북한이 과거처럼 몸값을 높이기 위하여 미중간의 틈새를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북-미-중 삼자 관계가 원활하게 돌아가면서 동북아 질서 재편이 일어날 텐데, 북한이 못 마땅하다고 해서 남북관계를 이렇게 경직된 상태로 끌고 간다면 결과적으로 누가 손해를 보겠습니까? 불을 보듯 뻔한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남북관계를 빨리 복원해 놔야 합니다. 미북관계, 한미관계, 남북관계 세 축의 균형을 잡아야 돼요.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인 출신이니까 통일안보 문제는 결국 참모들이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해야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참모들이 지금 '인식의 동굴'속에 갇혀 있을 뿐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을 상대로 해서 현실을 호도하고 있어요. 누가 보더라도 남북관계가 지금 분명히 경색돼 있고 악화되어 가고 있는데 조정기, 금단현상 운운하는 게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겁니까?

국제적으로도, 남북관계가 나빠지고 있다고 보고 있지 조정기라고 보는 전문가는 없어요. 무슨 얘길 하려면 국민의 수준도 의식해야하지만 국제적인 시각도 의식해야 합니다. 지금 남북관계 상황을 조정기라고 보는 미국이나 일본의 전문가, 언론인들이 없지 않습니까? 이게 지록위마가 아니고 뭐겠어요? 참모들이 자꾸 그러니까 대통령이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고 확신하는 거 아닙니까? 큰 일 날 일입니다. 참으로.

대통령 참모들 '인식의 동굴'에서 나와야

지난주 금요일 통일부 출신들 친목모임인 통일동우회에서 미국통인 한승주 전 외무장관이 강연을 했는데, 그 분도 오바마 시대의 대북정책은 북한이 비핵화를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핵보유국에 집착해서 비핵화를 거부했을 경우에 얻을 수 있는 혜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결국은 비핵화로 간다는 식으로 전망하더라고요.

큰 틀에서 보면 그렇게 되리라고 봅니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남고 싶어 하겠지만 오바마 정부가 '과감하고 터프하게' 접근해 오는 상황에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겁니다. 북한이 오바마의 한반도 비핵화 정책에 협조하지 않고는 핵카드로 얻고자 하는 체제인정과 경제지원, 평화협정 등등을 절대로 받아낼 수 없다고 전망하던데, 그렇게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국이 미국과 협의(Consultation)를 잘 해나가면서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던데...현실적으로 우리가 미국을 설득해서 무시전략이나 강경노선 쪽으로 끌고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실제로 미국이 자기네 국내정치적 필요에 의해, 또는 대외정책의 기본방향과 관련해서 대북 강경정책으로 밀고 갈 때 우리는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노무현 정부 후기예요. 초기에는 북핵과 남북관계 병행론을 견지하던 노무현 정부도 부시 정부가 워낙 확고부동하니까 나중에는 북핵 우선해결 입장으로 돌아서서 정상회담도 늦췄잖아요? 남북관계 '한 발짝 후행론'까지 내놓고.

그런데 이번엔 반대로 오바마 정부에서는 국내 경제문제 때문에라도 대외적으로 유연한 외교를 할 수밖에 없고, 군사적인 조치 같은 것은 쓰려고도 안할 겁니다. 이라크에서 철수하고 북한과 이란 핵문제도 전제조건 없이 "tough, direct diplomacy"로 문제를 풀려고 하는 마당에 대북 무시전략이 북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미국을 설득할 수 있겠어요?

오바마의 대외정책 방향, 대북정책 기조에 결국 우리가 맞출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면 이명박 정부는 거기에 빨리 적응하기 위한 준비를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외교안보라인 인선이 끝나고 정책 리뷰를 해야 할 내년 상반기 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지 몰라도 어차피 이런 대북 무시전략은 시한부예요.

한승주 전 외무장관도 결국 9.19공동성명을 오바마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이행하는 쪽으로 가지 않겠나, 힐러리가 국무장관인 만큼 2000년 10월 미북 공동코뮈니케도 준거가 될 거라고 보더군요. 특히 경수로 제공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협상카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지적했어요. 북한도 그걸 바라겠지만 우리도 그런 걸 잘 활용해서 비핵화를 확실히 끌어낼 수 있는 전략을 세워놓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던데,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 미국에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연달아 세 번 나왔습니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되면 6자회담이 무의미해지고 북핵을 없애려면 북미핵군축 회담을 해야 한다는 기술적인 분석이 많았고요, 동북아라는 무기시장을 지키려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음모란 얘기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둘 다 일리가 있어요. 먼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문서행위의 출처가 다 군부 쪽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전통적으로 미국의 군부는 군산복합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로서는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해야만 하는 상황을 자꾸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부시 시대에 무역적자나 재정적자 속에서도 이라크 전쟁 같은 대외군사개입 때문에 군수산업은 호황을 누렸고, 고용창출 효과가 커서 부시의 재선도 사실은 그것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어요.

군산복합체 입장에서는 세계 도처에 안보 불안의 불씨를 남길 필요가 있어요. 동북아에 한정해서 보면 중국과 북한, 특히 요즘엔 북한 때문에 일본과 한국에 무기 장사가 된다고 얘기할 수 있지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핵보유국 표기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구차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군산복합체로서는 무기시장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토대가 되지요.

그리고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명기했던데, 그걸 보고 2003년에 NIC가 서울에 와서 했던 일이 생각났어요. 노무현 정부 초기, NIC가 <북한의 핵능력 분석과 전망>이란 자료를 만들어 와서 청와대에 NSC(국가안전보장회의) 멤버들을 전부 불러놓고 브리핑을 했어요. 아마 여름이었을 겁니다. 그때는 이미 북한이 그해 1월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고 클린턴 때 수조 속에 들어가 있던 연료봉을 꺼내서 재처리를 하고 무기급 플루토늄을 확보해놓은 시점입니다.

그때 NIC는 북한이 4~5년 후에는 핵폭탄을 6~7개 정도 만들 거고, 그로부터 또 4~5년 후에는 열 몇 개, 그리고 삼십 몇 개...이런 식으로 프로젝션을 해왔더라고요. 이렇게 위험한 국가니까, 6자회담에 북한이 나오면 미국의 핵 반확산 정책에 적극 협조하라고 한국의 NSC 멤버들에게 교육을 시킨 거였죠.

내가 그걸 보면서 당시 동석자에게 "저렇게 북한 핵무기 개발 추세가 계속 상승곡선만 그릴 거라고 설명하는 게 말이 되나?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거야?'라고 했더니 그 동석자도 '그러게 말야' 하는 식으로 소감을 주고받았던 적이 있어요. NIC는 북한의 핵능력을 자꾸 부각시켜서 한미 안보협력이 결과적으로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맞게 이루어지도록 만들려는 거였겠지요.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북한의 핵 능력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미국 CIA(중앙정보국) 판단과 DIA(국방정보국) 얘기가 계속 달랐어요. 핵물질 확보량이나 핵기술 수준에 대해서 군부 쪽인 DIA 예측치가 CIA 예측보다 거의 두 배쯤 많을 정도로 차이가 났죠. 그게 뭘 의미합니까? 그런데 2003년에 보니까 NIC는 DIA 쪽의 관점을 가지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NIC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표기한 걸 보면서 2003년 여름 브리핑이 생각났고, '아, 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몰고 가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미국의 군산복합체 주변의 생각이나 움직임은 그렇다 치고...문제는 북한이 바로 그걸 이용해서 미국하고 핵보유국끼리 군축 회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거라는 겁니다. 핵실험 직후 이미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바마 정부에 그걸 들이밀지도 몰라요.

문제는 오바마 대통령과 백악관, 국무부의 입장입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지금까지 형편없는 패를 들고도 협상에서 항상 유리한 결과만 갔던 걸로 미루어볼 때, 결국은 소량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미북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제지원을 받아낼지 모르고, 오바마도 그렇게 북한의 핵무기를 관리하는 선에서 타협할지 모른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기자 출신인 돈 오버도퍼 같은 사람도 최근 서울에 와서 그런 얘길 했어요.

그런데 미국이 북한을 슬그머니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려고 하면 우선 첫째, 미국이 우리의 반발을 감당할 수 없어요. 곧바로 우리 쪽에서도 핵무장하자는 얘기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럼 일본에서도 핵무장론이 탄력을 받고, 대만도 나설 거예요. 그러면 미국의 핵 반확산 정책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돼요. 인도-파키스탄이 있는 서남아와 동북아의 사정은 다릅니다. 그런 점에서 오바마나 백악관, 국무부 입장에서는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남으려고 하는 한 북한이 바라는 것을 아무 것도 줄 수 없게 됩니다.

북한으로서는 일단 욕심을 내겠죠. 한반도에서 미북간 핵군축 회담이 열리고, 그 토대에서 미북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한국의 대내외적인 위상은 형편없이 추락하고, 북한은 소위 반사이익을 볼 수 있죠. 국내정치적으로나 국제정치적으로. 하지만 한국, 일본, 대만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에 북한이 바라는 방향으로 미국을 끌고 갈 수 없을 겁니다. 중국도 그럴 순 없습니다. 대만이 뭘 하겠다고 나오면 커다란 전략적 손실을 입기 때문에, 중국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북한도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 정세토크가 12회가 되면서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연말도 됐는데 독자들에게 한 말씀.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그동안 때로는 정제되지 않은 분석도 있었을 거고, 정확치 않은 전망도 있었을 텐데 의외로 여기저기서 잘 읽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회를 주신 프레시안에 감사드리고, 두서없는 얘기, 정제되지 않은 분석과 전망을 열심히 읽어주신 여러분들께도 연말을 맞이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11월말 미주 지역 순회강연을 갔을 때, LA, 뉴욕, 토론토에서 만났던 많은 분들이 '정세토크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친구들한테 퍼 나르고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굉장히 고마운 일이죠. 귀 기울여 들어주고 눈여겨 봐주는 독자가 있는 한, 앞으로 더 정확한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09년에는 만사가 뜻대로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여러분들의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우리의 대북정책이 궤도수정을 하면서 남북관계도 좋은 방향으로 잘 풀려나가길 축원합니다.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現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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