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발표된 세제개편안이 '부유층과 대기업을 위한 감세'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12월 6일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민주당은 세제개편에서 한나라당이 원하는 대로 합의해주고 예산안에서 양보를 얻어내려 했는지 모르지만, 한나라당이 민주당과 민노당을 배제한 채 예산안을 단독으로 처리함으로써 결국 예산안도 한나라당이 원하는 대로 처리되고 말았다.
정부와 여당은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이 '부유층에 대한 징벌적 증세'를 시행했음을 주된 빌미로 삼아 부유층 감세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조세정책이 그렇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던가? 국민의 정부 시절 상속세와 증여세가 다소 강화되었지만, 금융소득 부부합산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지면서 종합과세는 후퇴했고, 토지초과이득세가 폐지되었으며, 소득세·법인세·양도세·특별소비세(특소세) 등의 세율도 수차례 인하되었다.
참여정부도 마찬가지여서 소득세·법인세·특소세의 세율인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조세감면 등이 반복적으로 시행되는 등 감세의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단지 양도세 중과, 종부세 부과 등 부동산 세제가 강화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OECD국가들과 비교해 우리나라의 취·등록세가 높고 보유세가 낮다는 점에서, 취·등록세 인하 및 보유세 증가는 왜곡된 재산세 구조를 정상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보아야 한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은 부동산 보유세 강화를 빌미로 '부유층에 대한 징벌적 증세'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이를 근거로 감세를 밀어붙였다.
'부유층에 대한 징벌적 증세'라는 이데올로기
한편 정부와 여당의 감세정책은 미국의 레이건 및 부시정부를 모범으로 삼은 것이기도 하다. 특히 부시정부의 감세정책은 '근본적 세제개혁론'과 '세계화 논리'에 근거해 추진되었다. 근본적 세제개혁이란 소득세가 저축이나 투자 같은 경제적 선택에 영향을 미쳐 경제성장을 저해하므로, 소득세를 완전히 없애고 이를 소비세제로 대체하자는 주장이다.
한편 '세계화 논리'는 전세계 차원에서 고급노동과 자본을 유치하려는 경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이동성이 강한 생산요소의 조세부담을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두 논리가 결합되면, 법인세·소득세·재산세를 낮추고 부가가치세 같은 소비세 위주로 조세체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미국의 감세안의 근저에 깔린 이러한 논리가 우리나라에도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세개혁 논리는 효율성에만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조세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소득재분배 기능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OECD국가들은 여전히 적극적인 조세정책과 복지정책으로 소득재분배를 충실히 실행하고 있다. 결국 소득재분배가 취약한 미국을 모범으로 삼고 따르고자 하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편협함에 불과하다.
감세정책은 그 논리적 근거가 미약하다는 것 외에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킬 소지가 매우 크다. 이번에 통과된 감세정책의 혜택은 상대적으로 자금사정이 양호한 대기업과 부유층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에 투자와 소비진작 효과, 즉 경기부양 효과는 작은 반면, 그로 인해 줄어드는 세수를 메우기 위해서는 대량의 국채가 발행되어야 한다.
항구적 감세로 인해 국채가 계속 발행되다 보면 결국 만기가 돌아오는 채무를 갚기 위해 다시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즉 경기부양 효과는 크지 않은 반면, 재정건전성을 크게 악화시켜 종국에는 경제를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재정건전성 악화와 복지후퇴는 명약관화
미국의 경험을 보더라도 감세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레이건과 부시정부 시절 재정적자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를 위해 발행된 미국 국채가 대규모로 전세계에 팔려나가면서 미국은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하고 국제적 금융불안정이 야기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 위기적 상황에서 감세정책이 추진되기 때문에 재정건전성이 더욱 빠르게 악화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한나라당은 야당 시절 좌파정부의 복지정책 때문에 채무가 급증했다고 비난하나, 지난 10년 동안 정부 채무가 증가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위해 투입한 공적자금의 국채화 등 주로 외환위기 수습에 기인한다. 즉 경제위기만으로도 향후 몇년 동안 재정지출이 급격히 늘 가능성이 높은데 항구적 감세가 추진되는 것이다.
이명박정부는 민영화를 통해 세외수입을 마련함으로써 채무 급증을 막겠다는 심산이다. 그렇게 되면 당장은 감세로 인한 재정건전성의 악화가 감추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으로 민영화를 밀어붙이는 것도 문제이고 민영화 이후는 더욱 문제이다.
감세정책의 또다른 문제는 복지정책의 후퇴 가능성이다. 감세로 인한 재정건전성 악화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안이 바로 복지지출 축소이기 때문이다. 내년도 예산안에서 보건복지예산 증가율은 총지출 증가율 6.5%보다 높은 10.7%인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증가된 예산 가운데 참여정부 시기에 만들어진 법 집행을 위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재량지출은 오히려 1.4% 감소했다.
복지써비스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지방정부의 재정수입이 감세정책으로 인해 대폭 줄어드는 것도 큰 문제이다. 지방정부가 대규모 재정부족에 직면할 경우 결국 힘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사업에 가장 먼저 손을 댈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복지지출은 현 수준에 정체하거나 후퇴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복지후퇴를 초래하는 장본인인 이명박 대통령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최근 신빈곤층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중산층·서민을 위한 세제지원 및 지출확대가 세계적 대세
'부자 감세'를 실시하는 이명박정부와 달리 대부분의 국가들은 경기침체로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중산층과 서민에 대한 직접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 민주당은 실업수당 수혜기간을 더 늘리고, '푸드 스탬프 프로그램'을 확대할 예정이며 오바마 당선자는 공공교육기관 시설보수와 건강보험 현대화 사업 등에 경기부양책 재정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도 2천억유로의 경기부양책을 내놓으면서 회원국에 특별히 빈곤 지역과 대량해고로 타격을 입은 노동자들을 돕는 다양한 재정지출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영국도 2백억파운드의 경기부양책을 내놓았으며 저소득층과 영세업자에 대한 세제지원과 고소득자의 소득세율 인상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부자 감세'가 통과한 것에 대해 민주당의 책임이 매우 크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은 그나마 종부세 최고세율을 2%로 지킨 것을 중요한 성과로 들고 있다. 하지만 2%의 종부세를 납부하려면 공시지가 94억원 이상의 고가주택을 소유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 그 대상자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으로서는 의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야성(野性) 없는 야당'이라 비판받아 마땅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감세'에 '감세'로 대응함으로써 감세 틀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운신의 폭이 제한되었다. 한나라당의 '부자 감세'에 '부자 증세' 혹은 '복지확대'로 대응했다면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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