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2>는 비슷한 그림인데 오른쪽 사람의 모습이 약간 다르다. 사람이 밥상에서 고개를 돌린 모습으로 본다. 밥을 다 먹고 고개를 돌려 식사가 '이미' 끝났음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미'의 뜻인 旣(기)자다.
그런데 이걸 그림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면 같은 旣자인 <그림 3>은 밥상에서 돌아앉았지만 고개는 밥상을 향하고 있으니 개념을 잘못 잡은 誤字(오자)인 셈이다. 단순히 두 글자를 합친 것이고 그 두 요소의 위치만 바꾸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을, 그림으로 해석하려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卽이나 旣는 모두 이런 '그림'이 아니다. 오른쪽 卩(절)과 旡(기)가 각기 발음기호인 형성자들이다. 旣의 경우는 발음이 일치하니 문제가 없고, 卽은 卩이 발음기호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말 ㄹ 받침은 본래 닫힌 소리인 ㅌ 정도의 발음이었음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연결이 되고, 결정적으로 卽 발음을 이어받은 節(절)이 卩의 발음과 일치한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櫛(즐)도 비슷한 발음이며, 櫛의 삼촌 격인 喞(즐)도 같은 발음이다.
그렇다면 이 두 글자에서 왼쪽 皀(흡/급)이 의미 요소가 된다. 이 글자는 香(향)과 연관짓기도 하는 등 정체가 다소 불분명한 글자여서 그것이 의미 요소임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皀이라는 글자가 다른 글자의 변형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 모습이 豆(두)와 비슷함이 눈에 들어온다. 豆는 제사 그릇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 상형설에는 의문이 있지만 그것이 그런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卽과 旣는 상형은 아니지만 각기 제사를 지내는 상황과 그것이 끝난 상황을 나타내는 형성자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
그런데 '밥상 시리즈'는 卽과 旣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그림 4>를 보면 밥상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다. 이른바 '겸상' 버전이다. 이는 卿(경)자다. 卿은 높은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말인데, 본래 '음식을 차려 대접하다'의 뜻으로 만들어졌다가 그런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는 사람인 높은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는 것이다.
卿은 鄕(향)과 같은 글자에서 분화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옛날에 도성 밖을 여섯 개의 鄕으로 나누어 6卿이 다스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卿에서 지방 행정 단위인 鄕이 분화해 나가고 다시 '시골'의 뜻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卿=鄕이라는 얘기는 받아들일 만하다. 옛 글자 모양이 비슷하니 지금 글자꼴의 사소한 차이로 별개의 기원을 상정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본 필자의 일관된 주장이 관철돼 있다. 또한 두 글자의 비슷한 발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시 '그림'은 아니다. 일단 가운데 皀과 양쪽의 卯(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卯는 비슷한 모양을 <설문해자>에서 '경' 발음의 별개 글자로 정리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卿은 그 卯(경)이 발음기호, 皀이 의미인 형성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설문해자>는 또 鄕의 좌우를 邑(읍)과 그 대칭형을 합친 글자라며 '향' 발음으로 정리했다. 卿=鄕임을 생각하면 卯 비슷한 글자로 '경'과 '향' 발음을 가진 두 글자는 사실상 같은 글자로 봐야 하는 것이다. 즉 卿=鄕은 卯(경/향)을 발음기호로 하는 형성자가 되는 것이다.
鼎(정)은 솥을 그린 상형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림 5>처럼 완벽한 솥의 모습은 오히려 후대인 금문에서 나오고, 갑골문은 <그림 6>처럼 다소 애매한 모습이다. <그림 6>은 <그림 7>처럼 복잡해지기도 하는데, 그 윗부분을 보면 皀의 모습을 잡아낼 수 있을 듯도 하다. 廐(구)의 旣 부분은 㲃로 쓰기도 하는데, 皀의 위쪽 삐침획이 <그림 7>처럼 卜(복)자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鼎은 발음이 비슷한 卿=鄕과 같은 글자일 가능성이 있다. 鼎의 아랫부분을 卯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卿=鄕에 '잔치'의 뜻이 있다면 '솥'인 鼎과 의미상 연결이 된다.
한편 여기까지의 연결이 가능하다면 <그림 8> 같은 鼎의 또 다른 모습을 볼 때 卯 부분은 두 손인 廾(공)의 변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모습은 다시 전에 나왔던 具(구) 등의 모습과 비슷해 그쪽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전승 과정의 '오차'를 생각해 같은 글자였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 어디선가 오차가 아닌 '실제 차이'가 들어 있다면 고리는 끊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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