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내에 존재하는 엄격한 군기와 규율은 군대 내부에서는 '폭력'의 형태로, '용감무쌍함'은 외부의 적에 대해 '잔인함'이라는 형태로 각각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는 군대 내부뿐만 아니라 군대를 둘러싸고 있는 군대 외부에 광범위하게 그리고 뿌리 깊게 존재하는 위계질서, 조직의 비민주성 등의 현상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군사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한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군사주의적 경향은 정치적 개념 이상의 보다 폭 넓은 규정성, 예를 들면 역사적 문화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주의를 폭력성, 봉건성, 정치지향성(과잉 이데올르기)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바라 볼 경우에(세 가지 요소는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치면서 증폭상승의 과정을 반복하지만), 특히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봉건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군대적 위계질서가 군대 내부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기초원리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이와 같은 '봉건성'이 폭력성과 정치지향성의 기초를 이룬다는 점이다. 폭력성과 정치지향성은 군사조직이 갖는 일반적 성격이지만, '봉건성'은 폭력성과 정치지향성을 한층 더 노골화시키며, 일반적으로 '불완전한 근대' 속에 있는 사회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 일본 해상자위대 ⓒ연합뉴스 |
그렇다면 군대의 봉건성은 어디에서 유래되는 것일까?
하나는 저비용 다병주의이다. 물론 고비용 정예주의의 반대편에 있는 말이다. 이는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작은 비용으로 많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대와 사회 간의 생활수준의 격차는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사회보다 열악한 군대 내의 생활수준에 사회에서 갓 입대한 청년들을 적응시키고 그 적응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를 은폐/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애국', '충성', '단결' 등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와 함께, 폭력 장치가 다수 동원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서 문화의 '전통'이 다수 동원된다.
한국 군대에서 쉽게 동원, 소비되는 유교적 언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유교 등의 문화적 전통과 군대의 엄격한 위계질서, 혹은 봉건성과의 인과관계가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유교적 전통 문화와 군대내의 엄격한 위계질서 간에 현상적인 공통점이 발견된다고 해도, 공통점만을 근거로 양자의 인과 관계를 주장할 수는 없다.
해방 후 한국의 군대 조직이 그 내부 규율이나 조직 시스템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향은 대개의 경우 인적 계승의 문제로만 해석되어 왔다.
따라서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 청산되지 못했다는 일종의 역사적 '순결성'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구 일본 제국주의와의 연속성이 갖는 파행성이 강조되어 왔다. 해방 한국의 군대 조직의 중심세력이 과거의 친일파나 혹은 일본 육사나 군대를 경험한 세대들에 의해 주도된 나머지, 해방 정국 이후의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에 따라 군대를 비롯한 사회조직에도 광범위하게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이 강고하게 남게 되었다는 논리이다.
물론 제국군대와 한국군대를 군대 규율의 연속이라는 차원에서 '인적 계승'을 통해 밝혀내는 작업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지나치게 군대 규율을 기능의 차원에만 가두어서 해석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군대의 가장 큰 특징인 정신주의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가와노 히도시(河野仁)는 2차 세계대전 시의 미군과 일본군의 행동패턴을 비교분석해 미군을 '생환의 군대'로 일본군을 '옥쇄의 군대'로 묘사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일본 연구자 존 다워(Jonh W. Dower)는 2차 세계대전 중의 미국인에게 일본군은 '이상한 규율과 전투 기술을 가진 일본인 초인(슈퍼맨)'으로 각인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초인적인 정신주의적 경향이 군대내의 엄격한 규율과 폭력에 의해 지탱되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정신주의적 경향이 어떤 이유로 형성되었는가이다.
첫째는 문화주의적 접근방식이다. 미국의 일본 연구의 효시라 볼 수 있는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은 전쟁 중에 나타나는 일본 군인의 과도한 정신주의적 헌신성, '무항복주의'를 일본 사회 고유의 '치욕'(하지, 恥)의 문화에서 찾고 있다. 이 '치욕'의 문화가 잔인함, 맹목성, 충성심으로 연결되었고 '옥쇄', '산화', '가미가제', '집단자결', '할복'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혹은 에도시대의 무사도와 같은 정신주의적 토양의 전통이 전전의 일본 군대의 정신적 원류를 형성했다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에도 시대 인구의 약 7% 정도를 차지했던 사무라이 계급의 도덕률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무라이 계급과 일본군과의 정신세계상의 현상적인 공통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위로부터의 강제', 특히 군대 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이른바 '정신교육'의 철저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정신교육을 통해 개인을 가족, 고향 공동체, 천황에 끊임없이 매몰시켜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칙유'(軍人勅諭, 1882년 천황이 군인에게 '하사')에서는 군인의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천황에 대한 '충성'에 두고, '천황 통수권' 하에서 일본군을 '국민의 군대'가 아닌 '천황의 군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의 명령이니, 이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군인의 죽음은 곧 천황에 대한 충절의 가치이며, 충의는 산(山)보다 무겁고 사는 홍모(鴻毛)보다 가볍다" 등등.
또한 군인들의 내무생활 지침을 담은 '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 1908년 제정, 1943년 대폭 개정하여 군대내무령으로)에서는 군대를 '一大家族'으로 간주하고 가족의 공간으로 내무반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증언은 군대 내무반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저녁 점호를 끝내고 내무반에 돌아간다. (중략) 초년병은 정열하고, 우선 군인칙유의 암기복창이 시작된다. 순번이 돌아온다. 누군가 우물쭈물하면 '안경을 벗어! 이를 악물어!'라는 말과 함께 전원에게 핀타(뺨때리기)가 날라온다. 칙유암기복창이 끝나면 다음은 총을 비롯해 총검, 군화 등의 수입, 검사가 시작된다.
연대해서 기합을 받는 경우가 많다. (중략) 내가 때리는 것이 아니다. 대원수(천황)가 때리는 것이다. 잘 알아두라고."
또 전장에서 군인이 지켜야 할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담은 전진훈(戰陣訓, 1941년)에서는 "항상 향당가문(鄕黨家門)의 체면을 생각하라"라는 내용을 담아 향토부대주의 채용의 기반으로 삼았으며,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받지 말아야 하며 죽음으로 오명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구절을 통해 '옥쇄(玉碎)'의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로부터의 강제'를 강조한다고 해도, 일본 제국주의가 왜 이런 정신주의적 규율을 강조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정신주의적 규율은 결국 저비용주의라는 요인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일본 육군의 전략 전술의 기본원칙을 담은 『통수강령(統帥綱領)』(1928)에서는 "물질적 진보는 심대하지만, 승패의 주된 원인은 여전히 정신적 요소에 있으며", 이 정신적 요소로 "부족한 군대와 자재"를 넘어설 것을 담고 있다. 또 『작전요무령(作戰要務令)』(1938)에서도 "훈련이 주도면밀하고 필승 신념이 확고하며 군기가 엄정하고 공격정신이 충만한 군대는 물질적 위력을 능가"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군이 독일식 화력주의를 버리고 이 같은 정신주의적 규율에 입각한 '백병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은 러일전쟁 무렵이다. 낮은 수준의 공업 수준과 한정된 경제력으로 인해 군사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 군대는 선택의 여지없이 정신주의에 입각한 백병주의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정신주의에 입각한 백병주의가 일본 육군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낮은 수준의 경제력 때문에 포병주의에 입각한 물량 화력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대량의 인원동원에 입각한 육군 중심의 정신주의를 초래했으며, 그 결과 징병제도를 강화해 인적 자원의 대량 동원 시스템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량으로 동원된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위한 시설로서 '집단 거주형 내무반'이 고안된다. 그리고 집단 거주형 내무반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정신주의적 규율과 폭력장치가 동원된다. 지금 한국 군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내무반 구조가 구 일본 육군의 그것과 거의 흡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와는 달리 보다 본질적인 문제인 '불완전한 근대'와의 관련 속에서 일본 군대의 특징을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선교사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난, 캐나다의 역사가이면서 외교관이었던 허버트 노만(E.H. Norman)은 일본 군국주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노예의 신분에 있는 자는 타인에게 자신의 족쇄를 채우는 가장 잔인한 대리인이 될 수 있다. 징병제 설정의 동기가 농민반란 진압의 수단이었고 반혁명을 위한 군대창설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군대는 본질적으로 대외침략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일본 군인의 잔인한 대외침략의 원인이 일본 군대가 '해방되지 않은 농민'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서양의 징병제가 근대 시민 혁명에 의해 탄생한 '시민'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근대적 시민 혁명이 아니며, 따라서 일본의 군대는 '시민'이 아니라 '해방되지 않은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감시', '강제', '비자발성', '신분제에 가까운 위계질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생적으로 시민사회를 형성하지 못하고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강하고 매우 빠르게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근대적 사회조직에 적합한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또한 매우 폭력적이고 급진적이다. 예를 들면, 근대적 인간형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것이 신체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규율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육은 농업노동이 아니라 분업화된 공정 속에서 한 가지 일을 반복하는 공장노동에 적합하여야 한다. 일단은 중세적 신분질서는 무시되어야 한다. 일본의 예를 들으면, 사무라이 계급이 구 백정 계급인 에타/히닌과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족이나 신분이 아닌 새로운 사회집단(회사 등) 속에서 자신을 자리매김하여야 한다. 그리고 가족이나 지역, 신분에 따라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국가라는 틀 속에 '국민'으로 통합하여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근대적 노동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매우 더디고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따라서 개별자본의 수준에서는 높은 비용과 시간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국가가 교육기구(내용, 기관 등)의 기반 확충 등을 통해 이를 달성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이 또한 많은 비용이 소요될 뿐 아니라, 추진과정에서 적지 않은 마찰과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이에 소요되는 조정비용 또한 적지 않다. 이 역할을 대행한 것이 일본의 군대였다.
일본 등의 후발산업국의 근대화 초기과정에서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단순히 치안 유지와 내란 방지라는 군사적 성격 이상의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천황을 중심으로 근대적 '국민' 만들기 과정에서 단일의 교육기관으로서 군대가 다수 동원되었다. 군대는 천황제 국가의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군대가 사회를 천황 중심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대행한 것이다. 또한 근대적 노동 규율을 단기간에 매우 효율적으로 그리고 강제로 신체화시키는 역할을 일본의 군대가 대행했다. 그리고 천황 중심의 사회동원 시스템의 연결고리로 군대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군대는 해체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군대가 지녔던 정신주의적 전통은 자위대에 그리고 일본의 기업 사회에 아주 강하게 계승되었다. '군대 아닌 군대'인 자위대에서 최근 연간 100명의 자살자가 발생하는 것 또한 이런 정신주의적 토양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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