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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에서 울리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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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에서 울리는 소리

[창비주간논평] '역주행'으로 저무는 2008년

달력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돌아보니, 이명박정부가 출범한 지는 아홉달이 지났고 미국발 금융위기에 세계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한 지는 석달이 다 돼간다. 우리 국민들의 삶에 절대적 규정력을 발휘하는 국내외의 이 두 변수들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인지, 또는 후자의 부정적 영향이 워낙 막강한 것이어서인지 2008년을 마감하는 우리의 심정은 전에 없이 암울하고 막막하다.

10년전 이 나라를 강타했던 외환위기와 실업대란의 악몽이 엄습하는 것은 범인들로서는 자연스런 반응인데, 보기에 따라서는 이번 위기가 훨씬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오늘 세계를 사로잡은 위기는 그 크기와 성격을 가늠하기 힘들고, 어쩌면 그것이 가장 두려운 점이다. 지금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는 것은 분명한데, 태풍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인지 이미 태풍권 안에 들어섰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시적으로 저기압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경우 레이건정부 이래의 과도한 방임주의, 즉 시장만능주의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는 설명은 부분적인 궤도수정을 통해 자국 중심의 세계자본주의가 다시 활력을 되찾으리라는 낙관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오바마 새 정부의 면목이 하나둘 드러나는 것을 보면 미국의 반성이 적어도 지난 30년에 대해서가 아니라(지난 100년에 대해서가 아님은 물론이고) 단지 지난 8년에 대해서뿐이라는 인상이어서, 미국을 움직이는 실력자들, 즉 미국의 대다수 중산층을 소비신화의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있는 방향전환은 여전히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

근본적 성찰의 필요성과 한국사회의 역주행

반면에 이번 위기가 20세기를 떠받치던 미국 패권의 쇠퇴의 징후라고 한다면, 그것은 세계질서의 지정학적 재편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10여년 전의 저서들(《유토피스틱스》 《이행의 시대》 등)에서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미래학자의 어조에 실어 묘사했던 '세계체제의 궤적, 1945∼2025'에서 지구현실이 또 하나의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일 게다.

아마 좀더 근본주의적인 관점은 오늘의 경제위기에서 인류의 산업문명 전체가 파탄의 나락을 향해 한걸음 더 내려가고 있다는 증거를 읽는 것이다. 기후변화, 식량의 불균형과 자연자원의 고갈, 환경파괴, 인구과잉 등 수많은 묵시록적 지표들은 그와같은 비관론이 결코 단순한 신경과민이 아님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전쟁, 기아, 질병 등 대규모적 재난을 통해 그 나름으로 자기조절을 수행했던 악마적 과거는 어떤 점에서 우리의 '오래된 미래'인 것이다.

생각건대 여러 장·단기적 이념적 전망과 결부된 현실적 입장들의 차이는 물론 이처럼 단순 간명하게 정리될 수 없는 복합적 맥락 위에 서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위기에 ― 세계적인 것이든 지역적인 것이든 ― 옳게 대응하는 길을 찾으려면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학자와 시민운동가와 직업정치가의 구별을 넘어서는 통찰과 지혜가 요구된다 할 것이다.

그런데 시선을 나라 안으로 돌리면 우리의 사고는 순식간에 합리적 차원을 잃고 즉물적 혼돈과 사적 이해관계의 덫에 걸리고 마는 듯하다. 언필칭 우리가 민주화와 산업화를 아울러 달성했다 자랑하고 국내총생산이 세계 10위권에 가까웠다 자부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실로 유례없이 기적 같은 성취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 모든 성취가 대관절 무슨 뜻이 있는가를 되묻게 만드는 반현실(反現實) 또한 엄연히 실재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이명박정권의 탄생은 분단극복과 민주주의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국민적 공력과 희생의 결집이 진행되는 동안 거의 동일한 강도의 반작용이 우리 사회 내부에 축적되어왔음을 짐작게 하는 시대의 역사(役事)이다.

'광장'과 '난쏘공'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

이런 이야기 끝에 최근 있었던 문단행사를 화제로 삼는 것은 견강부회에 가깝다. 널리 보도되었듯이 지난 11월 21일 소설가 최인훈(崔仁勳)의 등단 50년을 한해 앞두고 신판 《최인훈전집》 15권 발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열렸고, 그보다 1주일 앞서 대산문화재단 주최로 '난쏘공 30주년 기념 낭독회 및 기념문집 《침묵과 사랑》 헌정식'이 있었다.

그래서 새삼 언론의 조명을 받은 두 작품, 최인훈의 《광장》과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설명의 필요가 없는 고전이고 여전히 새 독자를 만나는 문제작이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작품 자체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교롭게도 또는 불행하게도 그 작품들이 그려낸 '심연의 소리'는 오늘 더 침통하게 울린다는 것을 상기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광장》은 문학적 고향이다. 1959년 10월호에서 함석헌(咸錫憲) 선생의 글 〈때는 다가오고 있다〉를 읽고 감동하여 매달 구독한 잡지 《새벽》에서 이 작품을 발견하고 얼마나 흥분하고 심취했던지! 미수록 200장을 보태어 단행본으로 출간된 정향사판(正向社版) 《광장》도 얼마나 아꼈던지! 그후의 개작들을 건너뛰고 최신판 《광장》을 새로 구입해서 읽는 중인데, 수십년 만에 찾은 옛거리를 걷는 듯한 생소함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최근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4·19가 열어준 그 시대가 작품을 만들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과연 이 작품에는 분단된 남북의 현실에 대한 주인공의 통렬한 비판이 개진되고 있는데, 작가는 그러한 비판적 안목도 4·19의 영감에 의해 촉발된 것이고 그러한 비판적 언설의 활자화도 4·19를 통해 획득한 자유 때문에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광장》은 분단과 4·19, 즉 억압과 자유의 변증법을 체현한다.

'난쏘공'은 소위 압축적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강행되던 1970년대 한국 현실의 최고의 문학적 증언이다. 그 시대의 뼈아픈 낱말들 ― 도시빈민, 재개발, 철거, 취업, 실직, 노조 등 ― 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강력한 현실성을 발휘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쏘공'은 비참한 현실에서 태어났으되 비참한 문학은 아니다. 거기에는, 비록 박살나기는 했으나, 동화처럼 아름답고 꿈결처럼 행복한 난장이들의 소망이 새겨져 있다.

이번 낭독회에서 작가는 자기 작품이 이렇게 오래도록 읽힐 줄 상상하지 못했고, '난쏘공'이 더이상 읽히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님의 침묵》의 시인도 자기 시가 후손들에게까지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광장》도 '난쏘공'도 현실에 의해 추월될 때에만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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