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가 변화 보다는 안정과 '현실'에 초점을 둔 인물들을 선택하자 앞으로 오바마 행정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를 믿으며 지켜보자는 의견이 우세하나, 이른바 '비판적 지지론'과 '독자노선론'의 미국판 논쟁이 선거가 끝나면서 불이 붙은 모습이다.
"오바마 안보팀은 제국의 수호자"
미 진보주의자들은 오바마가 '뼈속까지 월가맨'인 티모시 가이트너를 재무장관에, 그의 스승격인 로런스 서머스를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으로 내정하자 부은 얼굴이다. 금융시장 규제와 중산층·서민 경제 활성화 등 오바마의 '변화'에 어울리지 않는 진용이란 것이다.
하지만 진보파들은 민주당 우파 혹은 중도파, 중도우파로 분류되는 인물들로 채워진 외교안보팀에 더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제임스 조이스 국가안보보좌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대표적인 불만 대상이다.
진보적 온라인 저널 '톰 디스패치'를 운영하는 톰 엥겔하트는 26일 시사주간 <네이션>에서 오바마 안보팀을 '제국의 수호자'라고 부르며 반전운동가들이 왜 그들을 거부하는지를 조목조목 따졌다.
국무장관이 확실시되는 힐러리는 이라크전 찬성 이력은 물론이고 민주당 경선 당시 "이란을 지도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등 매파적인 중동정책을 추구할 것이라는 게 문제다. 엥겔하트는 힐러리의 국무장관 내정이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공화당)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 민주당 좌파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국가안보보좌관 지명이 확실시되는 제임스 존스 전 나토 사령관도 '겉으로는' 중도파라고 규정되지만 존 매케인 전 공화당 대선후보 등 호전적인 인사들과 가깝다는 점이 지적된다.
공화당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이 된 뒤 민주당 행정부에서 유임되는 최초의 국방장관이 되는 로버츠 게이츠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다. 오바마 당선인과 달리 이라크 철군에 시한을 못박는 것에 반대하고, 부시 행정부에서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국방예산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 등이 기피 이유다. 이미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이 '심어' 놓고 간 강경파들에 둘러싸인 그가 유임되면 국방정책의 변화는 요원하다는 것도 문제다.
엥겔하트는 이 외에도 △클린턴 행정부 시절 중도파들이 만든 신미국안보센터(CNSA)가 '경험'을 무기로 오바마 외교안보팀 구성에 개입한 점 △유임이 확정적인 마이클 멀린 합참의장,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중부군 사령관 등 군부 고위층이 이라크 철군 시한 설정에 반대하고 아프가니스탄 증파를 강하게 주장한다는 점 등을 제기했다.
▲ 진보진영의 볼멘 소리에 말을 아끼던 오바마는 26일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인선 발표에서 자신의 입장을 강력히 옹호했다. ⓒ로이터=뉴시스 |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오바마의 당선에 환호했던 반전운동과 평화주의 진영에서는 즉각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뉴어메리카재단의 스티븐 클레몬스는 최근 외교정책 웹사이트인 '워싱턴 노트'에서 "충격이 그들(반전운동가들)을 순간적으로 마비시켰다"라며 "우리는 '오바마 거품' 안에 있다"라고 말했다.
저명한 진보 인사이자 반전운동가인 톰 헤이든은 "오바마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중도파들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과거에 의한 통치다"라고 비판했다고 <보스턴글로브>가 27일 전했다. 클린턴 시대의 인물들이 중용된 것을 꼬집은 것이다.
진보파 블로거인 글렌 그린월트도 최근 온라인 저널 <살롱>에 실은 글에서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전쟁을 찬성한 사람들을 내각과 보좌관에 앉힌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냐"고 따져 물었다.
반전운동 단체 '코드 핑크'의 창립자인 조디 에반스는 "힐러리 대신 오바마를 선택한 건 외교정책 때문이었는데 오바마는 민중들의 위임을 저버렸다"며 "특히 이란 사람들은 자기네 정부와 직접 대화를 하겠다는 오바마가 힐러리를 외교 수장으로 임명하는데 대해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고 <폴리티코>가 전했다.
오바마 "변화와 경험 조화시켜야…나를 믿으라"
오바마는 그간 가급적 말을 아껴왔다. 그러나 26일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인선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신을 지지했던 진보주의자들의 비판을 인식한 듯 초기 인선을 강력히 옹호했다고 <보스턴글로브>는 전했다.
오바마 당선자는 만약 새 내각이 모두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진다면 전쟁과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잘못된 신호를 주는 것이라며, 베테랑들이 지혜와 노하우를 전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특히 "우리는 경험과 새로운 사고를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그러나 나는 변화의 비전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서 온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라고 강조했다. 자기를 믿어달란 것이다.
오바마는 클린턴 사단을 '재활용'하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단지 과거 민주당 행정부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최고의 인물들을 제쳐둘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건 비현실적이라고 덧붙였다.
"오바마는 대통령직을 1초도 수행 안 했다"
오바마의 설득이 통한 것일까.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27일 즉각적인 반발이 일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반전운동 지도층과 온건 진보파들은 일단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오바마가 경제위기라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외교안보팀의 급격한 인적 쇄신보다는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당파성을 탈피한 인선을 했지만 이라크 전쟁 종료, 적국과의 직접 대화, 미국의 위상 제고 등 핵심 원칙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미 하원 진보코커스 의장을 맡고 있는 민주당의 린 울시 의원은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는 자신이 '변화'를 내걸어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서 "누가 오바마를 보좌하는지에 관계없이 그는 비군사적 힘으로 외교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울시 의원은 평화운동 진영의 다른 인사들도 "믿을 수 있는 리더가 생긴다는 점에 안도하고" 비판을 보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없이 승리를'이란 반전단체를 이끌고 있는 톰 앤드류스도 "오바마는 아직 대통령직을 1초도 수행하지 않았다"라며 그가 취임할 때까지는 비판을 자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폴리티코>는 오바마가 중앙정치 무대에 뛰어들기 전부터 그를 알았던 진보파 인사들은 그가 초심을 잃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스턴 글로브>도 민주당 좌파들 내에서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더 크다고 전했다. 버지니아대 래리 새바토 정치학 교수는 "전체 외교안보팀이 어떤 정체성을 띨지 기다려야 한다"며 성급한 결론을 경고했다.
새바토 교수는 오바마의 인선에 당황한 진보주의자들(liberals)은 오바마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며 "오바마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실용주의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슈퍼진보주의자(superliberal)가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폴리티코>는 진보진영 내부에서 이런 우세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비판의 목소리는 주변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 오바마 당선의 견인차가 된 진보진영은 이제 고민에 빠져 있다. ⓒ로이터=뉴시스 |
한편에서는 진보파들 내부의 이같은 공방에는 오바마에 대한 오해가 깔려있다는 지적도 있다. 오바마는 원래부터 이라크전에 반대하면서도 알카에다에 대한 군사력 사용에는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바마를 '일관된 지도자'로 만들었던 2002년 시카고 반전연설 당시 그 집회를 주최했던 매릴린 카츠는 "오바마는 반전운동 단체들과 다른 입장이었다. 그는 우리가 아니다"고 말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카츠는 이어 "많은 이들이 이라크전에 대한 오바마의 태도에 자신들의 '정치'를 투영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하지만 그것은 단 한 번도 진실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화의 요구를 바탕으로 당선된 만큼 오바마는 대외정책은 물론 모든 분야에서 미국 내 진보개혁 세력의 기대와 우려, 비판적 지지와 비난을 끊임없이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 내에서도 오바마와의 관계 설정을 두고 쉼 없는 논쟁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매릴린 카츠는 평화운동도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야 한다며 "(부시 행정부 8년 동안) 모든 것을 반대하며 성장한 이들에게 진정한 도전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츠는 "진보적 분위기가 확대된 환경에서 우린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독립적인 엔지오로 남을 것인가? '불평의 문화'(culture of complaint)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기반을 두고 이슈에 천착하는 사회적 인프라가 될 것인가?"라고 자문했다.
<폴리티코>는 내년 1월 1일부터 19일까지 시카고 하이드파크에서 열릴 연합 집회에서 진보진영이 고민을 풀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국내외 정책에서 진보적 이슈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이 집회의 주최측은 '시위'(protest)라는 말을 쓰지 않음으로써 오바마와의 관계 설정에 여전히 혼란을 느끼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주최측은 집회 취지를 설명하는 성명에서 "우리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고 그가 선거 운동에서 제시했던 진보적인 정책을 실천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모인다"라며 "오바마의 취임이 미국에서 오랜 기간 요구됐던 진보적인 변화를 이끄는 신호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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