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개로왕을 위하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개로왕을 위하여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38> 개로왕을 위한 만사(輓詞)

제 13 장. 개로왕을 위한 만사(輓詞)

들어가는 글 : 개로왕을 위하여


『삼국사기』「열전」에는 특이하게도 도미설화(都彌說話)가 있습니다. 도미는 현재의 서울 부근 벽촌 평민이었는데 그 아내는 아름답고 행실이 곧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개루왕이 이 이야기를 듣자 도미를 불러 "여자란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혹하면 넘어가지 않을 수 없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도미는 자기 아내는 결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왕은 신하 한 사람을 왕으로 속여 도미의 아내에게 보냅니다. 도미의 아내는 자기 대신에 몸종을 시켜 왕을 대신 모시게 합니다. 뒤늦게 속은 사실을 안 개루왕은 화가 나서 도미의 두 눈알을 빼고 사람을 시켜 작은 배에 띄워 보냈지만 도미는 다시 아내를 만나 고구려로 피신하여 살게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폭군의 이름이 개루왕(蓋婁王 : 128?~168?)이라고 하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개루왕 시기라고 하는 2세기경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죠(이 개루왕은 실존했던 왕으로 볼 수도 없지요). 그래서 대체로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도미설화의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개로왕은 장수왕이 보낸 첩자인 도림(道琳)이라는 승려의 꼬임에 빠져 바둑으로 세월을 탕진하다가, 도림의 강력한 권유로 한강(아리수)의 돌을 가져다가 선왕의 무덤을 새로이 만들고, 성곽을 새로이 수리하고 백성들의 가옥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현재의 금단산[숭산(崇山)]에서 풍납리[사성(蛇城)]에 이르는 긴 제방을 만들어 국가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은 파탄상태에 빠지게 됩니다(이 제방이 오늘날의 풍납토성이라고 합니다).

이에 도림은 백제를 탈출하고 장수왕은 군대를 몰아옵니다. 결국 7일만에 북성이 함락되고 이내 남성도 함락되어 개로왕은 고구려의 장수에게 잡히게 됩니다. 고구려 장수는 개로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 꾸짖으면서 개로왕을 현재의 아차산성 아래로 끌고가서 죽입니다(475). 이로써 백제는 멸망합니다. 왕성이 함락되고 왕의 가족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나라가 망한 것이지요. 앞서 본대로 백제는 열도를 중심으로 재건이 됩니다.

이상이 개로왕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최악의 군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물론 상당한 부분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로왕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군주에 대해 혹독한 것은 어느 경우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의자왕의 일대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백제(이른바 '한성백제') 멸망의 책임을 개로왕에게만 씌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로왕이 보낸 국서에서 "끊임없이 고구려의 핍박을 받은 지가 30여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개로왕이 등극하기 전부터 고구려의 거센 압박을 받아서 국력소모가 극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로왕의 실정(失政)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도 반드시 나쁘게만 볼 까닭이 없지요. 선왕의 무덤을 새로이 만들고, 성곽을 새로이 수리하고 백성들의 가옥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긴 제방을 만든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시기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단지 이 사실들만 가지고 개로왕을 폭군으로 보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 도미설화는 말 그대로 설화입니다.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개로왕은 백제의 가장 큰 문제인 왕권 강화정책을 적극 시행하고 대내적으로는 부마도위 여례(餘禮)와 같은 왕족과 장사(長史)·장위(張威)로 대표되는 중국계 관료들을 등용하여 친위 세력을 구축하고 대외적으로 강성해지는 고구려를 막기위해 안간힘을 다 씁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방의 호족들이나 귀족들과는 갈등이 있었을 수가 있습니다. 즉 날로 심화되는 국가위기 속에서 국가동원체제를 원활히 하려면 왕권을 강화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귀족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 사정을 보더라도 개로왕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입니다. 송나라(남조)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북위(북조)에 대해서도 많은 외교적인 노력을 합니다. 날로 강화되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백방으로 노력한 왕으로 보입니다. 개로왕은 북위에 군사적인 지원을 강력히 요청하였는데도 이에 응하지 않자, 이내 조공을 끊습니다.

▲ [그림 ①] 5세기의 대륙 정세

제가 보기에 개로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상당한 부분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도미설화에 대한 이야기나 도림의 꼬임에 빠져 국정을 망쳤다는 것은 다시 제대로 검정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반개로왕계의 귀족들이 임의로 유포한 일종의 마타도어(Matador : 흑색선전)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여사를 돌아본 결과, 개로왕은 날로 심각해지는 고구려의 강한 압박에 대비하여 열도의 강화에 많은 신경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개로왕은 등극하자마자 아드님인 곤지왕자(곤지왕)를 송나라로부터 좌현왕으로 관작을 받게한 후 '사실상 후계자'로 만들어 열도(일본)로 보냅니다. 이 때가 461년입니다. 그러니까 개로왕이 등극한지 6년쯤 된 해입니다. 따라서 개로왕은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완료하여 자기의 분신을 일본으로 보낸 것입니다.

만약에 이 같은 판단이 없었다면 아마 백제(반도부여)는 475년으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열도에 의해 백제는 다시 소생하는데 이 열도가 강력한 백제의 배후세력이 되게한 것이 바로 개로왕이라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제 곧 보시겠지만, 개로왕은 현재 일본 천황가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의 할아버지가 바로 개로왕이기 때문입니다. 게이타이 천황은 현 천황가의 개조(開祖)가 아닙니까?

게이타이 천황은 열도 북방의 호족 세력들을 제압하고 야마토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천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이타이 천황의 치세(治世)로 인하여 일본의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성립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야마토는 나라(奈良) 주변의 일부 영역을 지배한 수준이었는데 게이타이 천황으로 인하여 야마토의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게이타이 천황 이후의 기록들은 다른 사료들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고 기록의 신뢰도가 높아 게이타이 천황은 현재의 일본 천황가와의 혈연이 확인가능한 최고(最古)의 천황이라고 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