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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를 바라보는 오바마, 그 성과와 한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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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를 바라보는 오바마, 그 성과와 한계는?

[김민웅 칼럼]<25> 위기의 시대, 새로운 지도력과 그 선택

1920년대의 풍요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쿨리지와 후버 대통령의 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의 번영은 확고해보였다. 1920년대의 풍요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경쟁자 유럽을 따돌리고 자본주의의 대본영으로 우뚝 서는 역사를 이루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1927년, 미국 도처에서 아파트 건설이 한참이었고 도심에는 건물을 세우기만 하면 사무실이 꽉꽉 들어찼다. 부동산은 이제 투자를 넘어 투기의 최적 지대가 되고 있었다. 뉴욕시내 최고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이후 세계 최고층 건물이 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그 자리에 짓기 위해 해체작업 중이었다. 세계를 압도하는 제국의 위용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자신이 넘치는 미국이었다. 뉴욕 주의 별칭은 그렇지 않아도 <제국의 주(Empire State)>라는 것을 새삼 떠올려도 난데없지 않았다.

덩치가 크고 고가품에 해당한 라디오는 135 달러 정도였는데 이 정도를 구비해야 잘 나가는 중산층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문보다 빨리 알게 되는 시대가 온 것이었다. 생활은 윤택해져갔다.

거대한 황소의 장

주식시장이 뜨거워지면서 은행 대출을 얻어서라도 사람들은 주식투자에 열을 올렸다. 이른바 주식을 사기만 하면 잘 나가는 "거대한 황소 장"이었다. 황소가 언덕 위로 거침없이 진격해가는 형국이었으니, 주식시장의 침체를 예고하는 산에서 내려오는 "곰"은 얼씬 거리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여유가 생긴 사람들은 선 텐에 열광했다. 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태양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이 부의 상징이 된 것이었다. 부의 추구가 자기과시 현상임을 주목한 베블렌의 <유한(有閑)계급이론(1899년)>이 나온 지 20여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미국은 어느새 누구나 유한계급이 될 수 있다는 욕망에 차 있었다. 골프 또한 더 이상 특권층이나 부자들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1929년 9월 3일, 그래서 그날도 다를 바 없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는 날이 오고야 만 것이었다. 정점을 향해 치닫던 증시는 졸지에 무너졌고 폭락한 주식을 들고 사람들은 울부짖기 시작했다. 패닉 상태였다. 왜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소문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더 이상 주가가 떨어지기 전에 주식시장이 강제 폐쇄된다더라, 군대가 동원돼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더라,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연이어 투신자살을 하고 있다더라, 등등. 어제의 연속이 분명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곰이 산에서 성큼 성큼 내려와 한참 열을 올리던 황소를 매섭게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금융시장은 바짝 긴장했고, 금융계의 대부 J. P.모건의 집에 내셔널 시티 뱅크, 체이스 내셔널, 게런티 트러스트 등 거대 은행 총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월가의 신들"의 집결이었다. 금융시장이 단합해서 상황을 신속하게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에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신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월가의 판테온 신전은 아직 안전하다고 믿었다.

월가의 판테온 신전, 그 혼란

그러나 그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은행 도산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돈을 빼가기 위해 이리 저리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멀쩡한 은행도 망할 판이었다. 급기야 "은행 휴일제"가 선포되고 은행거래가 일시에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그것은 금융시장의 미래에 더더욱 깊은 불안감을 확산시킬 뿐이었다.

한편,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한 타격을 받은 것은 농업이었다. 존 스타인 벡의 작품 <분노의 포도>는 서부의 농민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과 농토를 잃고 유랑해야 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가 표현했듯이 오클라호마의 하늘과 땅은 날이 갈수록 창백해져갔던 것이다. 사과는 팔리지 않았다. 하필 풍작이었다. 실업자들이 거리에서 사과 한 알을 5센트에 파는 모습은 이 시대의 애절한 정경이 되었다. 가난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두에게 몰아닥친 검은 폭풍이었다.

1923년 쿨리지로부터 시작되어 절정에 이르렀던 후버까지의 시대, 이 이상의 번영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던 1920년대의 풍요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던 후버, 하딩과 쿨리지 대통령 밑에서 7년간이나 연속으로 재무장관을 지냈고 치밀한 경제전문가이자 전문 관료의 시대를 열기도 했던 그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1929년의 충격은 좀체 진정되지 못했다.

1932년 대선에서 현직에 있으면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후버는 상대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대패한다. 전체 투표로는 2천2백8만 표 대 1천 5백7십5만 표였고, 선거인단으로는 루즈벨트가 472명, 후버가 59명. 1929년, 40개 주를 석권해서 대통령이 되었던 후버가 4년 뒤 루즈벨트와의 선거전에서는 겨우 4개주에서 승리했을 뿐이었다. 루즈벨트는 압승이었다.

분노의 포도, 그리고 장미의 화원

미국은 새로운 지도자와 해법을 선택했다. 위기의 시대에 등장한 루즈벨트, 그는 긴 파이프 담배를 물고 얼굴 가득 미소를 담았다. 이제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우울한 시대를 이기는 환한 미소가 될 수 있을까? 루즈벨트는 어원으로 풀면 "로우즈 필드(Rose Field)", 그러니까 "장미화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미국은 1920년대 말과 초의 악몽을 벗고 과연 장밋빛 미래를 기대해도 좋은 것이었을까?

루즈벨트가 1933년 3월 12일, 취임 직후 맨 처음 나선 노변담화(fireside chats) 라디오 방송은 미국 전역의 관심을 모았다. 대통령의 육성을 친근하게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은 파산과 가난으로 상처받고 힘겨워 하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그 자체로서 우선 위로가 되었다. 그의 첫 방송 내용은 정부를 믿고 은행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대적인 인출사태가 벌어지면서 금융시장의 교란이 확산되는 것을 우선 막으려는 루즈벨트의 호소는 들어 먹혔다. 미국 자본주의의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래, 경제는 역시 신뢰의 문제야."

그러나 신뢰의 문제가 치유책 자체는 아니었다. 구조적 관성을 뜯어고치는 일 없는 신뢰만으로는 더욱 큰 불만을 키울 뿐이었다.

마술사에서 범죄자로

루즈벨트는 미국 경제가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 그 원인부터 따지기 시작했다. 대중들의 가장 분노에 찬 비난은 월가의 금융인들을 향했다. 1929년 9월 이전에 이들은 "부의 마술사"들이었다. 그러나 9월 이후 이들은 금융위기를 가져온 책임의 진원지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오즈의 마법사처럼, 이들 월가의 마술사는 대중의 눈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젖혀지면서 그간 알지 못했던 적나라한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J. P. 모건의 동업자 20여명에 달하는 금융인들이 엄청난 수입을 누리면서도 단 돈 1페니도 세금을 내지 않은 사실이 의회의 조사를 통해 들통이 났다. 은행은 정부의 통제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해졌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관리는 시대적 요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상원은 한 사람의 반대도 없는 채로 지체 없이 연방 준비은행의 감독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은행인출 사태를 대비해서 기구를 꾸리기 시작했다. 시장이 알아서 하라는 후버 대통령 시절의 논리는 파산하고 있었다. 거대한 독점자본의 투기와 전횡을 막으라는 대중들의 빗발치는 목소리를 더는 외면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대자본들은 반독점(anti-trust)법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예견하고 타협적 태도로 나오고 있었다. 새로운 루즈벨트 정부와 경제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안전망을 확보하는 전략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일정하게 인정하는 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진보파 상원의원 와그너는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와 투자지원을 기업들에게 선물로 내주는 대신 노조의 단체협약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라고 강조했다. 루즈벨트라는 이름에 늘 따라붙는 <뉴 딜>의 기본 골격이 태어난 것이다. 자본은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로 자금회전을 보장받고, 이와 동시에 노동자들을 함부로 해고하거나 이들의 권리를 짓밟을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정부가 최저임금제의 기준을 정하고 주당 노동시간을 40시간 이하로 줄일 수 있는 권한까지 발동할 수 있게 되는 기존질서의 진보적 개혁과정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이 시기, 월가의 보수적 반격은 생각보다 약했고 연방정부에 대한 기대는 급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루즈벨트로서는 개혁조처를 힘껏 밀어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기득권의 저항도 한계가 있었고, 대선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루즈벨트에게 속도감 있는 정책추진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NRA의 등장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 농민들의 처지를 보호해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대출금을 제 때에 갚지 못해 집을 차압당하고 농토를 버리고 떠나는 농민들에게 차압중지와 부채청산의 단계적 구제정책을 마련해야 했다. 부동산 투기 거품이 꺼진 이후 도시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주택융자 대출자들에 대한 새로운 대출지원책도 이루어졌다. 대대적인 공공사업의 대표적 본보기인 테네시 계곡 개발계획도 취임 두 달 만인 1933년 5월 공포되었다. 그 다음 달인 6월에는 <전국 산업 복구 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이 통과되었고 이로써 루즈벨트의 뉴딜 철학이 구체화된 <전국 경제회복 기구(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가 본격 가동되었다.

NRA의 존재는 독점 대자본이 주도해온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무책임과 공공성의 파괴를 극복하려는 나름의 시도였다. 농민들은 팔리지 않게 된 농산물로 입은 피해를 정부로부터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실업자들이 실업기간 동안 사회복지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지역적으로 경제회복을 위한 경제계획 프로그램이 인정되었다. 기존의 자유방임 체제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출금 미납자에 대한 구제책과 함께 주택차압중지, 대대적인 공공사업 전개, 소규모 은행 준비금에 대한 연방정부의 보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월가에 대한 연방정부의 감독과 규제 강화라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사회안전망의 구축은 이후 미국의 사회복지 시스템의 기초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루즈벨트 집권 100일 내에 그 뼈대가 세워지고 추진력을 얻게 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득권 세력의 반격과 미국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구조적 모순은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점차 무력화시키게 된다. 전국 경제회복 기구 NRA는 1935년 위헌결정이 내려지면서 해체되었다. 정부의 시장개입 수준에 대한 거대자본의 반격이 성공한 것이었다. 이는 또한 노동자들의 권리보호 장치를 해체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대대적인 재정지출을 통한 테네시 계곡 개발 사업은 금융시장의 투기적 운동을 압도하면서 소비시장을 구축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 내는데 실패했다. 대대적인 정부의 투자는 자본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는 성공하지만, 최저임금수준을 제약하고 있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한 소비시장의 생동감 넘치는 확대재생산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뉴딜과 제2차 대전

대공황이 일어난 지 10년째 되는 1939년, 루즈벨트는 중대결정을 내린다. 다름 아닌 2차 대전 참전이었다. 재선의 과정에서 유럽의 전쟁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루즈벨트는 전쟁경제의 가동이야 말로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회생에 결정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간파한다. 루즈벨트는 뉴딜 단독으로만 경제회복을 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절감하는 가운데 "케인즈의 군사주의적 적용"을 통해 대대적인 자본축적 과정을 만들어 낸다. 종국적으로는 뉴딜이 아니라 전쟁이 미국 자본주의를 살려낸 것이었다. 이미 강화된 정부의 경제주도권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군사경제가 축이 된 냉전형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과 유지는 이를테면 루즈벨트의 유산이었다. 그리고 그 유산은 오늘날 부시 체제에서도 여전히 작동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루즈벨트는 첫째, 대공황의 위기에서 정부가 대자본의 독점체제를 압박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진보적 정책에 일부 성공한다. 둘째, 시장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와 감독규제 강화로 시장의 안정적 신뢰를 구축하는데 나름의 성과를 보인다. 셋째, 그러나 일정단계에서 기력을 회복한 거대독점 자본의 반격을 처리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의한 이윤율 하락의 문제를 결국 전쟁경제 확대로 해결해버린다.

오바마가 인수하는 미국

그렇다면, 오늘날 오바마는 어떤 현실과 마주해 있는가? 루즈벨트의 뉴딜 체제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등장한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기적 돌파구였다. 남북전쟁이 끝난 1870년 대 이후 급격한 양적 성장을 이룬 미국 자본주의 체제는 1920년대에 정점에 이르다가 위기에 직면하자, 생존의 활로를 세계대전에서 발견한다. 이 과정에서 여력이 생긴 미국 자본주의는 사회복지체제의 일정수준 구축과 함께 전쟁경제의 영구적 체제화를 경험하게 된다. 한편, 2차 대전 이후 미국 경제는 거대한 달러체제의 주도권과 결합하면서 투기적 금융시장에 대한 연방정부의 규제가 급속하게 해체되는 시기로 이행한다. 결국 "미국적 복지체제", "전쟁경제", "투기적 금융시장" 이 세 가지가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축이 되어 각기 그 위상이 시기별로 변화한 것이다. 오바마가 인수하게 된 미국은 전쟁과 투기가 지배하면서 복지는 무너져가고 있는 미국이다.

오바마가 직면한 현실은 물론 1929년 대공황기와는 다르다. 그러나 또한 유사한 바가 많다. 그래서 그가 내놓고 있는 정책의 기조는 루즈벨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시장을 규제하며 복지체제를 복구, 확대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전쟁을 종식시키고 중동원유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여 녹색 에너지 개발로 미국의 세계정책 자체의 기본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 대해 미국은 열광하고 있다.

이것은 성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또다시 거대한 제국의 폭력과 횡포로 신음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오바마는 매우 지적이며, 확신에 찬 사나이이자 새로운 변화에 대한 의지가 강렬하다. 그러나 루즈벨트가 종국적으로 그랬듯이 그는 자칫,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관성인 전쟁경제에 의존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건 루즈벨트로부터 잘못 배우게 되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막아내면서 자본과 전쟁의 고리를 끊고 복지를 지향하는 정의로운 정치경제적 질서를 만드는 것은 오바마 시대의 숙제다. 앞으로 취임 100일을 통해 그가 보여줄 미래의 청사진은 이로써 평가될 것이다. 지구촌의 21세기, 그 진정한 시작은 그렇게 오지 않겠는가?

*[시사 인]과 공동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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