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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왕과 왜 5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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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왕과 왜 5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36〉 곤지왕이 유라쿠 천황인 까닭 ②

(1) 곤지왕과 왜 5왕

일본고대사의 가장 큰 쟁점들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왜 5왕에 관한 것입니다. 즉 『송서』「왜국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송나라로 사신을 파견하고 관작(官爵)을 받은 다섯 명의 왜왕들 즉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라는 휘(임금의 이름)를 가진 다섯 사람의 왜왕(倭王)이 순서대로 나오는데 이들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일본 고대사를 밝히는 중요한 고리입니다. 일본의 역사에서 워낙 중요한 부분입니다.

열도(일본) 사학계에서는 5세기의 일본 역사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 왜 5왕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왜왕들이 『고사기』·『일본서기』의 어느 천황에 해당되는가 하는 것은 에도(江戶)시대 이래 계속 검토되어 온 문제입니다. 열도의 초기의 주요 사학자들의 견해를 먼저 살펴봅시다.

▲ [표 ①] 왜 5왕의 정체[최재석『일본고대사연구비판』(1990) 182쪽 재구성]

즉 쓰다 소기치(津田左右吉)는 왜 5왕이 임나일본부의 지배자로 보고 있고,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나 오다 료(太田亮)는 왜 5왕이 야마토 왜의 지배자로 보고 있고, 이께우찌 히로시(池內宏)는 임나의 지배자들이 천황을 사칭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대체로 이들을 야마토의 천황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일본 학계에서 대세를 차지하는 견해에 따르면 왜의 5왕을 오우진(應神)·닌도쿠(仁德)부터 유라쿠(雄略)에 이르는 천황들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 의문점은 있어도 총괄적으로 보아 절대 연대·혈연관계·왕명(王名)이라는 세 가지 면에서 왜의 5왕과 기(記)·기(紀)에 보이는 천황들은 대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1)

그런데 『송서』「왜국전」에는 왜 5왕 가운데 마지막 왕인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國書)가 있습니다. 상당한 명문으로 알려진 이 국서는 기록상으로 나타난 일본인이 쓴 가장 오래된 문장이라고 합니다. 이 국서에서 왜왕 무(武)는 자신의 선조에 대한 회고로부터 시작하여 선조들이 수많은 정복활동을 통하여 일본을 정벌해 나갔다는 사실, 자신의 부형의 이야기 즉 송나라와의 교섭을 방해하는 고구려에 대한 규탄과 자신의 부형이 고구려를 정벌하려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고구려가 무도하여 변예(邊隷 : 백제로 추정)를 노략질하고 … 신의 부왕께서 백만의 대군을 몰아 이들을 토벌하려하였으나 갑자기 부모님과 형님의 상을 당하여 긴 세월을 상중(喪中)에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478년)에 이르러 때가 되어 다시 병갑(兵甲)을 가다듬고 부형의 유지에 따라 적의 강토를 무찌르겠습니다."12)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이 글을 쓴 왜왕 무(武)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단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한성백제의 함락과 개로왕의 서거(475)와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바로 이 시기에 백제(반도부여)와 일본(열도부여)를 통틀어 왕족들이 대거 사망한 사건은 이 사건으로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13)

그리고 더욱 이상한 점은 이 국서가 이전에 백제의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북위에 보낸 국서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찌다기요시(內田淸) 교수는 이 상표문의 작성자가 백제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국서가 비슷한 용어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공통적으로 사용된 어구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찌다기요시교수는 한성백제의 함락(475) 이후 개로왕 때 북위에 보낸 국서를 작성한 백제인이 왜왕 무(武)에 기용되어 다시 478년 왜국의 국서를 작성을 했다는 것입니다.14)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이 두 국서 즉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상표문 :『魏書』「百濟傳」)과 왜왕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상표문 :『宋書』「倭國傳」)은 첫째 중국의 고전(古典)을 다수 인용 하고 있다는 점, 둘째 기본적인 구조가 동일하다는 점, 셋째 고구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있으며, 넷째 고구려를 정벌할 계획이니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한다는 점, 다섯째 이 두 문서의 작성 시기가 매우 비슷하다는 점 등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이 두 국서를 살펴봅시다.

먼저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를 봅시다. 이 국서의 구조를 살펴본다면, 먼저 선조들의 과거의 영광과 업적을 기리고 있고 다음으로는 현재의 상황이 매우 어려운데 그 원인은 고구려 때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더욱 충성스러운 신하로 남고 싶은데 고구려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군사적으로 도움을 고대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15) 여기서 특기할만한 사항으로는 근구수왕의 휘(諱)가 수(須)이며 그가 고구려의 고국원왕인 쇠(釗)를 참수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구려 백제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된 대목으로 보고 있지요.

그 후 고구려는 국력을 회복하여 영락대제(광개토대왕) 때 반도부여(백제)는 궤멸상태에 빠졌고 백제는 "사실상 멸망기"에 접어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일본으로 밀려갑니다. 장수왕은 평양천도(427)를 단행하여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백제의 해상 교통로를 차단함으로써 백제는 중국으로 가는 길이 묶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고구려와 대치하던 북연(北燕)이 멸망(436)하자 고구려는 더욱 강성하게 됩니다. 이 같은 고구려의 압박에 대응하기엔 백제는 역부족으로 극심한 국력소모현상이 나타나 개로왕[부여경(扶餘慶)]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재물이 다하고 힘도 다하여 나라가 저절로 쇠약해지고 있다."라고 호소합니다. 결국 475년 장수왕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도를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 돌아갔습니다.

다음으로 왜왕 무(武)의 국서를 살펴봅시다. 이 국서도 역시 선조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변예(邊隸) 즉 백제를 노략질하여 중국으로 가는 길을 막으면서 그 아버지와 형님인 제(濟)와 흥(興)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고구려가 백제의 바닷길을 막으니 이에 대항하여 왜가 분노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위에서 이미 보았듯이 왜왕 무(武)는 특히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을 강하게 표출하면서, 왜왕 제(濟)의 시대에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濟)가 서거함에 따라 좌절되었으며 왜왕 무(武)는 다시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왜왕이 반도부여계(남부여계) 라는 의심을 가지게 하는 부분입니다.16)

생각해봅시다. 왜(倭)가 왜 고구려와 적대적이어야 합니까? 그리고 왜 일본이 고구려를 정벌해야 합니까?

당시의 거리 개념으로 본다면, 고구려는 일본 열도에서 보면 많이 떨어진 곳입니다. 특히 규슈지역도 아니고 야마토 지역은 더욱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강한 나라입니다. 굳이 적대할 이유가 없지요. 지리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고구려와 왜가 실질적인 적대관계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한 이후 부여계가 일본 열도에 고립된 상황에서 일본(열도부여, 열도쥬신)이 한반도의 정치세력과는 적대적이었지만, 과거 고구려 영역이었던 한반도 북부 또는 만주 지역의 왕조들과는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해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즉 열도가 백제와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으면 만주지역이나 한반도 북부 지역과 사이가 나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왜왕 무(武)가 보낸 국서에 "고구려는 무도하여 노략질을 되풀이하고 있으며, 왜가 송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송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하는 전략이라고 해야겠죠. 국서에는 송황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정벌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국은 고구려 노략질의 실질적인 피해자가 될 수는 없으므로 굳이 고구려를 정벌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조공을 위해서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말은 결국 핑계지요. 왜국의 입장에서는 송나라나 북위나 어느 나라나 조공을 하면 될 일이고, 고구려와 화친을 하게 되면 당시 중국의 지배자였던 북위로의 조공의 길이 훨씬 쉽게 열릴 수도 있는데 굳이 고구려와 원수를 지면서까지 머나먼 송나라에 조공을 하려했을까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왜왕 무(武)가 보낸 국서의 내용은 왜왕 무(武)가 반도 부여왕(백제왕)이거나 반도 부여왕의 직계 가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 [그림 ④] 왜5왕 시기의 대륙

더구나 『송서』「왜국전」에는 왜왕 무(武)가 고구려왕과 대등한 지위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합니다. 이 부분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죠. 왜냐하면 당시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강국인데 마치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에 맞서 황제를 칭하듯이 왜왕이 고구려왕과 대등한 지위를 자칭한다는 것은 고구려와 왜가 숙적의 관계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왜왕 제(濟)는 고구려에 대해 원수와 같이 분함을 참지 못하다가 갑자기 서거하였고 나아가 왜왕 무(武)는 그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고구려 정벌의 의지를 더욱 다지겠다고 맹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송나라의 군사력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도 아울러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왕이 (백제와 관련이 없다면) 고구려에 대해 이 같은 분기(憤氣)를 가질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왜왕이 고구려 정벌의지를 대를 이어나가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왜왕이 할 수 있는 말이나 태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왜왕 무(武)는 부여의 왕 즉 백제의 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 [그림 ⑤] 백제의 왕과 왕비의 모습(롯데민속박물관)

결국 이 두 국서(상표문)는 작성자가 동일하거나 아니면 동일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거나 동일한 가족관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독자적으로 군대 수만을 모으기는 했지만 고구려를 단독으로 대적하기 어렵다는 입장이 분명하고 한쪽에서는 북쪽의 북위에, 한쪽에서는 남쪽의 송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죠. 문맥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내용은 동일한 것 즉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북위(386~534)가 건국된 이후 고구려는 중원 방향으로 진출을 포기하고 한반도의 방향으로 반도부여(백제)를 줄기차게 압박합니다. 이에 위협을 크게 느낀 백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이를 막아보려하지만, 국력이 차이가 크게 나서 방어가 불가능한 상태가 바로 5세기 초중반까지의 반도부여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반도부여(백제) 조정은 강대국인 북위나 송나라의 군사적 지원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남조인 송나라와 북조인 북위가 서로 적대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도부여는 주관자를 달리해서 이 두 강대국에게 군사적 지원요청을 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즉 서로 적대적인 두 강대국인 A(북위), B(송) 두 나라가 있을 때, 백제는 고구려의 정벌을 위해 A(북위)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름을 왜로 바꾸어 B(송)의 지원을 요청했다는 말이지요.

이 두 국서 즉 개로왕의 북위 국서는 472년에 작성되었고, 왜왕 무의 상표문은 478년으로 작성되어 시간상의 차이는 불과 6년에 불과한데 당시의 교통 사정으로 보면 거의 연이어 작성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그러니까 북위가 거절한다는 국서를 받고 난 뒤, 상황이 악화되자 다시 바로 송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백제는 엄청난 국난을 당하여 멸망하고 왕은 고구려군의 손에 죽었습니다. 한성의 함락 이후 개로왕, 그 왕자들, 대비 등이 참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왜왕 무(武)가 개로왕의 혈족인 셈이죠. 정황적으로 봐서 이 왜왕 무(武)가 바로 곤지왕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475년~478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한반도와 열도에서 왕족들이 대거 사망한 사건은 반도부여(백제)의 멸망으로 개로왕의 혈족들이 몰살당한 사건 밖에 없으며17), 개로왕과 그 왕자의 서거에 대하여 부형의 서거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역사적 인물은 바로 곤지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곤지왕이 바로 왜왕 무(武)라고 한다면 그 곤지왕의 아드님인 무령왕은 역시 왜왕으로 등극하거나 아니면 한반도로 돌아가 백제를 부흥시켜야할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그럴 경우 왜왕(倭王)과 백제왕(百濟王 : 반도부여왕)을 겸할 수도 있게 되죠. 일부에서는 왜왕 무(武)를 무령왕으로 보기도 하지만 왜왕 무는 무령왕이 결코 될 수 없지요. 개로왕 서거 시기에 무령왕은 겨우 15세의 청소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왜왕 무는 왕으로서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왜왕 무(武)는 곤지왕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일본에서는 왜왕 무(武)가 제 21대 유락쿠(雄略) 천황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곤지왕이 바로 유라쿠 천황이 되는군요. 그러면 이제 도대체 한국과 일본의 역사는 어떻게 됩니까?

필자 주

(11) 井上秀雄, 『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 : 1973) 여기서 말하는 기(記)·기(紀) 즉 '記紀'는 『日本書紀』와 『古事記』를 말한다.
(12) "句驪無道, 圖欲見呑, 掠抄邊隷,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臣亡考濟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強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仮開府儀同三司, 其餘鹹各仮授, [一四]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宋書』「倭人傳」)
(13) 『일본서기』에는 유라쿠 천황 시기(461년 전후)에 많은 왕족들이 죽는데 이것은 유라쿠 천황 자신이 이들을 죽인 것이고 유라쿠 천황의 아버지로 기록되어있는 인교 천황(允恭 天皇)이 고구려를 토벌하려했거나 토벌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교 천황은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서거하였다. 그러니까 이 사실이 분명히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국의 사정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들은 460년을 전후로 일어난 사건이라 시간적으로도 많은 거리가 있다.
(14) 內田淸「百濟·倭の上表文につぃて」『東アジアの古代文化 86』(1996)
(15) 원문은 다음과 같다. 「臣與高句麗源出夫餘,先世之時,篤崇舊款. 其祖釗輕廢鄰好,親率士眾,陵踐臣境. 臣祖須整旅電邁,應機馳擊,矢石暫交,梟斬釗首. 自爾已來,莫敢南顧. 自馮氏數終,餘燼奔竄,醜類漸盛,遂見陵逼,構怨連禍,三十餘載,財殫力竭,轉自孱踧. 若天慈曲矜,遠及無外,速遣一將,來救臣國,當奉送鄙女,執掃後宮,並遣子弟,牧圉外廄. 尺壤匹夫不敢自有.」又雲:「今璉有罪,國自魚肉,大臣強族,戮殺無已,罪盈惡積,民庶崩離. 是滅亡之期,假手之秋也. 且馮族士馬,有鳥畜之戀;樂浪諸郡,懷首丘之心. 天威一舉,有征無戰. 臣雖不敏,志效畢力,當率所統,承風響應. 且高麗不義,逆詐非一,外慕隗囂藩卑之辭,內懷兇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或北約蠕蠕,共相脣齒,謀陵王略. 昔唐堯至聖,致罰丹水;孟常稱仁,不捨塗詈. 涓流之水,宜早壅塞,今若不取,將貽後悔. 去庚辰年後,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見屍十餘,並得衣器鞍勒,視之非高麗之物,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以沉於海,雖未委當,深懷憤恚. 昔宋戮申舟,楚莊徒跣;鷂撮放鳩,信陵不食. 克敵建名,美隆無已. 夫以區區偏鄙,猶慕萬代之信,況陛下合氣天地,勢傾山海,豈令小豎,跨塞天逵. 今上所得鞍一,以為實驗.」
(16) "順帝昇明二年, 遣使上表曰:「封國偏遠, 作藩於外, 自昔祖禰, 躬擐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於歲. 臣雖下愚, 忝胤先緖,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逕百濟, [一三]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呑, 掠抄邊隷,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臣亡考濟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強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仮開府儀同三司, 其餘鹹各仮授, [一四]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宋書』「倭國傳」)
(17) 당시 일본에도 많은 사람이 죽지만 그것은 왜왕인 유라쿠 천황 자신이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이고 시기적으로도 460년을 전후로 한 것이어서 475년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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