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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산 마음에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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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산 마음에 담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27> 늘재~이화령/7.15~18

산행 스무이틀 째. 금요일.

눈을 뜨니 3시 50분이었다. 일어났다. 몸은 여전히 천근만근 무거웠다. 움직일 때마다 마디마디에서 소리가 나는 듯했다. 방문을 열었다. 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다. 마당은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드리운 밤의 끝자락이 남아 있었다. 마당으로 내려섰다. 지난 밤 만났던 귀여운 복슬 강아지들도 제 집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엔 수많은 별들 반짝였다. 마치 꿈을 꾸는 듯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지금의 부천인 소사나 서울 답십리에 살던 어린 시절의 하늘은 언제나 별 쏟아지고 은하수 흘렀다. 나는 밤이 되면 미군 부대 옆 강둑이나 커다란 콘크리트 배수관 위에 앉아 흐르며 쏟아지는 밤 별들을 바라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살아가느라 힘들어 마음에 쌓였던 아픔들을 흐르는 별 빛에 씻어내곤 했다. 황홀하고 행복했다. 어렸던 날들의 그 밤 그 강둑 그 배수관 위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인기척에 궁금해진 강아지 조그만 마당까지 갖춘 제 집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잠에 취한 얼굴이었다. 귀여웠다. 또 한 마리는 마루 밑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외박을 한 모양이었다.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아 주었다. 따스한 느낌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생명이란 이렇게 좋은 것이다. 내려놓으니 아직 잠이 남아 있는 듯 제 집으로 들어갔다.
마당 한 쪽에 있는 수돗가에서 세면을 하였다. 가슴 속까지 시원했다. 정신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와 산행 준비를 시작했다. 발가락에 밴드를 붙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놈도 있었고 발톱 밑이 터져 피가 흘러 새까맣게 변한 놈도 있었다. 이미 발톱이 빠진 발가락도 있었다. 하나하나 꼼꼼히 밴드를 붙였다. 물을 받고 이온 음료를 챙겼다. 배낭 점검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산행을 위해 배낭을 메고 마당에 내려서니 복슬 강아지 두 마리 마루에 앉아 졸고 있었다. 마치 바람 시원한 여름 날 오후 같았다. 산행을 떠나지 않고 그 곁에 누워 오수를 즐겨야 할 것 같았다.
▲조령산 숲으로 들어가다 ©이호상

차에 올랐다. 산으로 갔다. 조령산의 남쪽 들머리인 이화령에서 산으로 들어가 조령산(鳥嶺山, 1025m)을 넘고 신선암봉(937m)과 형제3봉을 지나 조령3관문으로 내려설 예정이었다. 옛날에는 공정산(公正山)이라는 운치 없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조령산은 산림 울창하고 크고 작은 암벽지대가 많아 산행길이 험했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지나고 대야산과 희양산을 지나며 힘들어 하는 내게 김남균 대장은 조령산이 가장 힘들다고 말하곤 했다.
조령산으로 들어갔다. 산은 깊은 듯 말이 없었다. 천천히 걸었다. 4일째 산행이었다.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김 대장은 따라오며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덜길이 나왔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풀렸고 발목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길은 울창한 숲에 밀려난 듯 산허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었다. 온 몸이 땀에 젖었다.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조령샘이었다. 맑은 물이었다. 맑은 물에 목을 축이고 나니 마음 또한 맑아지는 것 같았다.

맑은 물 탓이었을까. 이 번 주 산행 중 동행들에게 지어주었던 우리 말 이름이 생각났다. 지난 산행을 통해 느끼고 알게 된 동행들에 대한 느낌을 담아 우리 말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몇 사람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조령샘의 맑은 물을 마시며 '맑은 물'과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산장지기와 함께… ©이호상

'맑은 물'은 김명옥 구성 작가의 이름이다. 김 작가는 맑은 물이라는 이름을 부담스러워했다. 자신은 맑지 않다고도 말했다. 나는 맑지 않으니 맑아지라고 지어주는 이름이라고 말했다. 마음 맑게 하여 제 마음 모든 이들에게 보이라고 말했다. 먼저 마음을 드러내야 온전하게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음 깊이 묻어 있는 삶의 묵은 때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했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과 소통하게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는 내내 맑은 눈으로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백두대간 공존의 숲'의 감독인 전영갑의 우리 말 이름은 '깊은 강'이었다. 소리 없이 멀리 흐르는 깊은 강처럼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이 없었다. 언제나 해맑게 웃으며 산행을 즐겼고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마음속에 감춰 두었던 생각들을 드러내 우리를 놀라게 했다. 때로 그의 마음은 심연과 같았다. 그 깊은 마음에서 무엇이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소리 없이 멀리 흐르는 '깊은 강'이었다.

사진가 이호상에게는 '너머 숲'이라는 우리 말 이름을 지어 주었다.
"호상 씨 우리 말 이름은 '너머 숲'이야."
"너머 숲이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호상 씨의 시선은 늘 숲 너머를 향해 있잖아.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있잖아. 이 숲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다음 숲을 보려 하고 이 산에 들어 있으면서도 마음은 늘 다음 산으로 이어져 있지. 그 뿐 아니라 사진가로서도 카메라 앵글을 들이댈 때마다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니 호상 씨는 '너머 숲'이야."

신범섭 촬영감독은 '먼저 눕는 풀'이었다. 그는 늘 말이 없었다. 조용했다. 누군가 우스개 소리를 하더라도 크게 웃지 않았다. 그는 모나지 않아 누구하고도 잘 지내고 품어주었다. 품어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늘 품어 주었다. 다른 이들의 바람을 먼저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의 바람을 느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말하지 않아도 먼저 해 주었다. 그는 참으로 풀이었다. '먼저 눕는 풀'이었다.

등산 안내인 김남균 대장에게는 '빈 산'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산길을 열어주는 일을 하니 산길만 열어주지 말고 마음 길도 함께 열어주라는 뜻이었다. 산을 오르고 산을 타는 사람이 아니라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뜻이었다. 산길 걸으며 세상에서 묻혀 온 제 이야기에 취해 떠벌이지 않고 마음 비워 산의 소리를 듣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찬 듯 비어있는 산처럼 고요히 머물며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산꾼이 되기를 소망하는 이름이었다.

모두들 제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한 대장이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아무래도 너무 체력이 떨어져서 아쉽지만 산행을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체력으로는 조령산을 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암벽 구간이 많아 힘듭니다. 안전이 제일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무리이니 그렇게 하시지요?"

모두들 걱정스러웠던지 다행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연일 계속된 산행으로 모두들 지쳐 있었다. 나 역시 산행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산행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이래저래 내가 문제였다. 마음을 접었다.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나 온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조령산 마음에 담고 내려가는 산길 아득했다.
▲마을 유래비 앞에서 ©이호상

차를 타고 은티산장으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하늘은 맑았고 햇살 눈부셨다. 길가에 기품 있게 늘어선 늙은 소나무들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소나무들은 햇살을 받아 빛났다. 마을을 지키는 듯 길손들을 반기는 듯 서 있는 장승 곁에 커다란 마을 유래비가 서 있었다. 신 감독은 마을 유래비 앞에 나를 세워 놓고 촬영을 하였다.
은티 마을은 여느 산골마을처럼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었다. 그 형세가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어서 이 기를 죽이기 위해 마을 초입 가겟집 노목 아래 남근석(男根石)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마을의 풍성함과 무사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아들을 많이 낳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매년 섣달 20일 동구제(洞口祭)를 지낸다. 남근석에 대한 제의이다.

은티 마을은 아늑하고 평온했다. 산자락 드리운 골짜기에 들어선 낮은 집들은 안온했고 잘 닦여 있는 길들은 나무들과 어울려 편안했다. 이르게 마감한 산행 탓이었는지 한 대장과 전 감독은 마을 초입 가게 집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한 잔 하시라'는 권유를 남겨 두고 산장으로 향했다. 산장으로 들어서니 새벽에 만났던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반가웠다. 보듬어 안고 볼을 부비니 나를 제 어미로 알았는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살가웠다.
▲잠들다 ©이호상

모두들 조금씩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에 빠진 듯 했다. 놀러가자는 말들이 오고가는 듯했다. 쌍추 계곡으로 가자는 말이 나왔다. 산에만 있었으니 계곡을 흐르는 찬 물에 몸 담그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모두들 모이기를 기다리며 산장 마루에 앉았다. 방 안에는 산장 주인의 어머님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고 복슬 강아지는 따라와 발치에 앉았다.
햇살 드리워 볕이 따가웠다.
두고 온 조령산이 마음에 남아 그리웠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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