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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산)/火(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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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산)/火(화)

[한자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89〉

산봉우리 세 개를 그린 것이 山(산)이다. <그림 1, 2>가 옛 모습이다. 산봉우리 얘기가 그럴듯해지는 모습들이다. 지금 글자꼴은 산 하나하나가 세로획 하나씩으로 바뀐 셈이다. 그림들을 보면 지금처럼 가운데 산이 主峰(주봉) 격으로 특별히 높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후대에 미적인 고려가 들어간 모습이겠다.

이 山자의 상형까지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물론 끌어다 붙이고 싶은 건 있지만 상형설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으니 굳이 어설픈 추측을 보탤 필요는 없다. 문제는 이와 연관된 다른 글자다.

火(화)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림 3>이다. 그런데 이는 <그림 2>의 山과 전혀 구분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아래 가로획 부분이 직선인 것이 山, 곡선인 것이 火라고 구분하기도 하지만 학계 안에서도 이 얘기는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림 4> 같은 火의 모습까지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림 1>과 <그림 4>, <그림 2>와 <그림 3>이 별개의 글자라는 얘기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네 그림이 모두 구분하기 어렵다.

더구나 갑골문에서는 지금처럼 획이 정비된 게 아니라 그저 그림의 일부였을 뿐이니, 직선과 곡선의 구분 자체가 없었다. 둘 다 초기부터 나오는 글자들이고 모두 상형으로 설명되는데, 이렇게 구분할 수 없는 두 글자를 따로 만들었다면 둘 중 하나는 도태되고 다른 방식으로 변신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불을 상형했다는 게 좀 미심쩍어 보인다. <그림 3>을 세 갈래 불길의 모습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그 불길이라는 것은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다. 그것을 특정한 형태로 인식하고 잡아낸다는 것은 보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인데, 그 주관에는 다시 사회적 공감대라는 것이 작용한다. 우리가 상상의 동물인 용에 대해서 비슷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도 이런 공감대, 즉 교육이 작용한 결과다.

불꽃은 언제부터 저런 형태로 우리에게 인식됐을까? 그러나 여기서 구태여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아주 먼 옛날 한자를 만들던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은 불꽃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3>을 불꽃의 모습으로 본 것은 후대 사람들의 관념이지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아니었을 수 있다. 火자의 상형설은 의문이 많은 것이다.

이런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설명 방법이 하나 있다. '불'은 山을 가차해 썼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발음이 같아야 한다. 지금 발음으로 보면 연관성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火자를 겹쳐 놓은 炎(염)과 焱(염)이다. 둘 다 '불타다'나 '불꽃' 정도의 개념이다. 지금이야 '불' '불꽃' '불타다'를 별개의 글자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하지만, 초기에 그렇게 구분했을 리는 없고 한자의 특성이 동사와 명사의 구분조차 없다는 것이니 이들은 결국 火와 같은 개념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火와 炎·焱은 발음 차이가 있다.

물론 서로 다른 문화권의 말을 각기 글자로 만들었다면 발음이 다른 두 개의 글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데 구조상 炎의 발음을 이어받았다고 봐야 할 欻(훌)이라는 글자가 단서를 제공한다. 欻은 중국말 발음으로 '후' '쉬' '촤' 등으로 발음된다. ㄹ받침은 ㄴ과 가깝고, 이 경우를 보면 ㄹ은 나중에 소실된다. 결국 ㄴ이 ㄹ로 약화됐다가 아예 소실되는 과정이 잡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염'(炎)>'훌'(欻)>'화'(火)의 발음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고 변화 과정이 인정되는 발음이다. 얼핏 연관이 없어 보였던 炎 역시 火 발음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炎 계통에서는 剡(섬) 같은 발음들이 나왔고, 이는 山의 발음을 이어받은 仙(선)과 비슷하다. 淡(담)·談(담) 등 낯익은 글자들의 발음도 초성 ㄷ이 처음에 ㅈ과 구분되지 않는 발음이었음을 생각하면 山과 같은 발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

火가 불꽃을 상형했을 가능성보다는 山을 가차해 쓴 것인데 발음이 많이 변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역으로 火가 불꽃을 그린 것이고 '산'은 이를 가차해 쓰다가 모양을 꾸며 독립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상형이 좀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불꽃'보다는 '산봉우리'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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