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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혈)/昷(온)/盟(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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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혈)/昷(온)/盟(맹)

[한자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88>

'그릇'인 皿(명) 위에 점을 하나 얹은 것이 '피'인 血(혈)이다. <그림 1>에서 보듯이 그릇 안에 점이 하나 찍혀 있다. 제사 또는 제후들의 會盟(회맹) 때 희생물로 잡은 짐승의 피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피는 그릇에 담았을 테니, 그릇의 모습인 皿이 들어간 건 그 때문이다. 血은 지사자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림 2>를 보면 점은 그냥 점이 아니라 둥그런 모양에 뭔가 선이 들어가 있다. 이와 똑같은 모습은 盟(맹)의 옛 글자로 분류된 글자들에서도 나타난다. <그림 3, 4>다. 물론 盟의 지금 모습은 明(명)과 皿을 합친 형태로 돼 있고 그런 형태가 금문부터 나오기 시작하지만, 초기 모습은 血의 옛 모습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盟의 '맹세'는 지금처럼 '맨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입술에 희생 짐승의 피를 바르고 하는 의식이었다. 盟과 血이 의미상 통하는 것이다. 발음 역시 조금 멀리 돌아가야 하지만 연결이 안 되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투표할 때 찍는 도장의 모습처럼 ㅇ자 안에 ㅅ자가 들어 있는 이 모습은 血의 설명에서 나온 대로 피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지난 회에 나온 冏=囧(경)자(<그림 5>)로 보인다.

그렇다면 血과 盟의 옛 형태는 囧과 皿을 합친 글자다. 囧이 발음, 皿이 의미인 형성자로 설명될 수 있다. ㅇ/ㄴ/ㄹ이 통하는 받침이라고 보면 血은 囧=冏=冋 계통의 炯(형) 같은 글자와 거의 비슷한 발음이고, '맹'은 초성 ㅎ/ㅁ의 밀접한 관계로 보아 역시 이들의 발음과 연결시킬 수 있다. 明이 위에 들어간 지금의 盟은 본래 <그림 4, 5> 같은 모습이었다가 발음기호 囧을 같은 발음이었을 明으로 교체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明 자체도 해(日)와 달(月)을 합쳐 '밝다'의 뜻을 나타낸 회의자의 전형적 사례라는 것이 아직도 '일반상식'이지만, 옛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다. <그림 6>처럼 한쪽을 日(일)로 볼 수 있는 글자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 7>처럼 난데없는 田(전)자가 나오기도 하고, 상당 부분은 <그림 8>처럼 여기서 나온 囧으로 볼 수 있는 글자다.

田이나 囧으로 나타난 부분을 日의 꾸밈으로 볼 수도 있지만 囧이 田이나 日 형태로 간략히 정리됐다는 게 좀더 냉정한 판단일 것으로 보인다. 明은 의미 요소 月(월)과 발음기호 囧을 합친 형성자인 것이다. 따라서 '밝다'는 해와 달의 일반적인 밝음이 아니라 처음에는 '달이 밝다'였다가 의미가 일반화된 것이다.

<그림 6>의 오른쪽 같은 모습이 '해'인 日로 인식된 것은 회의자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은 후대의 일이었다고 봐야 되고,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림 8> 같은 모습이 아니라 <그림 6> 같은 간략체가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림 6>의 日 부분이 囧의 간략형임을 뒷받침해주는 글자가 溫(온)의 발음기호 昷(온)이다. 지금 글자꼴의 차이에서 볼 수 있다시피 溫에서는 오른쪽 위가 囚(수) 형태로 돼 있는데 昷에서는 日로 돼 있다. 이런 모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溫이 氵=水(수)와 昷을 합친 글자임은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囚 같은 모습이 간략해져 日이 된 것이다.

여기서의 囚가 <그림 7>에서는 田이고 <그림 8>에서는 囧이다. 昷의 옛 모습인 <그림 9~11>을 보면 그 윗부분은 囧이 여러 가지로 변한 것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따라서 昷의 본래 모습(<그림 10>)을 놓고 죄수(囚)에게 그릇에 담긴 음식(皿)을 주는 것을 나타냈다는 식의 기존 설명은 '사오정 개그'일 뿐이다.

昷 역시 血이나 '囧+皿' 형태였던 盟의 본래 모습과 같은 글자다. 溫이 '따뜻하다'의 뜻인데, 그 의미는 물론 '물이 따뜻하다'겠다. 그런데 血이 '피'고 盟이 '맹세하다'라고 할 때 이들과 같은 글자에서 분화했을 昷 역시 '따뜻하다'의 의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맹세(盟)를 위해 갓 잡은 희생 동물의 따뜻한(昷) 피(血)가 바로 이 세 글자에 얽힌 사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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