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도쿠 릉의 옆에는 『일본서기』에 백제인으로 분명히 기록된 주군총(酒君塚)이 있고 오늘날에도 남백제 소학교, 백제역, 백제대교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씨 자체가 구다라(百濟)인 사람들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주군총 옆으로는 닌도쿠(仁德) 천황의 아버지로 알려진 오우진(應神) 천황릉이 있습니다. 이 주변으로는 구릉지대에 아스카베 천총이 있어 과거에는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지만, 현재는 11기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우진릉 가까이 곤지왕의 신사가 있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오진릉이 있는 오사카부(大阪府) 하비키노(羽曳野)市 지역에는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가 있는데, 이 신사는 아스카베(飛鳥戶) 신사라고도 불리지만 제신은 곤지왕입니다.
일본의 고대의 문헌인 『고전문서(古田文書)』에 따르면, 곤지왕은 인교(允恭) 천황시기인 5세기 초에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아스카베야스코(飛鳥戶造)의 조상으로 이 지역을 본거지로 삼았다고 합니다(실제 사료에서는 5세기 중엽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일대에는 백제인 고분이 수천 기 이상 있다고 하는데 그 동안의 발굴 내용을 보면 백제의 유물에서 발굴된 것과 유사한 유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니이자와천총(新澤千塚)으로 니이자와 126호 고분에서 나온 방제형금관(方製形金冠)은 무령왕릉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니이자와 천총에 들어서면 바로 눈에 띄는 것이 센카(宣化) 천황(535~539)의 황릉(皇陵)인데 센카 천황은 게이타이 천황의 차남으로 무령왕에게는 친조카가 되고 곤지왕의 증손자가 된다고 합니다(이 부분은 앞으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닌도쿠 천황의 아버지인 오우진 천황은 백제에서 왕인(王仁) 박사를 초청하여 태자의 스승으로 삼아 논어와 천자문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백제왕은 아화왕(阿花王 : 아신왕 392~405)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닌도쿠 천황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 오우진 천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최근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 교수는 오사카부(大阪府) 하비키노(羽曳野)市에 있는 오우진왕릉에 대해 그 피장자(被葬者)가 5세기 후반에 건너온 백제의 곤지(昆支) 왕자(곤지왕)이고 그는 5세기말에 백제계 왕조를 수립했다고 단정하였습니다. 앞서 본대로 오우진 천황의 릉과 곤지신사(昆支神社)의 거리가 직선거리로는 불과 4 Km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오우진 천황릉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곤지왕의 사당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사와 릉의 관계를 본다면 이 신사와 릉의 주인이 바로 곤지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릉과 신사의 주변에는 이치수카 고분군(5C말~7C초)이 있는데 모두 백제식의 횡렬식 석실 고분입니다. 이 고분은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주택개발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것으로 유물도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 이치수카 고분의 등장으로 일본에서는 백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우진 천황 = 곤지왕'이라는 문제를 다시 검토해 봅시다. 만약 이 두 분이 일치한다면 부여사의 큰 비밀이 밝혀지게 됩니다.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 천황이 4세기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11) 오우진천황은 실질적으로 일본 황실을 열었던 인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앞서 본대로 오우진 천황의 어머니가 진구황후인데 진구황후가 근초고왕이라고 한다면 오우진 천황은 근구수왕이나 또는 근초고왕의 다른 아드님이 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까운 혈족이나 왕비족들 가운데 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제1대 진무(神武) 천황부터 제9대 가이카(開化) 천황까지는 조작된 가공의 인물들이라고 단정합니다.12) 이 점은 일찍이 쓰다 소기찌(津田左右吉 : 1873~1961)에 의해 주장된 것이기도 합니다.13) 나아가 제10대 스진(崇神) 천황에서 제14대 주아이(仲哀) 천황까지도 전설의 천황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는 오진 천황이 현재 일본이 자랑하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야마토 왕조의 시작이 됩니다. 물론 스진 천황이 신라 또는 가야계의 인물일 수가 있음은 부정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근초고왕 이후에는 대부분이 부여계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일본 고대사에서 오진 천황의 행적에 관한 연구가 가장 결정적인 열쇠가 될 수밖에 없죠.
먼저 오진 천황의 전신초상화를 보면 오진천황은 머리에 남바위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가죽을 댄 긴 모자로 한국인들이 겨울철에 즐겨 착용했던 방한용 모자입니다([그림] 참조).
문제는 오진 천황이 누구인가 하는 것인데 이것을 추적할만한 단서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근초고왕의 직계후손일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이 서거한 후 태자(아신왕)이 나이가 어려서 숙부인 진사왕이 즉위했다고 하는데 『일본서기』에는 숙부인 진사(辰斯)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되어있고, 이어 오우진 천황 3년 조에서는 진사왕이 천황에 무례를 범하여 그것을 책망하자 키노쯔네 수쿠네(紀角宿禰) 등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도 진사왕이 피살되었다는 암시가 매우 강하게 나타납니다. 즉 진사왕은 구원(狗原)에 사냥을 나갔는데 10여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 지역의 행궁에서 서거한 것으로 되어있죠. 다시 말해서 침류왕의 동생이 권력을 찬탈했을 때 이 왕위를 다시 찾아줄 수 있는 힘과 혈연을 가진 사람이 오우진 천황이라는 점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이미 앞에서 본대로 오우진 천황은 110세로 서거한 것으로 되어있어 여러 왕들의 업적이 조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침류왕(384~385)에서 곤지왕(?~477)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많은 거리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오우진 천황이 곤지왕이 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4) 다시 안개 속으로
우리가 오우진 천황의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일본서기』에 기록된 오우진 천황의 행적이 여러 사람의 업적을 한데 모아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오우진의 행적에 나타난 행위들을 보면, 오우진 천황은 반도부여의 근초고왕 직계후손이라는 점과 반도부여의 왕과 같은 권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8세기에서 10세기경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풍토기(風土記)』에서는 오우진 천황의 아드님인 닌도쿠 천황이 "모국인 백제로부터 백제신(百濟神)의 신주를 왕실로 모셔왔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닌도쿠 천황이 백제인(반도부여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같은 책에는 "미시마에 계신 신의 높으신 이름은 오야마쓰미노카(大山積神)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와다시노오카미(和多志大神)이시다. 이 신께서는 나니와의 다카쓰노미야(高津宮)에 닌도쿠 천황의 시대에 나타나셨다. 이 신께서는 구다라(百濟)에서 건너오셔서 나니와쓰의 미시마에 계시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4) 이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닌도쿠 천황이 모시고 온 신의 이름이 와다지(和多志)로 이 화씨(和氏)가 바로 천황가 조상의 성씨(성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근초고왕 - 근구수왕 또는 근초고왕 - 오우진 등의 계보로 본다면 근초고왕의 성씨가 부여씨(夫餘氏)이므로 이 부여씨는 화씨(和氏) 즉 야마토로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닌도쿠 천황 41년에 키노쯔네수쿠네(紀角宿禰)를 백제에 보내어 행정구획을 정리하는 사업을 관여하는 동시에 각 지역의 산물을 조사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백제의 왕족인 사케노기미(酒君)가 무례하게 행동하므로 키노쯔네수쿠네는 백제왕에게 질책하자 백제왕은 쇠사슬로 사케노기미를 묶어 일본으로 보냈다고 하는 기록이 보입니다.15) 그 후 2년이 지나 『일본서기』에 다시 사케노기미가 나타납니다. 즉 닌도쿠 천황은 사케노기미를 불러 자신의 직할 농경지에서 잡힌 이상한 새를 보고 무엇이냐고 묻자, 사케노기미는 "이 새는 백제 땅에는 흔한 것으로 백제말로는 구지(俱知)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16) 여기서 말하는 구지는 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위의 『일본서기』의 기록을 반도 사학계에서는 허위 사실로 보기도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백제왕과 일본왕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한 혈연적 관계임을 증명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닌도쿠 천황이 백제왕보다도 항렬(行列)이 높을 경우에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고 경우에 따라서 일본과 백제의 통치자가 하나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요.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범부여 연합국가'임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오우진·닌도쿠 천황의 무대는 주로 리틀 구다라(Little Gudara) 즉 '작은 백제'의 지역입니다. 이 곳은 아스카 지역으로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아스카는 오사카만 ― 인덕릉 ― 후루아치 고분군 ― 오우진 릉 ― 곤지왕신사 ― 아스카천총 등으로 연이어진 곳입니다. 아스카에는 588기나 되는 많은 고분이 있는데 아직도 대부분 미발굴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니이자와 천총 126호 고분은 백제 귀부인의 고분인데 여기에서 출토된 방제형 금관과 청동다리미 등은 무령왕릉의 왕비 유물과 흡사하며, 173호 고분에서 출토된 동경은 무령왕의 의자손 수대경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이 지역의 주민들의 90% 이상이 이주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열도와 반도의 부여계의 관련성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더 의문의 고리는 커져갑니다. 도대체 오우진 천황(應神天皇)으로 잘못 분석되고 있는 곤지왕(昆支王)은 어떤 분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곤지왕에 대한 분석을 해보도록 합시다.
필자 주
(11) 井上光貞, 앞의 책.
(12) 直木孝次郞『日本神話古代國家』(1993)
(13) 津田左右吉『古事記及日本書紀の硏究』(1924)
(14) "御嶋 坐神御名 大山積神 一名和多志大神也 是神者 所顯難波高津宮 御宇天皇御世 此神者 百濟國渡來坐 而津國 御嶋坐"(『風土記』)
(15) 『日本書紀』仁德天皇 41年
(16) 『日本書紀』仁德天皇 43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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