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조메이 천황(舒明天皇) 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백제에서 온 손님들을 조정에서 대접하였다.
상서로운 연꽃이 검지(劍池)에서 피어났다.
한 개의 줄기에 피어있는 두 송이의 연꽃"
(瑞蓮生於劍池一莖二花)
이 기록은 조메이 천황 당시에 백제의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상서로운 연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백제와 일본을 하나의 줄기로 보고 있다는 암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오사카(大阪) 일대를 고대 일본에서는 '구다라고올리' 즉 백제군(百濟郡)으로 불렀습니다. 이 일대는 5세기 초 가와치(河內) 왕조를 시작한 닌도쿠 천황의 본거지로 그는 왕위에 오른 후 나라(奈郞)로부터 오사카 땅인 나나와쓰[난파진(難波津)]로 천도하였습니다.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 1917~1983) 교수는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를 전해 받은 왜왕 오우진이 백제왕족이며 천황 가문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이주자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9) 미즈노 유(水野祐 : 1918~2000) 교수는 오우진(應神) 천황과 그의 아들인 닌도쿠(仁德) 천황(오우진천황의 제4 왕자)이 백제국의 왕가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와 정복왕조를 이루었으며, 이들 오우진·닌도쿠 천황은 외래민족 세력으로 일본에 침입한 정복왕조로 대륙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이들은 대륙의 사정에도 정통하였고 그 지배층이 백제국 왕가와 동일한 계통이었기 때문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10) 닌토쿠 천황은 『송서(宋書)』「왜국전(倭國傳)」에 기록된 '문제의 왜 5왕' 가운데 찬(讚) 또는 진(珍)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닌도쿠 천황은 열도(일본) 고대사에서 여러모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그의 릉(陵)입니다. 닌도쿠 천황의 릉은 그 규모가 세계 최대입니다. 닌도쿠 천황릉은 오사카에 위치하는 것으로 길이만 486m로 세계 최대 규모의 고분입니다. 하루에 2천여 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도 15년 8개월이 걸리는 규모라고 합니다.
닌도쿠 천황릉과 관련하여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초기의 야마토 왕권이 강대했을 것이라고 보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같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이 조성되었겠는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이들이 후일 야마토 왕조처럼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들의 군사적 지배력이 초기에 토착세력들이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특정 지역의 인원들이 집중적으로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의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닌도쿠 황릉이 1872년 산사태로 무너져 내려 이 때 일부 유물들이 밖으로 빠져 나온 사건이 있었죠. 이후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이 유물의 일부가 미국 보스톤 박물관에 의해 소장되게 되었습니다. 즉 현재 미국 보스톤 박물관에는 닌도쿠 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수대경(手帶鏡 : 손거울)과 환두병(環頭柄 : 칼자루)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들은 20세기 초 메이지(明治) 시대에 미국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닌도쿠 천황릉에서 나온 동경(銅鏡)이 반도지역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과 그 크기가 일치하고 마치 복사판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중앙의 반구체(半球体)는 물론이고 주변의 9개의 돌기도 완전히 같은 모양입니다. 이들 동경에는 왕을 사방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사신신앙(四神信仰)의 그림들이 나타난 것으로 봐서 북방에서 온 것으로 추정도 가능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같은 거울은 중국에서는 출토가 되지 않는 종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아하고 특이하게 생긴 구리거울이 반도와 열도에서 같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닌도쿠 천황릉의 유물과 무령왕릉의 유물이 같은 종류라는 점을 한번 검토해봅시다.
이 유물은 여러 면에서 미묘합니다. 왜냐하면 이 동경이 한반도 → 일본의 방향으로 건너간 것인지, 일본 → 한반도 방향으로 건너온 것인지의 문제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두고 심한 언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언쟁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열도부여와 반도부여는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역사적인 발굴이 있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닌도쿠 천황이 무령왕(501~523)보다는 훨씬 이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닌도쿠 릉에서 출토된 동경은 태양의 중심에 산다는 삼족오가 분명하게 조각되어있고 그 주위에는 북방민족의 수호신들인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이 호위하고 있어 고대 북방 한국인들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동경이 북방 -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유입된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동경이 열도에서 제작되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면 일본 고유의 문화적 특성이 나타나야하겠지만, 오히려 북방의 특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금제 뒤꽂이에도 삼족오(三足烏)가 들어있고 금동제 신발, 환두대도(環頭大刀)에도 삼족오 문양이 들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닌도쿠 릉에서도 동일한 종류의 칼이 출토되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유물들은 중국에는 없는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령왕릉의 유물들과 닌도쿠 릉의 왕릉의 유물들이 마치 형제의 것처럼 닮아있습니다. 이것은 열도부여나 반도부여의 지배세력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분명히 닌도쿠 천황이 앞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반도(백제)와 열도(일본)는 서로 분간이 되는 국체(國体)라고 하기는 어려운데다 그 동안의 철 가공 기술의 이전 등에 관한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한반도 → 일본의 방향임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령왕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고 넘어갑시다. 무령왕은 한국·일본 고대사의 비밀의 한가운데 서 있는 분으로 거의 40대가 되어서 즉위합니다. 하지만 무령왕의 40대 이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무령왕은 곤지왕(또는 곤지왕자 : 개로왕의 아드님)의 자손임은 이미 밝혀져 있기 때문에, 상당한 기간을 일본에 체류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무령왕은 휘(임금님의 이름)는 사마이며, 한성백제의 멸망기에 곤지왕이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태어난 아기씨이며 이후 곤지왕은 일본에 체류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 아드님도 일본에 체류했을 것입니다(이 부분은 앞으로 충분히 분석할 것입니다). 따라서 무령왕은 장년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이 바로 곤지왕이 되겠군요.
참고로 일본 황가를 수십년 동안 연구한 홍윤기 교수는 「일본고대사 문제점의 새로운 규명」(2005)이라는 논문에서 화씨(和氏)인 무령왕의 왕자가 성왕이며 성왕의 첫째 아들이 위덕왕(554~598), 둘째 아들이 비다츠(敏達 : 538~585) 천황이었고 비다츠 천황은 이후 요메이 천황 - 쇼토쿠 태자 등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이들의 성씨가 바로 화씨(和氏) 즉 '야마토'라는 것이죠. 야마토 시대(4~7세기)에는 나라(奈良)일대를 야마토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무령왕의 후손에 관한 문제들은 앞으로 다시 상세히 거론하도록 하고 일단 넘어갑시다.
필자 주
(9) 井上光貞『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10) 水野祐『日本古代國家の形成』(講談社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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