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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가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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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가는 길에서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25> 늘재~이화령/7.15~18

산행 스무 째. 수요일

이른 아침 버리미기재에는 바람이 불었다. 구름 흐르는 하늘은 맑고 푸르러 버리미기재는 그 이름이 품고 있었던 슬픈 사연들을 더 이상 품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불 놓아 마련한 손바닥만한 밭뙈기에 목숨 의지하던 궁벽한 화전민들의 삶의 흔적도, 빌어먹으며 하루하루 연명해야 했던 이들의 아프고 가슴 절절한 사연들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깊어가고 있는 여름을 따라 숲도 깊어가고 있었다. 푸르른 나뭇잎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나뭇잎들을 보았다. 투명했다. 높은 나뭇가지에 달린 나뭇잎들은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맥이 그대로 보였다. 기공도 보이는 듯했다. 그 나뭇잎들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였다. 눈 시렸다.
숲 사이로 길이 나 있었다. 숲으로 들어갔다.

장성봉(長城峰, 915.3m)을 향했다. 오늘 산행의 첫 번째인 높은 산이었다. 몸은 이미 무거웠다. 오늘 산행은 쉽지 않았다. 해발 1,000m가 넘지 않는 산이라고 하지만 산세가 험하고 가팔랐다. 장성봉에서 내려선 후 막장봉(887m)과 악희봉(845m) 갈림길을 지나 은티재에서 숨을 고르고 주치봉(683m)과 구왕봉(877m)을 넘어야 했다. 지친 몸을 지름티재에서 추스린 후 다시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희양산(998m)을 넘어 차가 올 수 있는 곳까지 한 시간 반 정도를 더 내려가야 했다.

장성산 정상에 채 이르기도 전에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었다. 6시 55분이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돌아보니 골마다 운무(雲霧) 가득했다. 흐르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 흐르는지 운무를 따라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것들은 서로를 불러 세우며 앞 다투어 흘렀고 어떤 것들은 올올이 흩어지며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골짜기를 가득 메우며 흐르는 운무로 인해 어떤 봉우리는 외로운 섬처럼 쓸쓸했고, 어떤 봉우리는 어린 시절 냇가에 띄우던 종이배처럼 위태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신비로웠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한문희 대장의 말이 들려왔다.
▲ ©이호상

"선계(仙界)가 따로 없습니다. 이곳이 바로 신선이 사는 세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선이 사는 세상이 따로 있을까. 사람 사는 세상 또한 아주 오랜 옛날에는 그러했을 것을…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어찌 처음에는 이 산과 골짜기처럼 아름답지 않았을까. 신비롭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제 욕심에 마음 빼앗겨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지키지 못한 것일 뿐... 이 아름다운 산중도 제 마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지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사람 사는 세상처럼 아름다움을 잃어가겠지…'

바람 불어왔다. 몸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아래로 문경시가 보였다.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아득했다. 헬기장도 보였다. 그 뒤로 곰넘이봉이 보이고 촛대봉이 보였다. 멀리 대야산과 할미봉도 보였다. 먼 길이었다. 그 먼 길을 따라 그리움이 일었다.

"저기 보이는 것이 시루봉입니다. 그리고 능선 따라 가시다 보면 저기 솟은 봉우리 보이시지요? 조항산입니다."
"우리가 저 산들을 다 넘어 온 것인가요?"
"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산이 우리가 남겨 두고 온 청화산입니다."

지나온 길 망연히 바라보았다.

'저렇게 많은 산들을 지나왔구나. 저렇게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산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왔구나!'

감동이었다. 놀라웠다.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한 걸음씩 걸어 저 산들을 넘고 길을 지나온 것이다. 지나온 길이 살가웠다.
▲장성봉 ©이호상

백두대간의 허리를 떠받치고 있는 장성봉에 올랐다. 백두대간이라는 지리 인식이 정립되지 않았더라면 사람 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숨어있던 산이다. 북으로부터 남진하던 백두대간이 희양산에서 서쪽으로 꺾여 악희봉으로 솟구친 후 거의 직각으로 꺾여 남쪽의 대야산으로 치닫기 위해 달려가는 중간쯤에 장성산은 솟아 있다.
그 웅장한 모습이 마치 그 이름처럼 거대한 만리장성의 일부를 보는 것 같았으리라. 그래서 장성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리라.
장성봉을 명산이라고 하는 이유는 백두대간의 허리를 받치고 있는 산이기 때문이 아니다. 많은 산을 거느리고 있는 깊은 산이기 때문이다. 장성봉을 중심으로 북쪽 악희봉에서 시계 바늘 방향으로 구왕봉(898m), 희양산(998m), 애기암봉(731m), 둔덕산(970m), 대야산(930.7m), 군자산(910m) 등이 원을 그린 듯 에워싸 깊은 산의 풍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장성산에 올라 쉬었다. 바람을 따라 숲이 '쏴아~ 쏴아~' 파도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출렁였다. 내 몸도 출렁이는 듯 했다. 누군가 '나중에 백두대간 종주를 다시 하게 될까요?'하고 묻는다. 누군가를 정해 놓고 하는 질문이 아니다. 모두에게 묻는다. 누군가 대답한다. '또 와야지요.' 한 대장이 끼어든다. '세 번은 걸어야 길이 보이지요.' 나는 그저 웃었다.

잠시 멈추어 섰던 길을 다시 이었다. 막장봉 전망대에서 잠시 쉬며 조망을 즐기다 악희봉 갈림길을 향했다. 악희봉은 막장봉처럼 대간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름다운 조망을 즐기기 위해 지친 몸에 배낭을 내려놓고 악희봉으로 향하니 당당히 선 촛대바위 외로웠다. 정상에 오르니 바람 세차게 불어 지친 마음 위로하고 몸 어루만져 주었다. 바람에 몸 맡기고 첩첩한 산줄기 바라보았다. 바람을 따라 산줄기도 나뭇잎처럼 출렁이는 것 같았다. 하늘에 구름이 많아졌다. 그러나 푸르렀다.

점심을 먹은 후 은티재를 지났다. 은티재는 백두대간이 구왕봉과 희양산으로 치솟아 오르기 전 잠시 몸을 낮추어 생명을 품고 가르침을 베푼 곳이다. 그리하여 마을을 이루게 하고 산문(山門)을 열어준 곳이다. 고갯마루의 왼편에 들어선 은티마을과 오른 편 봉암용곡에 들어선 봉암사이다.

주치봉에서 구왕봉(九王峰, 898m)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지증대사(智證大師)가 봉암사(鳳巖寺)를 세울 때 연못에 살던 용들이 쫓겨나 이 봉우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구룡봉이라는 다른 이름도 지니고 있는 산이다. 그 이름 때문이었는지 가파른 길이 이어졌다. 숨 가빴다. 구왕봉에서 뚝 떨어지는 듯 내려서자 지름티재였다. 잠시 앉아 가쁜 숨을 가라앉혔다. 바람에 몸을 맡기었다.

지름티재에서 희양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나무울타리 촘촘히 쳐져 있었다. 조계종의 특별수도원이라고 할 수 있는 봉암사에서 쳐 놓은 것이다. 수행 도량인 봉암사의 참선과 정진 수행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한 조치인 듯했다. 산을 지나는 이들이 있으면 수행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삶과 죽음 ©이호상

봉암사가 한국 불교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 봉암사는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그러므로 봉암사를 빼어 놓고는 한국 불교를 말할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희양산문(曦陽山門)으로 불리는 봉암사가 한국 불교에서 이처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희양산문이 신라 헌강왕5년(879년) 지증대사가 창건한 이래 한국불교를 이끌어 왔던 9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1947년 한국 불교를 새롭게 혁신시킨 '봉암사 결사'가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봉암사 결사는 성철 스님을 중심으로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등의 스님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결사의 가장 핵심적은 정신은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는 것이다. 진리란 원래 간결하고 간명하다고 했던가. 결사의 정신 또한 간결 하고 간명하다.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재를 받지 않게 된 것도, 스님들의 붉은 가사가 괴색으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이다. 또한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정신을 생활화한 것도 이때이다. 수좌 자신이 나무 하고 물 긷고 밭 갈고 탁발을 일상화하며 생활을 한 것이다. 하루 밭을 갈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는 노동과 청빈의 정신을 진작시킨 것이다. 이러한 봉암사 결사의 정신이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만신창이가 된 한국불교를 새롭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희양산문의 정신이 한국 불교계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봉암사는 오늘날 한국 불교계의 사리와 같은 존재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한국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봉암사의 이러한 위상을 볼 때 봉암사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증대사가 "하늘이 내린 땅"이라고 했던 용암계곡을 품고 있는 희양산으로 중생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봉암사 결사 정신과 어떻게 합치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봉암사(鳳巖寺)라는 이름의 뜻처럼 봉황이 나래를 펴고 나는 것처럼 거대한 바위들이 웅장하고 아름답게 펼쳐있는 희양산으로 사람들이 들어서는 것을 막는 것이 봉암사 결사 정신에 어떻게 합치되는지 나 같은 어리석은 중생은 이해 할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이 어디 그뿐이랴. 우리나라 12종산 중의 하나인 속리산에 자리 잡은 법주사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이들에게 입장료를 받는 것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떻게 부합되는 것인지, 봉암사 결사 정신과 어떻게 합치되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다. 마음을 닦고자 산을 찾는 이들 앞에 울타리를 치고 막아선 후 강제로 돈을 받는 사찰이 어디 법주사뿐이랴. 법주사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불교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 참으로 가슴 아프다. 사람들의 마음에 부처님의 법을 심어 주는 대신 분노와 원망을 쌓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고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도 정반대되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이호상

나는 산악인은 아니지만 지면을 통해 봉암사에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한다. 지름티재에 쳐 놓은 울타리를 걷기 바란다. 희양산으로 들어서는 길을 막지 않기 바란다. 스님들의 정진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도 백두대간 길을 열어주기 바란다. 백두대간은 한국 불교의 것도 아니고 사찰의 것은 더욱 더 아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은 이 땅의 민초들의 염원이 담긴 하늘 길이었다. 부처님의 뜻인 담긴 생명길이라고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길을 어찌 스님들이 가로 막겠는가 말이다. 두 손 가지런히 모아 부탁드린다.

울타리를 돌아 희양산을 향했다. 아무래도 울타리 아래로 기어들거나 넘는 것은 마음 불편했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팔랐다. 숨은 턱에 차오르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을 앞두고 암벽을 타고 올랐다. 올려 보니 아득했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로프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암벽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으로부터 탄탄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거대한 바위에서 전해지는 단단함 같은 것이었다. 그 단단함은 나를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였다.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위엄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희양산의 빼어난 전망을 즐기지 못하였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저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그렇게 머물렀다가 산을 내려왔다.
▲희양산을 바라보다 ©최창남

산성 터에 머물러 쉬었다. 은티마을로 향했다. 울창한 숲은 아름다웠고 깊은 계곡은 맑은 물 품어 흘려보내고 있었으나 지나는 이는 마음 내려놓을 곳 찾지 못하고 빈 발걸음만 내딛고 있었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숲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들었다. 몇 걸음 걷고 몇 걸음 걸으며 내려갔다. 거대한 바위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습이 꼭 떡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시루떡바위도 어둠을 핑계 삼아 보는 듯 마는 듯 지나쳤다.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깊어지는 어둠을 따라 맑은 물 흐르는 소리도 깊어졌다.
숲 사이로 멀리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이었다.
은티산장으로 향했다.
돌아보니 어둠이 불빛을 따라 오고 있었다.

(봉암사 이야기는 윤제학의 '산은 사람을 기른다'와 민병준의 '백두대간 가는 길'에서 대강을 빌려 왔습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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