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80노인이 낳은 애, 데려다 키우면 제자식 돼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80노인이 낳은 애, 데려다 키우면 제자식 돼요"

[정세현의 정세토크] <9> DJ는 왜 갑자기 정상회담을 말하나?

요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갑자기 남북 정상회담 얘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월 16일 한신대 특강에서 처음으로 나왔고, 23일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인터뷰에서도 나왔습니다.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는 시기에 왜 난데없이 정상회담 얘기를 자꾸 하는 거죠?

남북관계가 지금은 여러 가지로 암울하지만, 내년 초 미국에 새 정부가 출범하면 상황이 좀 달라질 겁니다. 싫어도 미국이 가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석 달도 채 안 남았습니다. DJ가 그런 걸 계산하고 말씀하셨을 거라고 봅니다.

그동안 남북간에 94년에는 정상회담이 합의되었지만 상대측 유고로 무산된 적이 있고, 두 번은 성사되어 공동선언까지 냈지요. 그런데 그 세 번 다 DJ가 직·간접적으로 작용을 했다고 할까, 역할을 했습니다.

94년에는 북핵 위기가 극도로 고조되던 시기에 카터의 방북을 권유해서 정상회담 합의에 이르도록 뒤에서 역할을 했었죠. 2000년에는 직접 정상회담을 했고...노무현 대통령한테도 정상회담 방식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여러 번 권고하셨죠. 노 대통령이 그 말을 듣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임기 말년에 정상회담을 하기는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DJ의 권고를 흘려들으면 훗날 십중팔구 후회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새 정정부가 출범하면 동북아 정세는 다시 한 번 격동할 겁니다. 좋은 방향으로건 나쁜 방향으건...그 때 우리 한국이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또는 동북아 국제질서 재편과정에서 운명을 결정하는데 객체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YS, 떨떠름했지만 받을 수밖에 없었던 정상회담 합의

대체로 정상회담은 남북관계가 잘 나갈 때보다는, 위기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위기에서 막 벗어났을 때 성사됐었어요. 아까 잠간 말했지만, 첫 정상회담 합의는 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중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1차 북핵 위기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91년부터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경고를 보내고 있었고, 그 때 이어지고 있던 남북총리급회담에서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91년 여름부터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협의되기 시작했어요. 그해 말에 합의가 됐고, 그 이듬해 바로 발효됐죠.

한편, 북한은 김용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미국에 보내서 92년 1월 20일, 당시 캔터 국무부 차관을 만나게 합니다. 김용순은 거기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북미수교를 요구했습니다. 말하자면 미국의 동북아 국익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체제 인정을 요구했는데, (아버지) 부시 정부가 그걸 들어주지 않았어요. 뿐만 아니라,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의 핵 신고 내용을 분석한 결과, 우리가 파악한 것과 상당한 디스크레펀시(discrepancy), 불일치가 있다. 이건 수상하다. 따라서 특별사찰을 해야 한다"고 북한을 압박했습니다. 92년 말의 얘기예요.

그러니까 북한은 클린턴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곧바로 93년 3월 13일 NPT(핵확산금지조약)탈퇴를 선언하는 식으로 강수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래도 우리가 해달라는 수교를 안 해줄 것이냐, 이거죠. 그게 북핵문제의 시작입니다.

클린턴 정부는 핵비확산이라는 미국의 외교 목표가 손상되는 걸 막으려고, 부시 정부와는 달리, 바로 북미 양자접촉을 시작해요. 그거에 대해 김영삼 정부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북한은 그렇게 다루면 안 된다. 거칠게 다뤄야 한다"고 하니까 한미간에 대북정책에서 소위 '보조 불일치'가 생겨요. 그것 때문에 미북간에는 대화가 되고 남북간에는 대화가 끊어집니다. 통미봉남이 시작된 겁니다.

남북간에는 접촉과 대화가 끊어진 반면, 미북은 제네바에서 북핵 회담을 계속합니다. 우리는 미국에 귀동냥이나 하는 신세가 됐죠. 근데 그 협상과정에서 북한이 벼랑끝 전술, 장외압박전술을 쓰다 보니까 미국도 강경대응을 고려합니다. 북폭론이 나온 거죠. 자연히 한반도 위기감이 고조됐죠. 실제로 6월에는 북폭을 전제로 미 대사관 직원 가족들의 대피훈련(일본으로)까지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94년 6월 중순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을 해요.
▲ 김일성 주석은 평양을 방문한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을 받음으로써 북폭을 피해갔다. ⓒ연합뉴스

카터 방북 얘기가 나온 건 94년 5월 12일입니다. 그땐 이미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였는데, DJ가 미국 내셔날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을 하면서 '북핵문제는 어디까지나 협상으로 풀어야 한다. 미국이 이렇게 북한을 압박해선 안 된다. 이럴 때 미국 현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력한 정치인이 나서야 한다'고 전제하고 '카터 같은 사람이 그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걸 계기로 실제 카터가 방북을 했죠. 초기엔 클린턴 정부에서도 별로 탐탁찮게 여겼어요. 왜냐? 미국 정부가 북폭까지 준비하고 있는데, 차질을 준다는 거였죠. 그러나 카터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기 위해 방북을 했고,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해요.

김일성 주석은 바로 그 자리에서 카터의 제안을 받아버립니다. 김 주석이 정상회담 카드로 북폭을 피해가 버린 거지만, 만약 그때 그런 반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북한치려다가 한반도가 쑥대밭이 됐을 겁니다.

미국도 상황이 급진전되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한국 정부도 정상회담을 수락해요. 처음에 YS는 별로 달갑잖게 여겼어요. 아이디어 자체가...허허...DJ한테서 나온 거니까 거부감이 있었을 거고, 북한을 거칠게 다뤄야 한다고 했떤 종래 입장하고 맞지도 않고 해서 좀 떨떠름했지만, 미국이 돌아서 버리니까 안 받을 수 없었죠.

그래서 7월 25일부터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7월 8일 정오 뉴스로 김일성 주석의 유고가 공식 발표되면서 회담이 무산되고 말았죠. 어쨌건 한반도 상황이 극도로 악화됐을 때 정상회담 카드가 북폭을 막아냈고 북핵 협상에 다시 추동력을 불어 넣어 준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2000년 1차 정상회담…'진짜 한미공조는 이렇게'

두 번째 정상회담은 98~99년 간에 핵문제와 미사일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나서 남북관계를 안정시켜야만 그런 사고를 막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건 햇볕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됐는데, 초기에는 북한이 햇볕정책을 '뒤집어 놓은 흡수통일 전략'이라면서 의심을 했어요. 그러다가 2000년 6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햇볕정책의 취지와 목표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나서게 되었던 겁니다.

그건 그렇고, 1차 정상회담 성사 배경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클린턴 대통령은 98년 5월인가 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햇볕정책에 대한 설명을 듣고 '좋다,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공개 천명했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나가니까 일본 오부치 내각도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햇볕정책이 국내보다는 오히려 밖에서부터 탄력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 미국 내에서 보수세력이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이 난데없이 북한이 영변이 아닌 금창리 지하동굴에서 핵을 개발하는 것 같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98년 8월 18일자 뉴욕타임스에 그 동굴 사진이 나왔죠. 미국에서도 그런 사진이나 기사가 나오니까 전후좌우를 안 따지고 '뭐? 그래?' 하면서 비판적인 여론이 일단 확 조성돼더라고요.

설상가상으로 북한이 맞불인지 벼랑끝전술인지 난데없이 8월 31일 일본열도 상공을 가로질러서 알래스카 쪽으로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일본과 미국의 대북정책이 비판의 도마에 오릅니다. 그러면서 상황이 급박하게 악화되고 우리 국내 여론도 나빠지고...

김대중 정부는 굉장히 곤혹스런데도 불구하고 대북 압박으로는 문제가 해결 안 된다고 생각해서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의를 시작했죠. 미국 정부도 여론에 밀리니까 보수층한테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고 또 클린턴 정부하고도 얘기가 되는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해서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 때 한미가 아주 긴밀히 공조했죠. 엉? 진짜...진짜 공조는 그렇게 해야 돼요.

당시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이 수시로 미국을 다녀오고 전화도 하면서 페리 프로세스란 게 성사되도록 몰아가잖아요. 그래가지고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5대과제'에 합의했죠. 나중에 페리 조정관이 김대중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페리보고서는 사실 임동원 수석의 아이디어를 저작권 인용 안 하고 베꼈다고 덕담을 할 정도로 공조가 이뤄졌어요.

북핵 의혹과 미사일 문제가 다시 불거져서 한반도 상황이 요동칠 수 있는 가능성을 페리보고서로 막아낸 거예요. 미사일 문제도 보상 방식으로 풀어나가기로 합의했어요. 페리보고서의 기본은 그거죠. 보상으로 풀어나간다는 거...그게 99년 가을에 확정·발표됐습니다.
▲ 김대중 대통령을 예방한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 ⓒ연합뉴스

금창리 핵 의혹하고 미사일 문제가 한 고비를 넘으니까, 남북관계도 좀 발전시키는 쪽으로 끌고 가야겠다고 해서 북한과 물밑접촉을 시작하고 이듬해 4월 정상회담에 합의합니다. 그러니까 핵과 미사일 위기를 막 넘기면서 남북관계를 잘 꾸려 나가기 위해서, 미국과 긴밀한 공조하에, 정상회담을 준비했고 그 결과 지난 8년 동안 우리가 피부로 느낀 남북관계 진전이 기능했던 겁니다.

물론 그 전에도 남북간에는 연결의 끈이 있었죠. 핵과 미사일이 그렇게 복잡하게 꼬이는 상황에서도 민간차원의 교류와 지원, 경협을 정책적으로 적극 권장했었죠. 금창리 지하동굴 사건, 대포동 미사일에도 불구하고 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을 출범시켜 버리는 조치도 취했습니다.

그런 게 다 밑거름이 돼서 정상회담이 성사됐지만, 기본적으로 98년 여름 터진 북핵 의혹과 미사일 위기를 넘기면서 그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준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이밍 못 맞춘 2차 정상회담…"80노인이 애 낳은 격"

노무현 정부가 정상회담을 하려면 적어도 2005년 9.19공동성명 직후에 했었어야 합니다. 과거 정상회담 사례로 볼 때, 그 때 치고 나갔어야 해요. 그랬으면 북핵문제도 그렇게 미궁을 헤매지 않았을 거고, 남북관계도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발전돼 나갈 수 있는 토대를 잡았을 거라고 난 봐요.

김대중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과 핵문제 해결을 병행한다는 입장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미관계를 그르친 일도 없어요. 그런데 노무현 정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정부 내에 한미관계와 북핵문제 우선론이 득세를 하더군요. 청와대가 핵 연계론 입장으로 돌아선 겁니다. 핵실험 핑계가 됐을 수 있지만, 남북관계와 핵을 연계하니까 잘 나가던 남북관계에서 혼선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네오콘들이 2005년 9.19공동성명에 불만을 가지고 BDA 문제(마카오 Banco Delta Asia 은행 북한자금 동결 문제)를 터뜨려 버리지 않았습니까? 9월 20일부터 미 재무부가 BDA를 사실상 재재하니까 북한이 거기에 반발하면서, 결국 그것 때문에 6자회담은 표류하고, 2006년 7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엔 핵폭파 장치 실험까지 하는 강수를 뒀죠.

그렇게 되니까 미국 여론이 뒤집어지면서 그해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의회권력이 민주당 쪽으로 넘어갔고, 결국 부시 정부가 대북정책을 바꿔서 2007년 2.13합의를 만들었죠. 그게 뭡니까? 우리가 그렇게 부시 정부 내내 주장했던 '행동 대 행동', '조치 대 보상'방식이잖아요?

노무현 정부는 9.19 직후를 놓쳤으면, 그 시점에서에라도 정상회담을 치고 나갔어야 해요. 핵문제 해결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전향적 조치를 무게 있게 권고·설득하고,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를 중간결산하고 업그레이드시키는 틀을 그때 짰어야 돼요. 2010년대에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9.19공동성명 직후에 못했으면 2.13합의 후에라도 했어야죠.

DJ는 물론 나 같은 사람까지 나서서 그렇게 정상회담 조기 개최를 촉구했건만, 귓등으로 듣더군요. 오히려 공공연히 '남북관계가 북핵문제보다 앞서가면 안 된다. 반 발짝 뒤에서 가는 것이 맞다''는 '연계론'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거 네오콘의 주장입니다. (탁자를 탁탁 치면서) 그게 후회를 남긴 겁니다. 북핵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았을 때 남북관계가 오히려 반 발짝 앞서갔더라면 북핵문제도 이렇게 터덕거리지 않았을 거고, 남북관계도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좋은 결과를 이미 내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미적거리다가 북미간에 합의가 상당 정도 진전되는 걸 보고서야 뒤늦게 올라타려고 한 게 10월 정상회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갈 생각은 못하고 편승하려고 하다 보니 정상회담에서 나온 합의서가 그야말로 불쌍하게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80 노인이 낳아 놓은 자식처럼 돼버렸어요. 아니? 부모가 애 돌은 챙겨줄 수 있게 일을 벌였어야지...너무 늦게 했어요.

"북한이 예뻐서 정상회담 하라는 거 아니잖아요"

이명박 정부가 10.4선언을 이행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고 자꾸 그러는데 5~6년씩 걸릴 일들이 많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1년 단위로는 사실 얼마 안 들어요. 그리고 코스트가 들어가면 베네핏이 나오는 겁니다. 또 이명박 정부가 10.4정상선언을 5년간 잘 이행해서 남북관계를 반석위에 올려놨다...그래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경제협력 필요 때문에 현저하게 완화됐다...그렇게 되면 그게 왜 전 정부의 공이 됩니까? 현 정부의 공이지.

코스트-베네핏 차원이 아니라, 잘 하면 더 높은 차원의 전략적 이득을 10.4선언 이행과정에서 챙길 수 있어요. 무슨 말이냐? 북핵문제가 어느 정도 고비를 넘기면 9.19공동성명 4항에 따라 남북미중 4자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를 논의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바마가 당선되면 그 시기가 아마도 이명박 정부 임기 내에 도래할 겁니다. 전시작전통제권도 돌아오죠.

그 때, 누가 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와 합의의 주역이 되느냐. 남북이냐, 미북이나, 미중이냐는 우리한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마침 작년에 남북 정상이 합의하기를 남북이 기본이 되는 3자 또는 4자 방식의 '한반도전쟁 종선선언'을 하기로 했단 말예요. 이걸 잘 발전시키면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남북이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북한이 고와서 정상회담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전략적 손실을 막고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러라는 겁니다. 북핵 해결과 북미관계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라도 남북관계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돼야 합니다. DJ가 내년 안에 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 건 이런 정세 판단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빼주고 나니까, 한나라당에서는 우리가 제3자로 전락했다는 불만이 나왔다더군요. 그건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한미동맹 우선론으로 남북관계를 풀어나겠다고 했으니, 북한은 우릴 상대할 필요도 없고, 북미간에 어떤 얘길 주고받았는지 귀동냥도 할 수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중국도 6자회담 의장국이지만 '무슨 얘기 따로 들은 거 없냐?'고 우리한테 물을 필요도 없고, 우리가 해줄 얘기도 없어진 거예요.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미북 또는 미북중 사이에 다 결정되고 나서 미국이 우리한테 먼저 얘기했는지 중국한테 먼저 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북한이 그렇게 만든 겁니까? 미국이 그런 겁니까? 아니잖아요. 남북관계 복원 안 해놓으면, 앞으로 이런 일은 계속 일어 날 겁니다.

그러니까 빨리 손을 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6.15와 10.4선언을 이행의지를 명확히 하고, 부정한 적 없다느니 뭐니 꼬아서 말하지 말고, 인도적 지원도 재개하고 남북관계를 빨리 복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2009년엔 정상회담을 해서 우리 국민들이 '아, 이제 외교적으로도 꿀릴 게 없구나. 정부가 외교도 잘하고 있고 남북관계도 잘 돼가고 있구나. 이제 경제만 살아나면 되겠네...'하는 안도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참모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말씀을 제발 허투로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現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경남대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