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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장갑을 낀 강철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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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장갑을 낀 강철 주먹"

다큐멘터리로 보는 오바마의 정치역정 <중> 정치입문

지난 29일 <E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인종을 넘어 백악관을 꿈꾸다, 버락 오바마'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 공영방송 <PBS>가 제작한 이 다큐를 지상 중계한다.<편집자>

연방 상원에 입성한 2005년 오바마는 한 해를 조용히 보냈다. 2006년이 되자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됐다. 오바마는 더 활발해졌다. 동료 민주당 의원들을 돕는데 주안점을 뒀다. 대통령 출마를 목표로 동료 의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다.

연설을 할 기회가 있으면 오바마는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부지런히 알렸다. 이라크 전쟁 반대, 교육과 보건, 에너지 정책, 정부의 역할 등

지지자가 늘어나자 오바마와 참모들은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캠프의 전략가인 액셀로드는 "오바마 역시 확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문제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톰 대슐(왼쪽)은 오바마의 핵심 측근이자 멘토이다.

그럴 때면 그는 종종 선배 정치인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가 가장 신뢰한 거물 중 하나는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톰 대슐이었다.

"우린 단골식당에 자주 갔습니다. 전 오바마에게 출마를 권했죠. 머뭇거리지 말라고 했어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상원에 오래 있을수록 '그 표결에서는 왜 찬성했나' '그 때 그런 말은 왜 했나' 등등에 대해 변명할 게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오바마는 가장 친한 친구와 보좌관들을 불러 모았다. 자기가 대통령에 출마하면 어떤 질문과 공격을 받을 수 있을지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대선 출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 중엔 성공한 흑인 친구들이 많았다. 한 친구는 "미국은 아직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내 생각은 달라. 지금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럴 거야. 내가 그런 선입견에 도전하겠어"라고 맞섰다.

<전편 보기>

<상> "연설은 좀 하는데 상원은 좀 몰라요" - 시카고와 하버드 시절

<'오바마 스토리' 연재 다시보기>

<상> 오바마, 아버지의 이름으로 - 몸으로 역사를 가르쳐준 그들
<중> 흑인, 위대한 유산 영광스러운 짐 - 흑인으로 산다는 것
<하> 미국 정가에 느닷없이 등장한 흑진주 - '바위' 같은 아내 미셸

'선거 추천인 명부를 뒤져라'

오바마의 정치역정은 오래된 선입견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의 정계 입문부터가 그랬다.

일리노이의 주 상원의원이었던 엘리스 파머는 1995년 오바마에게 자기 자리를 이어받으라고 권했다. 자긴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하기 때문에 주 상원의원 자리가 공석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머는 민주당 경선에서 잭슨 목사의 아들에 패한 뒤 오바마에게 돌아와 출마를 포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주 상원의원이라도 다시 해야겠다는 것이다. 파머는 심지어 시카고 시민운동계의 거물이 포함된 사절단을 오바마에게 보내 출마 포기를 요구했다.

열심히 노력해 주 상원에 들어갈 기회를 겨우 잡았는데, 자기보다 훨씬 오래 일해 온 흑인 지도자들이 정계 진출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기회는 다시 올 걸세. 조금만 더 기다려. 파머에게 양보하게. 출마를 권한 사람도 파머 아닌가?"
▲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출마해 선거운동을 하는 오바마

그러나 오바마의 답은 '노(No)'였다. 그리고 물러서지 않았다.

"선거 자금을 모으고 사무실을 열고 운동원을 뽑고 이름을 알려 왔는데 이제 와서 물러나란 말야? 상황이 달라졌다고 이제 와서 물러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오바마는 파머의 요구에 '시카고 스타일'로 대응했다. 다른 후보의 추천인 명단을 확인해 추천 과정에서의 오류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의 태도는 강경했다. 파머가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추천인과 선거인 명부를 샅샅이 대조한 것이다. 다른 후보들의 것도 대조했다.

그 결과 오바마는 경쟁자 없이 첫 번째 선거를 이기게 됐다. 손쉬운 승리였다.

한 참모는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정치 슬로건만으로 오바마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강인함을 봤어요. '벨벳 장갑을 낀 강철 주먹'이었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오바마는 충분히 검지 않아"

2000년이 되자 오바마는 연방 하원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번에 맞붙은 상대는 더욱 막강했다. 시카고 흑인 공동체에서 잔뼈가 굵은 민주당의 4선 바비 러시였다.
▲ 2000년 민주당내 경선을 위해 바비 로시와 토론중인 오바마

흑인 인권운동가인 제시 잭슨 목사는 러시에 대해 "1965년 결성된 미국의 급진적 흑인 결사 블랙 펜서(Black Panthers) 출신으로 강인한 거리의 남자란 이미지를 얻었어요. 블랙펜서에서 나온 뒤에는 정치인이 됐는데 과거의 강인한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흑인 공동체의 지지도 받고 있었죠"라고 평가했다.

오바마는 러시와 싸우기 위해 흑인 거주지의 젊은 유권자들을 공략했다. 선거운동 중 오바마는 단결을 강조했다. 서로를 돕고, 사회의 가장 약한 이들을 도와야 하며, 밑바닥부터 공동체를 재건해야 한다고. 오바마는 흑인과 백인의 공통적인 문제를 찾아내 제기하는 전략을 썼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공공연히 그의 경험 부족과 정체성을 문제 삼았다. 흑인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그가 충분히 검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흑인 운동에 얼마나 헌신했냐는 것이다.

오바마와 맞붙은 흑인 정치인들은 늘 그가 충분히 검은가에 대해 문제를 삼았고, 오바마는 고전했다. 유권자들은 의혹의 눈으로 오바마를 봤다. 바비 러시 진영도 계속 그 문제를 제기했다. 엘리트주의자란 의혹도 샀다. 하버드 출신에 언변까지 뛰어난 오바마가 흑인의 고통을 아느냐는 의심을 받았다.

주간지 <시카고 리더>엔 인종차별에 대한 긴 기사가 실렸는데 오바마의 정적 중 하나는 그에 대해 '검은 얼굴을 한 백인'으로 통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캠프에 있던 한 참모는 "고약한 공격이었다. 흑인 민족주의자들이나 흑인 공동체 관계자들은 오바마를 깎아 내리기 바빴다. 온갖 의혹이 난무했고, 오바마가 백인과 유대인의 앞잡이라고 욕했어요"라고 말했다.

케네스 맥 하버드 로스쿨 교수는 "충분히 검지 않다는 비난은 늘 오바마를 따라다녔다"라며 "오바마는 그 공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유권자들에게 잘 먹혀들어간다는 사실에 경악했다"라고 말했다.

오바마를 쓰러뜨린 클린턴의 음성

하지만 오바마는 자신이 시카고에 단단히 뿌리내렸다고 믿었다. 시카고에 살았고, 흑인들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시카고 출신 미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점이었다.

제시 잭슨 목사는 "미셸의 뿌리는 남편보다 훨씬 깊었어요. 시카고 흑인 중산층 집안 출신이고, 노동자 집안 특유의 가치관과 종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시카고의 공립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친구들도 많고, 그래서 시카고 토박이가 아닌 오바마보다 더 많은 사람과 단체를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바마의 친구인 카산드라 버츠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 덕분에 오바마는 시카고 흑인 공동체에 더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어요. 미셀은 인맥의 연결고리였죠. 인생의 동반자이고 오바마한테 정서적 안정을 주죠. 시카고 토박이란 점도 큰 힘이 됐구요. 물론 두 사람은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결혼했죠."
▲ 제레미 라이트 목사는 강력한 흑인 민족주의에 기반한 설교로 유명하다.

시카고 흑인 공동체 안에는 오바마가 뿌리내리고 싶어 하는 곳이 또 하나 있었다. 교회였다. 오바마는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들을 만나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교회를 골랐다. 교회의 분위기나 평판을 물어보면서 자기 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교회를 찾아 뿌리를 내리고 싶어 했다.

그가 고른 곳은 트리니티 교회였다. 시내에 있는 이 교회는 교인이 많고 사회사업도 많이 하는 곳이었다. 시카고의 흑인 엘리트들도 많이 다녔다. 담임목사인 제레비 라이트는 아주 멋진 설교를 하고 학식이 깊고 교인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특히 라이트 목사는 연설 중에도 "흰 피부가 검은 피부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등 전투적인 설교로 유명했다. 덕분에 시카고의 흑인 엘리트들은 설교를 들으며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다. 자신이 흑인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는 만족감.

트리니티 교회는 오바마에게 개인적로나 정치적으로 적당한 교회였다. 그러나 바비 로시와의 싸움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민주당 경선을 일주일 앞두고 로시는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찬조 연설을 내보냈다. 그건 오바마에게 치명타였다. 그래서 결국 더블 스코어로 패했다.

오바마한테는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자길 받아주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카고트리뷴>의 칼럼니스트 살림 무와킬은 "이 패배를 통해 오바마는 자기가 지지를 호소해야 할 대상은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흑인 노동자 계층이 아니라 진보적인 백인과 진보적인 흑인이라는 걸 깨달았죠. 정치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각을 가진 겁니다"라고 말했다.

제레미 라이트 목사, 인연의 시작

오바마는 2004년 연방 상원에 도전하기로 하고 진보적인 유권자들을 결집시킬 방법을 찾았다. 라이언 리자 <뉴요커> 기자는 "2000년 선거 당시 오바마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늑대 같았죠. 지지자도 많지 않았고, 치밀한 계획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오바마 답지 않은 선거였어요. 2004년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만전을 다했죠"라고 말했다.

그는 선거전략가 액셀로드를 영입했다. 오바마한테는 얘깃거리가 있었고 액셀로드는 이야기의 핵심을 뽑아 유권자들을 움직이는 기술을 알았다.
▲ 라이트 목사와의 즐거웠던 시절

액셀로드는 "공동체 조직가 경력은 흑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하버드 졸업 경력은 백인들이 '아!' 하고 오바마를 받아들이게 해줬죠"라고 말했다.

선거 운동에서 오바마의 라이프스토리를 다룬 광고는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그 때도 오바마의 구호는 지금과 같은 "예스 위 캔(Yes We Can)"이었다.

2000년 바비 러시한테 뼈아픈 패배를 당한지 4년 만에 오바마는 연합전선 구축에 성공했고 선거에서 승리했다.

오바마의 당선 축하 파티는 헤럴드 워싱턴 시장의 당선 때와 같았다. 파티장에는 젊은 형제의 당선을 기뻐하는 흑인들이 많았다. 백인들도 보였다. 워싱턴을 지지했던 진보 성향의 백인들이었다. 흑인들과 백인들이 함께 기뻐하는 모습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2007년 오바마 진영은 흑백 연합전선을 재가동해 대통령에 도전하기로 한다. 미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훨씬 큰 연합전선이 필요했다.

그는 2007년 2월 10일 일리노이주 스피링필드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 자리엔 라이트 목사가 나오지 않았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문제가 어느 정도로 커질지, 또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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