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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산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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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산 남겨두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24> 늘재~이화령/7.15~17

산행 열아흐레 째. 화요일.

숲은 여름이 깊어 있었다. 나뭇잎들은 짙푸르고 가지들은 무성했으며 큰 비와 바람을 이겨낸 나무들은 듬직해져 있었다. 숲은 햇볕이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그늘을 드리워 울울창창했다. 끝 모를 울창함 속으로 새벽은 안개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새벽 숲 안개 그득하여 길은 보이지 않았고 숲을 지나는 이들은 풀잎과 나뭇잎에 몸을 적시며 숲으로 들어갔다. 새벽 숲의 안개가 조금씩 걷혀갈 무렵 몸을 적시던 숲은 마음으로 젖어들었다.

두 주일만의 종주 산행이었다. 지난 두 주일 다큐멘터리 '백두대간 공존의 숲' 촬영을 하였다.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하늘 길의 처음인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정령치와 노고단에서 촬영을 하였다. 노고단에 올라 눈길을 따라 나있는 백두대간 길을 바라보았다. 망연히 바라보다 노고단을 내려와 중산리로 향했다. 다음날 새벽 천왕봉의 일출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바람에 흔들린 나뭇가지 서로 몸 부딪히며 '차르르 차르르 탁탁탁탁' 소리를 내던 밤, 하늘에 별 가득하여 바람을 따라 출렁일 것만 같던 밤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별빛이 산길에도 내려와 가는 길 비춰 주던 밤이었다. 별빛 부여잡고 천왕봉을 향한 밤이었다. 숲은 고요하고 깊었다. 깊은 적막은 오랜 벗처럼 곁에 머물러 살가웠고 발자국 소리는 산을 돌아 울려 나는 듯 멀었다. 작은 철교를 지나 합수목에서 잠시 쉬었다. 어둠은 깊었고 밤 숲은 서늘했다. 서늘한 기운이 잠 못 이룬 밤의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하늘 길로 들어서기 위한 첫 관문인 개천문(開天門)을 눈앞에 두고 쉬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바위에 몸 기대었다. 하늘의 별 부서져 쏟아지고 있었다. 산중에 별 가득했다. 산길마다 별 빛나고 나뭇가지에도 별 내려 있었다. 한 별 한 별 모두 제 빛을 잃어버리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영롱했다. 눈부셨다. 아름다웠다.
별빛들은 촛불을 닮아 있었다. 지난 6월 서울 시청 앞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던 촛불을 닮아 있었다. 아니 그 촛불들이 별빛을 닮아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촛불들도 이 별빛처럼 이렇게 아름다웠었다. 영롱하고 눈부셨었다. 별은 깊은 산 중에서 빛나고 촛불은 산 아래 사람 사는 세상에서 빛나고 있었다.
"참 아름답지요?"
나와 함께 후미에서 산행을 하고 있던 한 대장이 말을 건넸다. 나는 그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별 빛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는지 촛불의 영롱함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이 났다. 동트기 전 이른 새벽 깊은 산속에서 별빛을 바라보며 눈물 흘렸다. 어둠이 눈물을 가려 주었다. 산 중에 가득한 별 빛이 눈물을 덮어주었다.
▲붉은 해가 떠오르다 ©이호상

천왕봉에 올랐다. 새벽 5시 10분이었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밤 세석대피소나 장터목 대피소에서 잔 사람들이었다. 3대에 걸친 조상님들의 공덕이 있어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일출이었다. 구름은 지난 밤 채 나누지 못한 사랑이 아쉬웠던지 중봉을 애무하듯 타고 넘었고 저편 산등성 넘어 하늘은 붉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이 하늘에 점점 차오르자 붉은 해가 허공에서 튀어나오듯 불쑥 솟아올랐다. 장관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황홀한 광경에 탄성을 질렀다. 붉은 기운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그 황홀한 광경을 보며 나는 홀로 조용했다. 침묵했다. 마음 한 구석 서럽고 아팠다. 서글펐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을까. 너무 붉었기 때문이었을까. 그 붉은 아름다움이 이곳에서 흘린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 같기도 하고 핏빛 같기도 했다. 하늘 길이었고 생명의 땅이었던 이 곳 지리산을 적신 눈물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지나치게 붉은 기운 탓이었을까. 너무나 아름다웠던 탓이었을까.
그렇게 아픈 새벽이었다.

산행은 버리미기재에서 시작했다. 늘재에서 버리미기재로 가야 했으나 비법정탐방로가 있다는 이유와 산행이 힘들다는 이유로 버리미기재에서 늘재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산길마저도 제 뜻대로 다닐 수 없고 촛불도 제 마음대로 켤 수 없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고단한 삶에서 하늘을 향한 염원으로 바라보고 걸었던 하늘 길을 막아서고, 건강하게 살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촛불을 힘으로 끄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가슴 아팠다. 버리미기재라는 슬픈 이름만큼이나 마음 시리고 아팠다. '버리미기'는 '보리먹이'가 변형된 말이다. '보리나 지어먹던' 궁벽한 곳이라는 뜻이다. 다른 견해도 있다. '빌어 먹이다'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롯한 지명이라는 것이다. 어느 것 어느 주장을 취하든 '버리미기'라는 지명에는 산골에 불 놓아 마련한 손바닥만한 밭뙈기에 목숨 의지하던 화전민들의 애달픈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 ©이호상

안개에 젖어있던 숲에 햇살이 깃들고 있었다. 숲을 감싸고 있던 안개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안개 그득하여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밧줄에 의지해 암벽을 오르고 내리는 내내 아주 오래 전 버리미기재에 살았던 이들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나뭇잎 한 장이 숲을 이루듯이 한 사람 한 사람 세상을 이루며 살았으리라.
그들의 마음이 꺾이고 소망이 꺾인 듯 했지만 그 마음으로부터 세상이 이루어지고 소망으로부터 세상에 빛이 들어왔으리라.

"숲은 이런 마르고 비틀린 나뭇잎 한 장으로부터 시작되지요. 나뭇잎 한 장의 광합성을 통해 나무는 자라지요. 나무들 또한 자신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필요 없는 나뭇잎들을 생산하지요. 벌레들이나 다른 생명들에게 먹이로 내어주기 위해서이죠. 그 나뭇잎을 먹기 위해 벌레와 곤충들이 모여들지요. 그리고 벌레와 곤충들을 먹기 위해 새들이 깃들고요. 숲은 이렇게 이루어지지요. 거대한 숲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뭇잎 한 장으로부터 이루어지지요."

지난 주 이른 새벽 천왕봉에서 했던 촬영이 생각났다. 나는 다큐멘터리 '백두대간 공존의 숲'을 찍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는 마음을 묻는 전영갑 감독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었다.

나뭇잎 한 장을 만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나뭇잎 한 장으로부터 시작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관계들을 살펴보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다른 것이 아름다운 것인 숲의 공존을 살펴보기 위해 들어간다고 말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는 숲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하며 들어간다고 말했다.

걸음은 어느 새 곰넘이재를 지나 불란치재에 이르고 있었다. 종이에 '불란치재 510m'라고 쓰여져 코팅된 안내판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이 초라했다. 오늘날 불란치재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했다. 불란치재의 옛 이름은 불한령(弗寒嶺)이다. '춥지 않은 고개'라는 의미이다. 대야산과 장성봉에 가로막히고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의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어 한겨울 찬바람에도 포근하다고 하여 불한령으로 불린 것으로 생각된다. 버리미기재를 넘는 922번 2차선 포장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문경의 가은읍 완장리와 충북 괴산의 청천면 관평리를 이어주던 옛길로 통행량이 제법 많았던 고개이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면서 불란치재는 버리미기재에게 922번 포장도로를 넘겨주고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길이 되었다. 옛길의 흔적만 있을 뿐 지나는 이 거의 없는 옛길이 되었다. 걸어 다니던 시대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시대로 바뀌며 잊혀 진 길이 된 것이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도 문명에 의해 잊히고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불란치재에서 산행에 지친 몸을 쉬었다.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 본다면 얼마나 우습겠어요? '저놈들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갈 것이지 어제는 우르르 올라오더니 오늘은 또 우르르 내려가고 왔다갔다 하니 도대체 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하지 않겠어요?"

내 말에 모두들 헤벌쭉 웃었다. 나도 덩달아 헤벌쭉 웃었다.
▲대야산으로 가다 ©이호상

다시 길을 이어갔다. 촛대봉을 지나고 촛대재를 지나자 암벽이 거듭 길을 막았다. 밧줄에 의지해 암벽을 올랐다. 밧줄에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촘촘히 매듭이 매어져 있었다. 밧줄을 오르며 '삶에도 이런 매듭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기묘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주는 암봉을 오르자 대야산(大耶山, 930.7m) 정상이었다. 산은 첩첩하고 끝이 없었으나 바람 한 점 없었다. 산 정상은 바람소리조차 없이 고요했다. 허공을 치고 오른 거대한 암봉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암봉은 치솟는 듯 흘러내리는 듯 형체를 알 수 없었다. 이 거대한 암봉도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려는지 그 형체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야산은 거대한 바위들과 숲이 어우러진 절경을 품고 있었다. 그 기묘하고 절묘한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산림청은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맞아 대야산을 문경의 다른 산들인 주흘산, 황장산, 희양산과 함께 한국 100대 명산에 그 이름을 올려놓았다.

대야산에서 내려와 밀재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고모령을 지나니 조항산(951m)이 지척이었다. 조항산에 오르니 백두대간 조항산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 곁 풀숲에 기린초 피어 외로웠다. 오후부터 흐려지던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두텁게 드리워 있었다. 산줄기는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산은 머물러 있지 않았다. 흐르고 있었다. 구름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흐르고 있었다. 내리는 빗줄기처럼 물줄기 되어 흐르고 있는 듯했다. 짙게 드리운 검은 구름과 흐르는 산줄기 사이에 있는 바위의 갈라진 틈에서 양지꽃 몇 송이 자라고 있었다. '사랑스러움'이라는 꽃말답게 아름다웠다. 사랑스러웠다. 산행이, 피곤함이 사라지는 듯했다.

검은 구름 짙게 드리우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위는 어두워진 하늘 탓인지 급격히 어두워졌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 청화산(靑華山, 984m)을 향했다. 청화산에 다다랐을 때 한문희 대장은 산행을 중지시켰다. 지친 몸으로 비오는 날 밤 암릉이 많은 청화산을 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 ©이호상

청화산을 남겨두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멀고도 길기만 했다. 눈앞에 보이던 저수지는 걷고 걸어도 나타나지 않았고 겨우 이르러서는 저수지를 돌아 나가느라 먼 길을 걸어야 했다. 저수지는 듬성듬성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잡풀 무성하였다. 가문 저수지의 수면에 노을 비치었다. 잡풀 무성한 탓이었을까. 바랜 낡은 옷처럼 노을도 바랜 듯 했다. 검은 구름 탓이었을까. 노을도 탁한 듯 했다. 그도 아니면 지친 내 몸과 마음 탓이었을까. 노을이 어둠과 함께 내리는 듯 했다.
청화산을 남겨 두고 오는 마음이 허전해서였을까.
끝나지 않는 저수지 길이 무료해서였을까.
노래를 불렀다. 아주 오래 전 사랑했던 노래다. 오랜 날들 동안 잊고 있었던 노래이다. 하종오의 시에 이건용이 가락을 붙인 '그렇지요'라는 노래다.

올 때쯤이면 오겠지요 그렇지요
생사람으로 아니온다면 죽은 사람으로 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이 땅에 남는 길은 이 땅에 남는 길은 삶과 죽음 삶과 죽음
삶과 죽음 한꺼번에 삶과 죽음 한꺼번에 있으니
살아있으면 보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올 때쯤이면 오겠지요 그렇지요
생사람으로 아니온다면 죽은 사람으로 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죽어도 이 땅에만 죽어도 이 땅에만 묻힌다면 묻힌다면
무덤으로 이 산 저 산 무덤으로 이 산 저 산 바라보며
서로 만나 보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올 때쯤이면 오겠지요 그렇지요
생사람으로 아니온다면 죽은 사람으로 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더구나 살아가고 더구나 살아가고 있다면야 있다면야
이 사연 저 사연 이 사연 저 사연 가슴으로
나눌 날이 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청화산 남겨 두고 오는 길 가문 저수지에 마음 한 조각 남겨두려는 듯 오랜 날 마음에만 있던 노래들을 불렀다.
청화산 맑은 기운에 마음 씻어내고 싶은 저녁이었다.

('버리미기'의 어원에 대해서는 '민병준의 백두대간 가는 길'에서 그 대강을 빌려오다.)

※바로잡습니다 : 지난번 (늘재는 걸음을 늘이고) 글에서 길을 잃고 들렸던 산자락은 백화산이 아니라 백악산입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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