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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위령비에 펄럭이는 히노마루 깃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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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위령비에 펄럭이는 히노마루 깃발의 의미

[권혁태의 일본 읽기] <22>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가면

히로시마에 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히로시마 역에서 시내 중심가로 진입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거대한 공원 시설에 '갑자기' 조우하게 된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같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공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여의도 광장이나 혹은 모스크바 광장, 혹은 천안문 광장처럼 도시 중앙에 갑자기 나타난 황량한 아스팔트 바닥도 아닌, 샛강에 둘러싸여 적당한 나무와 적당한 아스팔트로 '치장'된 인공적인 공원. 그곳이 바로 히로시마 평화공원(Hiroshima Peace Park)이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은 몇 가지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박물관 기능을 하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사망자에 대한 추도 기능을 하는 국립 히로시마 원폭 사몰자(死没者) 추도 평화기념관(Hiroshima National Peace Memorial Hall for the Atomic Bomb Victims), 약 25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의 명부가 안치되어 있는 원폭 사몰자 위령비Cenotaph for the A-bomb Victims), 그리고 공원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위령비, 그리고 샛강을 사이에 두고 공원의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1996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원폭 돔(A-Bomb Dome) 등이다. 원폭이 떨어진 폭심지를 중심으로 건설된 이 공원은 일본 평화를 상징하는 심장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거대한 면적(122,100㎡=37,000坪)을 자랑하는 이 공원은 수학여행 학생들을 포함해 연간 수십만의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히로시마 시 인구가 약 100만 명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연간 거의 도시 인구규모와 맞먹는 내외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매년 8월이 되면 각종 반핵집회와 평화 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반핵 평화운동의 거점이면서 핵무기의 비참함을 확인할 수 있는 반핵평화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1945년 이전=피폭 전에는 약 700개의 건물과 2,600명의 인구가 거주하던 히로시마 최대의 번화가였던 이곳이 공원으로 탈바꿈하는 전후사는 거대한 군사도시였던 히로시마가 '평화도시'로 탈바꿈하는 과정 그 자체를 대표한다. 물론 이 같은 '평화의 상품화'에 대해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인 1965년 8월 4일자 아사히 신문은 <히로시마 65년>이라는 특집 연재 기사 속에서 히로시마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여름이 되면 갑자기 늘어나는 여행객은 우선 원폭 자료관을 찾는다. 자료관에서 다소 한기가 드는, 그러나 짧은 견학을 마치면 관광객은 근대적인 평화공원을 걸으면서 전위적인 많은 평화와 기도의 기념비를 쳐다보게 된다. 무너질 것 같은 원폭 돔. 그리고 관광객은 번화가로 돌아가고 관광단은 버스를 타고 미야지마(宮島) 이쿠시시마(巌島)로 간다. 이를 3년전에 미국의 뉴욕 타임즈는 '과거의 비참함을 팔고 있는 히로시마'라고 비웃었다."

비슷한 시기에 히로시마를 찾았던 유럽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군터 안데르스(Günther Anders, 1902-1992)는 "여행객이여! 미야지마는 그만 두어라! 이쿠시시마는 그만두어라! 그리고 히로시마에 머물러라! 히로시마에 머물러서 마을에서 마을로 다리에서 다리로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라. 떠돌면서 생각을 해보라! 당신이 떠돌아 다니는 장소가 어디인지, 당신은 누구의 위를 무엇의 위를 떠돌고 있는지를!"를 외친다.

미야지마 이쿠시시마는 히로시마의 바다쪽에 위치한 일본 삼경 중의 하나로 유명한 곳이다. 흔히 바다 속에 있는 신사로 유명한 이곳을 빗대고 있는 것이다. 히로시마의 평화는 미야지마 관광의 '끼워팔기' 같은 것인 셈이다. '상품'으로 전락한 히로시마의 '평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화'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우뚝 서 있는 건조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관광객은 그 다지 많지 않다. 원폭 위령비 바로 옆에 우뚝 그리고 돌연히 서 있는 히로마루 게양대이다. 1963년에 우익단체의 기부에 의해 건립된 시설이지만 시민들의 반대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히로시마의 '평화'를 볼 때 '당황'하는 것은 이럴 때이다. 혹은 히로시마의 '희생'을 가져다 준 전범 히로히토 천황이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 보여주었던 히로시마 시민의 환영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원폭 시인으로 알려진 구리하라 사다코(栗原貞子)는 히로시마 평화공원과 공원을 통해 '표상'하는 히로시마의 평화, 혹은 일본의 평화가 가지고 있는 허위의식에 대해 꼬집고 있다.

히로시마는 잔혹한 도시
평화공원 원폭 위령비의 하늘에 히로마루 깃발이 펄럭인다
일본의 히노마루로 붉게 물든
우리 아들의 피로 붉게 물든
깃발은 나라를 위해 천황을 위해
죽어라, 죽어라며 펄럭인다
히노마루 밑에서 안락하게 잠들 수는 없다
그래도 피스, 피스 히로시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설계한 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 건축가인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5)이다. 1949년에 제정된 '히로시마 평화도시 건설법'이라는 특별법에 의해 중앙정부의 재정지원 하에 건설이 시작된 이 공원은 1955년에 완공되었다. 따라서 그의 건축 설계안에 담겨 있는 사상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개의 샛강에 둘러싸여 있는 삼각주 형태의 부지에 어떤 양식의 건물을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냐에 있었다. 단게의 설계안은 1. 공원을 위령시설로 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기원하는 시설로 할 것인가. 2. 경관축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있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 단게는 말한다.

"그 무렵에는 오히려 위령탑을 중심으로 한 평화기념탑 같은 조형물을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했다. 당시 히로시마 시의 영국군 건축가는 계속해서 오층탑 같은 조형물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나는 그를 도쿄의 진재 공양탑(震災供養塔)으로 안내한 다음 그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이 같은 조형물이냐고 화를 낸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쿄의 진재공양탑이란 관동대지진 때 목숨을 잃은 희생자를 추도하는 신사나 불사 형식의 건축물을 말한다. 그는 이 시설은 어디까지나 천재지변에 의한 위령시설이지만, 히로시마는 천재가 아니라 일종의 인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령시설로서가 아니라 평화를 기원하는 시설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근대(전통) 풍의 건물이 아니라 현대적인 감각의 국제적인 서양식 건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화 공원 내에 평화기념관을 공원의 중심축으로 삼되, 위령은 별도의 조형물로 건립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평화기념관 앞에 작은 규모로 세워져 있는 원폭 위령비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평화공원은 기본적으로 위령시설이 아닌 평화기념 시설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하지만 위령=전통적인 의례는 공원의 전체적인 경관축에 담겨져 있다. 평화 도로를 뒤로 하고 공원의 정면을 바라보면, 평화기념관 앞으로 원폭 위령비가 있고 그 배후로 멀리 원폭 돔이 일직선으로 펼쳐지는 구도로 되어 있다. 원폭 돔에서 보면, 완만한 곡선으로 위령비를 덮고 있는 아치형 곡선 조형물을 거쳐 평화기념자료관의 필로티(piloti)를 관통해 평화대로로 이어지는 경관축인 셈이다.

이는 히로시마 소재의 이쿠시시마(厳島神社)가 육지 쪽에 서있는 신앙의 산인 미센(弥山)에서 본전(本殿)을 거쳐 바다속에 있는 도리이(鳥居)로 이어지는 경관축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쿠시시마 신사의 본전이 미센을 등에 업고 이쿠시시마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것처럼, 원폭 위령비는 원폭 돔을 등에 업고 히로시마 전체를 조망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기념관은 서양적(이를 단게는 국제주의적이라 표현한다)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경관축은 신사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게 설계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평화공원 설계안의 유래에 관한 것이다. 단게가 일약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42년에 실시된 일본건축학회에서 실시한 대동아건설영조계획 (大東亜建設営造計画)공모전에서 1등으로 수상한 작품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의 건축은 대규모 도시계획을 추진해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국가선전의 한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크고 높고 웅장하게! 파시즘 체제 하의 건축이 갖는 일반적인 성격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전시체제 하에서는 대규모 건축은 '사치'라는 이유로 엄격하게 억제되었고, 이에 따라 소규모의 건축이 난립하는 건축이 진행되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반발을 느끼고 있었던 일본의 근대적 건축가들이 기획했던 것이 이 공모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건축사에서는 일반적으로 1942년에 실시된 '대동아건설영조계획'을 파시즘의 일반적 도시계획으로 이전하는 획기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따라서 단게가 파시즘적인 건축 공모전에 입상해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설계안은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파시즘 체제가 종결된 패전 후, 히로시마에서 '평화'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해 실행에 옮기게 된다. 단게의 '대동아건설영조계획' 공모 입상작은 1949년에 히로시마 평화공원 설계안으로, 1955년 공원 완성으로 이어진다. 이를 건축사가인 이노우에 쇼이치(井上章一, 1955- )는 '충격적인 유사성'이라 한다.

그리고 이노우에는 단게 설계안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단게 설계안은 당시 동북 아시아의 식민지 도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모더니즘 양식 건축이나 1930년대 일본에서 나타났던 제관(帝冠)양식(철근 콘크리트의 현대 양식에 일본 풍의 기와 지붕을 올리는 서양과 일본을 절충한 건축 양식)과는 다르며, 일종의 전위적(avant-garde) 혹은 포스트 모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일본형 파시즘이 대두된 1930년대에 유행했던 '근대의 초극'에 대응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동아공영권'을 이론적으로 지탱했던 '근대의 초극론'이 패전 직후 소멸한 이후에, '대동아공영권'은 무너졌는데, 일본형 파시즘에 대응했던 '근대의 초극'에 입각한 건축양식이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히로시마의 기억이 전전의 대일본제국, 제국의 식민지적 행위, 그리고 그 귀결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 단게의 히로시마 평화공원 설계안(1949년) ⓒ권혁태

▲ 단게의 대동아건설영조계획 (大東亜建設営造計画) 설계안(1942년) ⓒ권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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