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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재는 걸음을 늘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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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재는 걸음을 늘이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23> 신의터재~늘재/6.24~26

산행 열아흐레 째. 목요일.

주인 없는 집에서 맞는 아침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루 전과 같았다. 여전히 별은 새벽하늘에서 빛나고 계곡에는 맑은 물줄기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주인 없는 식당으로 들어가 아침 식사를 하고 산행 준비를 하였다.

소나무식당민박집의 안주인은 석공 일을 하는 바깥주인과 낚시를 갔다. 아무리 지난 밤 첫인사를 하고 짧은 정이라도 나누었다지만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낯선 이들에게 식당과 집을 그대로 맡겨 놓고 길을 떠났다. 도시에서는 생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세속이 떠난 산자락(俗離山)에 깃들어 사는 동안 마음에 깃들어 있던 세속의 묵은 때들이 다 씻긴 것일까.
사람(人)이 골(谷)에 들면 그것이 바로 세속(俗)이거늘 이곳은 사람이 든 골인데도 세속을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 마음이 산을 지나는 바람처럼 초연하고 산처럼 의연하다.

여섯 째 주 산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모두들 지쳐있었다. 돌덩이가 달려 있는 듯 몸은 무겁기만 했다. 움직일 때마다 온 몸이 쑤셔왔다. 지난 이틀의 산행 탓도 있겠지만 지난 여섯 주 동안의 거듭된 산행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된 탓이리라. 산행으로 단련되어 있지 못한 몸은 일주일에 삼 일 씩 이어지는 산행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겨우 겨우 견디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긴 산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티재에서 버리기미재까지 가는 17.3km의 짧지 않은 거리였다. 게다가 꽤나 험한 산으로 알려져 있는 청화산(靑華山, 984m)과 대야산(大耶山, 930.7m)을 넘어야 했다.

'과연 산행을 잘 마칠 수 있을까.'

마음 한 구석 잦아드는 염려를 산자락에 내려놓고 산으로 들어갔다. 나무 사이로 난 길을 찾아 들며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가쁜 숨 몰아쉬며 바라 본 하늘은 티 한 점 없이 맑았다. 골은 숲이 토해내는 안개로 가득했다. 안개는 구름처럼 피어올라 그대로 운무가 되었다. 운무 피어 오른 골과 골은 서로를 부르며 일어나 부둥켜안은 듯 산줄기는 그대로 선경이었다. 마음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곳에 내려놓고 싶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이호상

이른 아침 산줄기는 선경이었지만 산을 지나는 이들은 고생이었다. 지친 몸에 배탈까지 났다. 지난 저녁 먹은 자연산 버섯 탓인 듯싶었다. 마음 아팠다. 아침부터 배탈로 고생하는 이들이 측은하여 마음 아팠고,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친절이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고, 우리 몸에 가장 맞아야 할 자연산 버섯을 먹고 소화시키지 못하는 우리의 몸을 느끼며 슬펐다. 자연과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우리 몸은 어느새 자연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인스턴트 음식에 적응되고 길들어져 있었다. 서글픈 아침이었다. 한 명씩 숲으로 들어가 볼 일을 보는 사이 나는 계속 걸었다.

숲은 아름다웠다. 눈길 닿는 곳마다 나무들 가득했다. 이 숲에는 소나무 가득했고 저 숲에는 참나무 가득했다. 소나무와 참나무들 함께 숲을 이룬 곳도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들은 없었지만 오랜 세월 견뎌온 나무들이 저마다 세월의 깊이를 드러내며 숲에 깊음을 더하고 있었다. 지나는 이들 없는 숲은 적막하리만치 고요했다. 밤티재에서 늘재 사이에 자리한 숲은 깊었다. 산길마다 여러 해 전부터 떨어진 낙엽들 두텁게 덮여 있었다. 마른 낙엽들 모두 부스러지지 않은 채 제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발길에 밟히고 채이지 않은 탓이리라.
산자락을 넘어 온 바람은 마른 잎 주위를 서성이다 제 갈 길로 가곤 했다. 숲은 고요하고 산은 침묵 속에 있었다.
그 깊은 고요함 때문이었을까. 그 깊은 침묵 때문이었을까.
그저 숲을 지날 때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려왔다.

'백두대간을 걷는다고 백두대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걸으면 걸을수록 백두대간을 잃어버리는 이들도 있지요.'
'그저 산길을 걷는 이들도 있지요. 그저 산 꾼이 되어 버린 이들도 있지요.'

마음의 소리였을까. 알 수 없었다.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 기울였다.

'백두대간을 걷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 그 마음을 오래도록 지킬 수 있을까.'
'산의 깊은 고요함과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오늘처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들려오는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고요하게 지킬 수 있을까.'

여러 생각들이 마음을 따라 일어났다. 메아리가 이는 듯 깊은 곳에서 울려나고 있었다. 중세 신비주의자들 중 일부에게서 행해졌던 '바보의 길'이라는 수련 과정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과정에 들어간 이들은 입문 한 이후 알게 된 자연과 우주의 놀라운 비밀들, 삶의 모든 비밀들을 말하지 않아야 했다. 침묵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가르치는 지혜 중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침묵의 지혜였다. 아는 것을 말하지 않는 지혜였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참다운 지혜임을 가르쳤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인류역사의 모든 지혜서들은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듣는 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가 살아나는 것이다. 말하는 지혜가 아니라 듣는 지혜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지혜가 필요하다.

'침묵하는 이 산도 바보의 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 아닐까?'

정신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따라가다 피식 웃음이 났다. 산이 바보의 길에 들어섰을 리는 없는 일이다. 사람이 때로 분별을 잃을 뿐이다.
▲ ©이호상

발소리 들려왔다. 곁눈질로 바라보니 김남균 대장과 김명옥 작가였다. 나와 함께 계속 걸어왔을 텐데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괜스레 저 혼자 미안한 마음 숨기느라 김남균 대장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간다던 늘재는 왜 안 나와요? 벌써 두 시간이 넘었어요? 두 시간이 뭐야 세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러게요... 천천히 가고 계세요."

김 대장 뒤로 쳐졌다. 우리는 앞서 간 선두 조의 발걸음을 쫓아 좁은 숲길로 들어갔다. 길은 때로 산허리를 아슬아슬하게 감아 돌았고 때로 경사가 심한 비탈길을 타고 올랐으며 때로는 커다란 바위를 지나기도 했다. 늘 저희들끼리 내 뺀다고 해서 '빼 조'라고 부르는 선두 조는 어디까지 갔는지 아무리 걸어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아요.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싶어요."

김 작가의 말이었다.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전화가 왔다. 김 대장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으니 더 이상 진행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우 대장을 기다리라는 전언이었다. 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았다. 지친 몸을 쉬었다. 그만 걷고 싶었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길을 걸어왔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걸어온 것이 꼭 우리 삶을 닮았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우대장과 선두 조가 돌아왔다.
우리는 백화산 가는 길에 들어서 있었다. 백화산이 눈앞이었다. 거의 두 시간을 걸어왔다. 오전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늘재를 지나고 청화산 정상에 있어야 할 시간에 우리는 백화산 자락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만 걷자고 말해 볼까. 오늘은 산행을 여기서 마치자고 말해 볼까.
▲청화산을 바라보며 내려오다 ©이호상

망설였다. 우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은 산행을 여기서 마쳐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진행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산에 오르면 저녁 전에 내려 올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우리는 모두 만세를 불렀다. 물론 속으로 불렀다. 바람이 상쾌했다.

"늘재가 우리의 걸음도 늘인 모양이에요. 길을 잘못 드는 일이 다 벌어지다니 말이에요."

늘재란 길게 늘어진 고개라는 뜻이다. 그 뜻에 비추어 한 말이었다.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친 몸을 쉬어가라고 말이다. 욕심내어 애써 가지 말고 마음과 몸을 회복한 후에 산을 느끼고 즐기며 천천히 걸어가라고 말이다.

늘재로 향했다. 마음 가벼웠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길은 가깝지 않았다. 멀었다. 오랜 시간 다른 길로 접어든 탓이다. 그래도 고마운 일이다. 인생길과 달리 이렇게 돌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다시 생명으로 돋아나고 ©이호상

나뭇잎들 길에 수북하였다. 여러 해 동안 떨어진 잎들이다. 마른 잎들이다. 밟힐 때마다 바스러지며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린 싹이었다. 어린 싹이 깊은 숲길에 저 홀로 피어 여린 잎을 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생명이 주는 아름다움이었다. 몸 설레고 마음 달떴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숲을 벗어나니 햇살 따가웠다. 뙤약볕이었다.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차에 올랐다.

소나무민박식당으로 돌아와 계곡 옆 돌 탁자에 앉아 식사를 하였다. 오후 산행이 없는 탓인지 모두들 식사를 많이 했다. 갑작스레 비가 내렸다. 소나기였다. 우박이 섞여 있었다.
유월 말에 우박이라니.
모두들 늘어놓은 그릇과 배낭을 옮기느라 요란했다. 소나기는 그치고 햇볕이 났다.
걸음 늘여 놓은 늘재가 마음도 늘여 놓은 듯 이래저래 마음 분주하고 몸 어수선한 산행이었다.
계곡 흐르는 물소리 맑고 시원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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