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천왕봉은 강을 품어 흐르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천왕봉은 강을 품어 흐르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22> 신의터재~늘재/6.24~26

산행 열여드레 째②.수요일

깊고 첩첩한 속리산의 산줄기들을 가슴에 담은 채 올라온 길을 따라 문장대를 내려왔다. 문장대가 지척이건만 세속에 들어선 듯 번다했다. 세속이 떠난 고요한 산을 찾은 이들은 왁자지껄했고 휴게소에서 식수를 구하려던 김명옥 작가는 생수를 사라는 주인장에 말에 쫓겨 나왔다. 신선대(神仙臺, 1,016m)로 향했다. 길은 잘 닦여 있었다. 거대한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든 계단이 차곡차곡 쌓인 듯 놓여 있었다. 길은 편안했지만 힘들었다. 어제 산행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오늘 아침 암릉을 오른 탓이었다. 신선대에 가면 맛이 환상인 빈대떡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힘을 얻었다. 오전 11시 6분 문수봉을 지나 신선대에 도착했다. 신선대의 모습은 이름과 달리 초라했다. 그 옛날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없이 날아와 춤추고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대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백학이 깃들고 신선이 머물렀을 것 같지 않았다. 신선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찾아 왔었다는 고승이 본 것은 신선들이 아니라 산에 들어온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신선이 뭐 별것이랴. 사람(人)이 산(山)에 들어왔으니 신선(仙)이 됨은 당연한 일이다.
▲문장대 휴게소 ©이호상

신선대 휴게소에서는 기대와는 달리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었다. 맛이 그만이라는 빈대떡은 물론 물도 구할 수 없었다. 주인장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탁자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마음 느긋해지는 것이 아쉬운 대로 신선이 된 듯도 하였다. 왁자지껄했다. 산악회에서 단체로 온 등산객들이다. 오랜만의 산행이 즐거운 듯 모두 얼굴에 생기가 넘치고 발걸음도 가벼운 듯 보였다.

"안녕하세요!"

"좋은 산행 되세요!"

인사를 나눴다. 점심을 마치고 오후 산행을 위해 준비를 했다. 에어 파스를 꺼내 무릎에 뿌리자 산악회에서 온 일행 중 한 명이 슬그머니 내 앞에 다리를 내밀었다. 얼굴을 보니 웃고 있었다. 에어파스를 뿌려주자 또 다른 친구가 다리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두 다리를 모두 내밀었다. 에어파스를 뿌려주자 물을 건넨다. 자연스럽게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반가움을 뒤로 하고 천왕봉을 향했다. 가는 길에 입석대와 상고석문을 지난다.

천왕봉과 입석대와 상고석문은 모두 8봉(峰), 8대(臺), 8석문(石門) 중 하나들이다. 속리산의 절경은 8봉, 8대, 8석문으로 대표된다. 8봉은 천왕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과 수정봉이고, 8대는 문장대, 입석대, 신선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다. 그리고 8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 등이다. 8봉, 8대, 8석문 등 모두 '8'자에 맞추어져 있다.
왜 속리산의 수많은 절경들 중 여덟 개만을 골라 이름 지었을까.
그것은 불교의 실천 수행인 8정도(八正道)에서 의미를 빌려 온 것이다. 8정도를 수행하여 열반에 들듯이 8석문을 지나 8대에 올랐다가 8봉의 너른 품에 안기면 그대로 부처님의 품에 안긴 듯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바램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 산과 맺은 불교의 오랜 인연이 남겨 놓은 가르침이리라.
▲숲 사이로 길은 열리고… ©이호상

임경업 장군이 7년간 수도 한 후 신통력을 얻어 세웠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입석대(立石臺, 1033m)를 지나자 조릿대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커다란 돌문인 상고석문(上庫石門)이 보였다. 법주사를 지을 때에 천왕봉에서 벤 소나무들을 저장해 두었던 창고가 바로 상고(上庫)이고 석문은 말 그대로 상고로 들어가는 돌문이라는 뜻이다. 비로봉(毘盧峰, 1032m)을 지났다. '비로(毘盧)'는 인도 말의 '비로자나불'을 줄인 말이다.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자 '광명'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지혜의 빛이 비취는 은총을 입은 탓이었을까.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유난스레 많았다. 숲은 그윽했으며 나무들은 우람했다. 세월을 넘느라 거무튀튀해진 너른 바위들에는 이끼들이 빼곡히 덮여 있었다. 깊은 숲이었다. 지혜의 숲에 들어온 듯 했다. 나뭇잎들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가로이 흐르는 맑은 하늘이었다.
▲표지석엔 아직도 천황봉이라고 적혀있다 ©이호상

세속이 떠난 산인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058m)에 올랐다. 표지석이 보였다. 표지석에는 천황봉(天皇峰)이라고 적혀있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정확하게 '천왕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1년 5월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한국지형도에도 '천왕봉'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그 후 1918년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지도(근세한국 오만의 일 지도)에서부터 '천황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며 천황의 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2007년 12월 중앙지명위원회는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었고 국토지리정보원이 지명 변경을 고시했으나 아직 속리산의 정상에는 뚜렷하게 '천황봉'이라고 적혀있었다. 행여 일제강점기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면 모를까 심히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 속히 바로 잡히기 바란다.

우리나라 십이 종산(宗山) 중의 하나이며 이 땅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근간을 이루는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은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을 품어 뻗어내고 있다. 한남금북정맥은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이 봉우리에서부터 일가를 이루어 말티고개, 선도산(547m), 상당산성, 좌구산(657m), 보현산(481m)을 지나 칠현산(516m)에서 끝난다. 칠현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갈라진다. 한강 유역과 경기 서해안 지역을 나누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은 칠현산 북쪽 2km 지점에 있는 칠장산(492m)에서 시작되어 백운산, 보개산, 수원 광교산(582m), 안양 수리산(395m)을 넘으며 김포평야의 낮은 등성이와 들판을 누비다 계양산(395m), 가현산(215m)을 지나 강화도 앞 문수산성까지 산줄기를 뻗었다. 또한 금북정맥(錦北正脈)은 한남정맥과 헤어진 후 칠현산(516m), 안성 서운산, 천안 흑성산(519m), 아산 광덕산(699m), 청양 일월산(560m), 예산 수덕산(495m)을 지나 예산 가야산(678m)에서 멈칫거리다가 성왕산(252m), 백화산(284m)을 거쳐 태안반도로 들어가 반도의 끝 안흥진까지 줄기를 뻗어 있었다. 천왕봉은 백두대간에서 뻗어나간 13개의 정맥 중 세 개의 정맥을 품고 있는 것이다.
▲산줄기 뻗어 나가다 ©이호상

천왕봉이 품고 있는 것이 어디 산줄기뿐이랴.
천왕봉은 세 개의 큰 강을 품어 흐르게 하고 있다. 천왕봉 표지석에는 이곳이 조선의 삼대 명수(名水)인 삼파수와 충주 달천수와 한강 우통수(牛筒水) 중 삼파수(三波水)의 발원지라고 적혀있다. 삼파수란 이곳에 내리는 빗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 흘러든다는 뜻이다. 천왕봉의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낙동강을 살찌우고,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금강과 하나가 되며 서쪽으로 흘러들은 물은 남한강으로 흐르며 강 유역에 사는 생명들을 살리는 것이다. 천왕봉은 이처럼 남한강과 낙동강과 금강이라는 큰 강에 물을 대며 흐르게 하고 있다. 그러니 이 강줄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천왕봉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처럼 천왕봉은 매우 중요한 봉우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왕봉은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아직도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 이렇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강을 품어 흐르게 하는 산의 고마움을 알고 있을까.
천왕봉이 세 개의 큰 강줄기를 품어 흐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지계(地界)와 수계(水界)를 나누는 산줄기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산줄기는 너무나 깊고 첩첩하여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천왕봉을 내려와 형제봉(832m)으로 향했다. 천왕봉에서 느끼던 아득함 때문이었는지 바닥난 체력 때문이었는지 가는 길이 무겁기만 했다.

피앗재를 지나 형제봉에 도착했을 때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녁 6시 45분이었다. 지친 몸을 부추겨 형제봉에 올라 속리산을 바라보았다. 저마다 솟은 봉우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 혼자 지나치게 솟아난 봉우리도 없었다. 문장대에서 천왕봉까지 솟아난 봉우리와 이어진 능선들은 어느 한 봉우리에 속하지 않고 서로 어울려 하나의 봉우리, 하나의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옛사람들이 속리산을 구봉산(九峰山)이라고 즐겨 부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단지 아홉 개의 봉우리가 늘어서 있는 정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어선 아홉 개의 봉우리가 절묘하게 어울려 하나의 산이 되었다는 감탄에서 붙여진 이름이었을 것이다. 형제봉에서 바라보는 속리산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각각의 봉우리와 능선은 굽이치고 불러 세워 하나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바위에 노란 양지꽃 피어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애틋했다.
▲양지꽃 ©이호상

숲은 이미 어두웠다. 헤드 랜턴을 켰다. 불빛이 닿는 곳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빛에 이끌려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불을 껐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어렴풋하게나마 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걸었다. 믿음이 필요했다. 산길을 믿으며 조심스레 걸었다. 어느 새 갈령이었다. 깊은 어둠에 쌓여 있었다.

산행을 마쳤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지친 몸을 차에 실었다. 차는 어둠을 밀어내며 나아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자동차의 불빛 속에서 빗줄기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창을 조금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열린 창틈으로 들어온 빗방울이 얼굴에 부딪혔다. 시원하고 차가웠다. 지친 몸과 함께 눌어붙었던 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다.
하늘을 보니 빛바랜 달은 검은 구름 속으로 숨은 듯 보이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려 몸을 적시고 마음으로 젖어 들었다.
깊어가는 밤을 따라 몸 가라앉고 마음 깊어지는 밤이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