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세속이 떠난 산은 세속에 머물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세속이 떠난 산은 세속에 머물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21> 신의터재~늘재/6.24~26

산행 열여드레 째①.수요일.

눈을 떴다. 방 안은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창으로 불빛이 들어왔다. 현관 앞에 달린 외등 불빛이었다. 물소리가 들려왔다. 빗소리인가. 비가 오는가. 계곡물 흐르는 소리였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꼭 빗소리처럼 들려왔다. 어제 밤에도 창을 열고 손을 내밀었던 기억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일어나 몸을 풀었다. 온 몸이 뻐근했다. 도상거리 23.3km의 긴 산행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몸인 듯했다. 산행 준비를 시작했다.
속리산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어제 저녁 내려온 갈령 삼거리에서 형제봉과 피앗재를 거쳐 천왕봉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밤티재에서 문장대로 올라 천왕봉으로 갈 예정이다. 지리산에서부터 오르던 산줄기의 방향을 잃고 반대 방향으로 산행을 하는 것이다. 비법정탐방로이기에 단속을 피해야 한다는 등산안내인 한문희 대장의 결정이었다. 마음이 불편하였다. 이 땅을 있게 한 백두대간 우리 땅을 걸으면서 남의 눈을 피해 산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이호상

'숲을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취지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꼭 이렇게 사람과 숲을 분리시키고 폐쇄시키는 방법 밖에 없을까.'

자연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사람은 자연을 필요로 한다. 숲과 나무는 사람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람은 나무와 숲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숲을 지키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숲에게 있어 사람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지만 사람에게 있어 숲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숲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한, 사람은 숲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사람에게 있어 사람과 숲은 떼어 내어 생각할 수 없는 절대적 관계이다. 물론 사람은 숲을 파괴할 수도 있고 풍성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에 숲의 소중함을 알리고 지키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사람이 숲과 상관없이 살 수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숲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사람은 숲을 지속적으로 살리고 숲은 사람을 살리는 공존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사람과 숲은 공존의 관계이다. 사람이 숲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가장 본질적인 사실은 숲과 사람이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숲을 파괴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숲을 지키고 더 잘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이 숲의 은총을 느끼며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그것은 숲을 사람으로부터 분리하고 폐쇄하는 소극적인 정책만으로는 숲을 제대로 보존하고 지키고 풍성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숲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이 더 잘 알고 있듯이 자본은 숲을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숲을 지키는 것은 숲을 지키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이고 마음이고 의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들이 숲에서 공존하듯이 생태계의 한 존재인 사람들도 숲과 함께 공존해야 한다. 숲을 지나며 나무를 사랑하고 숲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숲은 잘 지켜질 것이고 풍성해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 막힌 산길을 열어야 한다. 숲을 지키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 속에서 사람의 숲을 이루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먼저 나무를 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나무들이 자라 그들의 삶 속에서 숲을 이루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길은 숲으로 나있고… ©이호상

더욱이 백두대간의 막힌 길은 열어야 한다. 백두대간은 단지 산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은 1정간 13정맥을 뻗어 낸 이 땅의 등줄기일 뿐 아니라 열 개의 큰 강을 품어 흐르게 함으로 이 땅을 일구게 한 삶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에게 있어 백두대간은 단순히 산줄기가 아니다. 이 민족의 정신이요, 기상이다. 생명을 품어 살리고 키우는 하늘의 뜻이다. 그 뜻이 담긴 하늘길이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소망길이다. 그렇기에 백두대간은 구름을 넘어 하늘 가까이 흐르면서도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으로 흘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끊어졌지만 말이다. 이제는 끊어진 길이다. 석회석을 얻고 돌을 채취하기 위해 파헤쳐지고, 무너진 자병산과 금산에서 끊어져 있고 지금도 백두대간 자락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마음 길에서도 끊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끊긴 백두대간 길을 아파하지 않고 막아 놓은 백두대간 길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백두대간 종주, 과연 국토 사랑의 올바른 방법일까요?'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써 놓고 있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내 나라 내 땅의 산길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갈 수 있는 날이 올까?'

올갱이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밤티재로 향했다.
밤티재에서 산으로 들어갔다. 길은 가파르게 산을 향해 치달렸고 이번 주 산행을 이끌고 있는 등산연합회의 우주환 대장도 마음이 급한 탓인지 가파른 길을 오르는 탓인지 내쳐 치달렸다. 호흡은 흐트러지고 숨은 차올랐다. 가쁜 숨을 연신 내 쉬었다. 잠시 걸음을 늦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암벽 구간이라 스틱이 거추장스러울 것이라는 말에 접었던 스틱을 다시 펴 들었다. 마음도 몸도 조금은 안정되었다. 바위틈에 양지꽃 무리가 아름답게 피어 거친 숨결을 가라앉혀 주었다. 때로 나무뿌리를 잡고 때로 나뭇가지에 의지하며 바위를 올랐다. 때로 바위 틈새를 끌어 잡기도 하고 때로 밧줄에 온 몸을 의지하며 바위에서 바위로 나아갔다. 숨을 가라앉히며 돌아보니 골에 흰 구름 가득하였다. 하늘은 청명하고 맑았다. 가을 하늘같았다.
▲암벽을 오르다 ©이호상

'저 구름들이 늘 감싸고 있었겠지...'

문장대(文藏臺, 1,054m)가 눈앞에 있었다. 늘 구름 속에 묻혀 있어 예전에는 운장대(雲藏臺)라고 불렸던 문장대 곁에는 여전히 구름이 머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세월을 잊은 듯 보였다. 신비함을 그대로 간직한 듯 했다. 세속을 떠난 듯 했다. 그러나 세속을 떠난 이 산에도 세속의 흔적은 그 이름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병을 다스리기 위해 속리산을 찾은 세조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하여 문장대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어찌 세속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안내판을 보니 이곳에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전하고 있다. 이 안내판의 글귀가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김남균 대장은 문장대에 세 번 올라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바람결에 전한다. 바위 사이로 놓인 철계단을 오른다. 문장대에 오르니 사위는 그대로 허공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구름만이 지나고 있었다. 산은 첩첩하여 끝을 알 수 없고 산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은 웅혼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세속의 흔적 가득한 이곳에서 세속에 초연한 모습을 보니 마치 내가 신선이 된 듯 했다. 하기야 사람(人)이 산(山)에 들어왔으니 신선(仙)이 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랴. 신선이 된 듯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바람 불어 구름이 살처럼 흐르고 있었다.
▲문장대 ©이호상

속리산(俗離山, 1,058m)은 백두산에서 발원한 한반도 산줄기의 뿌리를 이루는 12종산(宗山) 중 하나이다. 그 빼어남 수려함으로 대한 팔경에 속해 있는 이 산은 소금강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외에도 광명산, 지명산, 미지산, 구봉산, 형제산, 자하산 등의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9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구봉산으로 많이 불렸으나 삼국시대부터 속리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766년 김제 금산사에 머물던 진표율사가 구봉산(속리산의 옛 이름)에 미륵불을 건립하라는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 구봉산에 들어가기 위해 보은에 이르렀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다. 이를 본 농부들이 크게 감화되어 스스로 낫으로 머리를 자르고 '세속을 떠나'(俗離)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세속을(俗) 떠나(離) 이곳(山)으로 들어오니 그 후로 사람들이 이 산을 속리산(俗離山)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그 속리산을 조선 선조 때의 시인 백호 임제는 이렇게 노래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는 구나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 구나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임제는 속리산에 은거하던 성운(成運, 1497~1579)으로부터 3년간 가르침을 받을 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위 시는 중용에 나오는 공자의 말("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나(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도 사람을 멀리하면(人之爲道而遠人), 도를 이룰 수 없다(不可爲而道)")에서 운(韻)을 빌려온 듯하다.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 구나."
▲문장대에서 바라보다 ©이호상

산이 세속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속이 산을 떠났다는 말이다. 산의 고결함과 정갈함이 세속으로 하여금 스스로 떠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시인 임제가 세속이 떠난 산이라고 노래한 속리산에는 세속의 흔적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린 곳도 이곳이고, 이방원이 왕권을 얻기 위해 그의 형제들을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이곳이다. 또한 세조가 시를 지었다는 문장대, 세조가 지날 때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은폭(隱暴)과 학이 세조의 머리에 똥을 떨어뜨렸다는 학소대 그리고 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열은 후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기쁜 마음을 담았다는 상환암(上歡庵)에 이르기까지 세속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세속이 떠난 산인 정결한 산 속리산에 세속의 상징인 권력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세속이 세속을 떠난 산을 그리워하였기 때문이리라.
세속이 떠난 산이 세속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세속이 떠난 산은 세속에 머물며 세속을 세속으로부터 떠나게 하려던 것이리라. 욕망과 탐욕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던 것이리라.

부는 바람을 따라 흐르던 구름이 내 앞에 머물려는 듯 한가로웠다. 문장대에 세 번 올라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김 대장의 말이 생각났다. 한 번 밖에 오르지 않았지만 가만히 소원을 빌었다. 세속이 떠난 산에 올라 가장 세속적인 소원을 빌었다.
인생의 남은 날들 동안 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끊어진 길들을 이어가며 제 땅을 자유롭게 걸을 수 있기를 빌었다.
어린 시절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할 수 있기를 빌었다.
세속이 떠났으나 세속에 머물고 있는 이 산의 마음을 배울 수 있기를 빌었다.

흐르는 구름을 따라 가자 신선대가 있었다. 경업대와 입석대도 보였다. 비로자나불의 현신인 비로봉도 보이고 한남금북정맥을 힘차게 뻗어내고 있는 천왕봉의 웅혼한 모습도 보였다.
가야할 길이 거기 있었다.
구름이 길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