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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잎잔꽃풀 핀 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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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잎잔꽃풀 핀 길을 따라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20> 신의터재~늘재/6.24~26

산행 열이레 째. 화요일

하늘은 낮고 사위는 어두웠다. 검고 짙은 구름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지난 밤 창밖에서 들려오던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는 그쳐있었다. 이른 새벽인데도 큰 비 오기 직전의 저녁 같았다. 낮고 어두운 하늘 탓이리라. 새벽이 되고 아침이 오며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더 깊어질 것 같은 날씨였다.
산을 바라보았다. 한 마디 말없이 고요했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낮은 하늘 아래 침묵에 잠겨 있는 산으로 들어갔다. 신의터재에서 329.6봉, 무지개산, 437.7봉, 윤지미산, 화령재를 지나 봉황산에 올랐다가 비재를 거쳐 갈령까지 가는 긴 산행이었다. 도상거리 23.3km의 짧지 않은 산행이었다.

숲으로 들어갔다. 풀숲 우거지고 나무 울창하여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끝이 보이지 않는 길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관악산 정상에도 오르지 못하던 체력으로 백두대간을 걷기 시작한 내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구원이고 은총이었다. '언제나 이 길이 끝날까?'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숲을 느끼고 산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산은 아침이 오고 있음에도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무언(無言)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처럼 침묵 속에 있었다. 땅에서 울려나는 내 발자국 소리만이 침묵을 흔들며 들려왔다. 깊은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은 내 숨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이런 깊은 고요함이 좋았다. 적막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좋았다. 오로지 산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골에서 불어와 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소리, 나뭇잎 수런거리는 소리, 마른 풀잎들 서걱 이는 소리, 지나는 이들에 아랑 곳 하지 않고 제 노래를 하고 있는 새 소리와 냇물 흐르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숲을 지나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숲의 일부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둘러 걸어야 하는 긴 산행이었지만 나는 느리게 걸었다. 풀을 만지고 꽃을 느끼고 나무를 안아보기도 하며 느리게 걸었다. 내가 자연을 느끼듯이 자연도 나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느림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도시에서와 달리 숲에서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평안했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내 발로 땅을 딛고 천천히 걸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숲으로 들어가다 ©이호상

현대 문명의 상징인 도시에서의 삶은 대체로 발이 땅에서 떨어져 있다. 삶의 대강은 허공에서 이루어진다. 허공에 뜬 채로 먹고 자고 살아간다. 고층 아파트에서의 삶이 그것이다. 이동할 때에도 자동차를 타고 허공에 뜬 채로 빠르게 움직인다. 자신의 발로 걷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삶의 형태로 인해 두 발은 퇴화되고 감각은 무뎌진다. 당연한 결과로 나 아닌 다른 것들과의 소통은 어려워진다. 조화는 깨진다. 사라진다. '빠름'과 '부유(浮遊)'가 도시 삶의 주요한 형태가 된지 오래이다. 부조화(不調和)다. '빠름'과 '부유(浮游)'가 필연적으로 불러온 부조화는 오늘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한 형태가 되었다.

숲에서는 이런 모든 부조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숲길을 홀로 걸으며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무와 바람, 꽃과 구름, 돌과 풀, 새와 곤충들이 모두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 숲 밖 세상에서와는 달리.

"야아~!"
▲넓은잎잔꽃풀 ©아호상

절로 탄성이 나왔다. 개망초꽃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국화과의 두해살이 풀인 이 풀의 꽃은 그 모양 때문에 '계란꽃'이라고도 불린다. '넓은잎잔꽃풀'이라는 어여쁘기 그지없는 다른 이름도 있다. 이 꽃 이름이 '개망초'가 된 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간 1910년에 이 꽃이 유독 많이 피었다. 나라가 망할 때 눈치도 없이 여기 저기 많이 핀 것이 너무나 미웠던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망할 망(亡)'자를 넣어 '개망초'라고 불렀다고 한다. 꽃에게는 많이 억울한 일이다.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을 여린 꽃에게 전가하였으니 말이다. 나라를 팔아먹고 지키지 못한 것은 꽃이 아니라 사람들인데 꽃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제 책임을 다하지 않고 남의 탓을 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은 똑같다. 세월도 흐르고 자연도 산도 숲도 꽃들도 변하였건만 그들의 모습은 변하지도 않는다. 민초들을 탓하고 꽃을 탓한다. 망한 나라 민초들의 슬프고 참담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골마다 들판마다 흐드러지게 피어 난 여린 꽃에게 나라 망한 탓을 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라도 '넓은잎잔꽃풀'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러주면 어떨까. 아니면, 그냥 '계란꽃'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다. 그도 아니면 '돌잔꽃'이라는 북한에서 부르는 이름도 괜찮을 듯싶다.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에 낮게 드리웠던 검은 구름은 어느새 걷혔다. 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 점점이 떠있고 하늘 아래 산 속에는 노랗고 흰 개망초꽃 흐드러져 아름다웠다.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물결이 이는 듯했다. 숲이 흘러가는 듯했다. 나는 소박한 아름다움에 취해 한동안 꽃밭을 떠나지 못했다.

대간 길에서 빗겨 서있는 무지개산(441.4m)을 곁에 두고 삼거리를 지나니 신갈나무 우거진 숲이었다. 숲은 생명력으로 충만하였다.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나무들도 곳곳에 있었다. 죽음은 생명의 또 다른 모습이다. 생명의 순환이다.

'자연의 이런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면 사람들도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숲의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겸허함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조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부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는 천박한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지 않을까.'

산길을 걷는다고 해서 산길을 따라 걷는 것만은 아니다. 마음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산길을 따라 걸으면 그저 산허리를 돌아 나올 뿐이지만 마음 길을 따라 걸으면 침묵의 언어로 말하는 숲의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자연의 울림을 느낄 수 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만 매몰되지 않고 보이는 것들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윤지미산 ©이호상

윤지미산(538m)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은 참나무로 둘러 쌓여있었다. 나무들에 가로막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에 들어가는 즐거움 중 가장 으뜸이라는 조망이 없었다. 그저 작은 재에 오른 것 같았다. 윤지미산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나뭇가지에 메여 이곳이 정상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윤지미산의 원래 이름은 '소머리산'이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이름이 품고 있는 뜻이 예사롭지 않다. 이 산의 이름은 사서삼경 중 대학에 나오는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인생 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맞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서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538m 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이 인생을 다 알고 세상을 두루 알고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 가까이 있는 낮은 산이기에 세상을 알고 삶을 품어 안는 산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숲은 때로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마음을 열게 만들어 준다. 마음으로 느끼고 바라보게 한다.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차를 타고 가면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왜 몇 날 며칠, 몇 달 동안 걷고 있으며 걸어야 하는지 알게 한다.
▲숲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호상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레 내려와 화령재로 향했다. 인삼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곁으로 딸내미 시집갈 때 가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심었다는 오동나무들이 있었다. 이름 없는 봉우리를 넘으니 화령재였다. 원래 이름은 화령(化寧)이었으나 지금은 화령(火嶺)으로 바뀌었다. 화령(化寧)이 화령(火嶺)으로 바뀐 것은 시대의 가치관이 변한 탓으로 보인다. 이 지역이 삼국시대부터 삼국이 서로 자치하려고 싸움이 많이 일어난 국경지역이고 김유신 장군이나 후백제의 견훤이 중요시 여겼던 군사 요충지였으며, 6.25 때에도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라는 것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탓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해서 '불 화(火)'자를 붙인 탓에 평안한 땅 화령(化寧)이 불길이 끊이지 않는 봉우리인 화령(火嶺)이 된 듯하다.
아침 9시 55분이었다. 이른 도착이었다. 한 쪽에 팔각정이 있었다. 이른 점심을 위해 팔각정에 올랐지만 세찬 바람에 쫓겨 내려왔다. 팔각정을 바람막이 삼아 점심 식사를 하였다. 내일 산행을 위해 오늘 산행거리를 비재에서 갈령삼거리로 늘려 잡았다. 이른 점심을 마치고 서둘러 일어났다.
세찬 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1300년 전 봉황이 살았다는 봉황산 정상은 샛노란 기린초 홀로 피어 외로웠고 무수한 날파리만 분주했다. 날파리에 쫓기어 내려오는 길에 양지꽃 피어 흔들렸다. 비재(427m)에 내려섰다. 고개의 생김새가 나는 새의 형국이어서 '비조령(飛鳥嶺)'이라고 불렸던 곳이었으나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기린초 ©이호상

'사람들에게 산과 숲을 빼앗긴 탓이리라.'

아스팔트 가지런히 깔린 고개에는 지나는 이들조차 없었다. 적막했다. 표지석은 고사하고 흔한 작은 표지판조차 없었다. 그저 도로 벽에 붉은 페인트로 '비재'라고 쓰여 있을 뿐이었다. 쓸쓸했다. 쓸쓸함 때문이었는지 서투른 글씨체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 곁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갈령(葛嶺, 443m) 삼거리로 가기 위해 도로를 가로질렀다. 계단을 통해 숲으로 들어섰다. 산길엔 낙엽 가득했다. 비틀린 낙엽들도 있고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구멍 뚫린 낙엽들도 있었다. 낙엽들 사이에서 파란 여린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희망이 자라고 있었다. 수많은 주검 속에서 새로운 생명들이 자라고 있었다.
숲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숲을 벗어났다. 갈령(443m)이었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갈령을 지나는 49번 지방도로에 앉아 내리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깊어가는 어둠 속에 넓은잎잔꽃풀 몇 송이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희디 흰 꽃잎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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