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지지도에서 밀려도 매케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한 당을 지지해 온 주 외에 선거 때마다 지지 후보를 바꾸는 이른바 '경합주'(swing states)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주에서 승리하는 후보에게 대의원을 몰아주는 미국 선거제도의 특성상 경합주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전국 득표율에서 져도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매케인 캠프에 있었다. 경합주는 많게는 14개, 적게는 8개로 꼽힌다.
그러나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케인은 지난 2004년 대선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겼던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오하이오, 플로리다 등에서도 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합주는 고사하고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찍어 왔던 주에서까지 밀리는 것이다. 이대로만 간다면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압승을 거둬 8년 공화당 집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인 찰머스 존슨은 이번 대선이 미국의 정치 지형을 바꿔 놓는 '재편 선거'(realigning election)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해 주목을 끌고 있다.
재편 선거란 한 정당을 지지하는 지역적·계급적·계층적 연합 세력이 공고하게 형성되어 그 정당의 장기 집권과 정치경제적 개혁을 가능케 하는 선거를 말한다. 미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재편 선거는 1932년과 1968년에 있던 대선으로 그 후 민주당과 공화당은 각각 대략 40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찰머스 존슨은 지난 7일 미국의 정치웹진 <톰 디스패치>에 보낸 기고문 '미국의 운명을 가를 선거'(Voting the Fate of the Nation)에서 오바마가 인종 문제와 지역별 지지 구도를 극복하고 당선되기만 한다면 이번 대선이 민주당의 40년 집권을 가능케 하는 재편 선거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찰머스 존슨은 미국의 정치가 군산복합체와 정보기관들에 의해 휘둘리는 상황에서 오바마가 당선되는 것만으로 이번 대선이 재편 선거가 될 수는 없다면서도, 현재 나타난 심각한 경제위기, 눈에 띄게 늘어난 민주당원들의 수, 공화당 우세 주에서 불고 있는 민주당 바람 등은 이번 대선을 재편 선거로 만들 수 있는 조짐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톰 디스패치>에 나온 찰머스 존슨 글의 주요 내용이다.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한 <블로우백>의 저자로도 유명한 찰머스 존슨은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를 지낸 석학이다. 일본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 연구로도 명성을 날린 찰머스 존슨은 현재 일본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미국의 운명을 가를 선거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지난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번 대선이 미국 역사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아마도 옳은 말일 것이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선거가 개혁과 정치적 재편(realignment)을 촉발시켰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같은 상황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고, 지금은 개혁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어찌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이 글에서는 제국주의와 영구전쟁, 파산을 향해 가고 있는 미국이 2008년 선거로 인해 정치 시스템에 민주적인 요소를 보강하는 쪽으로 미국의 정치 지형이 다시 바뀔 수 있는지(reconfiguration)에 대해 살펴보겠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8년 실정으로 인해 '변화'의 요구가 거세졌기 때문에 이번 선거는 야당인 민주당에 좋은 기회다. 그러나 민주당이 집권하는 것만으로 미국이 잘 돌아가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군산복합체와 16개 정보기관들의 이해관계에서 오는 강력한 압력에 버틸 수 있는 대통령이 등장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 비밀주의와 경찰력·첩보력의 확대, 국토안보부란 이름의 제2의 국방부, 미 제국을 지탱하는 미군기지들(151개국에 761개 기지)을 통상적인 정치 시스템을 통해 되돌려 놓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상 2차례 있었던 '재편 선거'
그런 일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11월 대선이 정치적 재편을 가져오는 선거(realigning election)가 되어야 한다. 20세기에서 그런 선거는 193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당선됐을 때와 1968년 리처드 닉슨이 당선됐을 때밖에 없었다.
아브라함 링컨이 당선됐던 1860년부터 1932년까지 72년 중 공화당이 대통령을 차지했던 기간은 56년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1932년 이후 36년 중에서 28년 동안 백악관을 차지할 정도로 32년 선거는 역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968년 대선은 닉슨 후보의 소위 '남부 전략'에 의해 공화당에 유리한 정치적 재편을 이끌었다. 남부 전략의 핵심은 민주당의 아성이었던 구(舊) 남부동맹(Confederate) 지역에 공화당의 인종주의자들을 출마시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1968년 이전까지 9차례의 대선에서 7번을 이기는 한편 의회 선거에서도 전국적으로 다수당을 차지했던 민주당은 1968년부터 2004년까지 10번의 대선에서 7번을 지게 된다.
그중에서 루즈벨트의 당선으로 인한 정치적 재편은 미국 정치사에서 드물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상황을 낳았다. 여성과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고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하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루즈벨트의 뉴딜은 짧은 시간이나마 미국의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이 2차 대전에 개입하고 뉴딜이 무기 생산과 주변 산업을 뒷받침하는 전시경제 체제로 대체되면서 민주주의는 끝났다.
전시경제 체제에 의해서만이 대공황의 폐해가 말끔히 정리되고 완전한 고용을 이루게 됐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의 정치적 사고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 후 미국은 군수 경제와 민간 경제를 동시에 유지하게 됐고, 그로 인해 투자와 소비에 들어가야 할 핵심적인 자원들의 분배는 왜곡됐다.
2008년 현재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1932년 당시와 비슷해서 또 다른 정치적 재편을 가져올 선거를 가능케 하고 있다. 대규모 주택 대출 위기, 금융기관 파산, 식료품·유가 급등, 의보체계 붕괴,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 파괴, 해외 군사 개입 지속, 기록적인 재정·무역 적자 등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압력이 (이유는 다르지만) 1932년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이번에도 1932년처럼 결집할 수 있을까? 이번 대선이 '재편 선거'가 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에 두말할 것 없이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같은 상황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기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그러는 데에는 인종 문제와 지역주의라는 만만찮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인종'이라는 장애물
백인 민주당원들과 무당파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보면 후보를 고르는데 피부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러나 과거 사례를 보면 그들이 진짜 속내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흑인인 톰 브래들리가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도전했을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앞섰지만 실제 선거는 패하면서 나온 '브래들리 효과'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1989년 뉴욕시장에 출마한 데이비드 딘킨스, 버지니아 주지사에 출마한 더글러스 윌더도 여론조사에서는 크게 앞섰지만 실제 투표함을 열어보니 간발의 차로 승리했었다. 그들 모두 흑인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례로 볼 때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응답한 비율 중 7%는 거품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공화당은 현재 흑인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빼앗기 위해 맹렬히 움직이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속임수를 써서 투표권에 제약을 가하고 있다. 사진이 붙은 신분증이 있어야 투표권을 준다는 법을 만드는 등의 방법이 동원된다. 사진이 붙은 신분증은 운전면허증이나 여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많은 주에서는 전과자가 형량을 다 채웠는데도 불구하고 중죄를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유권자 등록을 취소하거나, 등록을 하려면 일반인들 보다 복잡한 절차를 밟게 하고 있다. 뉴욕 퀸스 칼리지의 앤드류 해커 교수는 이같은 제한을 받는 대상은 흑인이 백인보다 6배 이상 많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도 흑인들의 선거권을 빼앗기 위한 시도는 여러 가지로 진행되고 있는데, 인종문제라는 장애물은 극복될 수 있지만 매우 조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별 균열
지역별로 지지 성향이 갈리는 미국식 지역주의도 전국적인 수준의 유권자 결집을 이뤄내면서 올 대선을 '재편 선거'로 만드는데 분명한 장애물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리고 민족과 종교에 의해 지지 정당이 갈린다. 정치학자인 얼과 멀 블랙(Earl and Merle Black)은 <분열된 미국>이란 책에서 "근대 이후 공화당은 백인 청교도들이 지배하고 있고, 민주당은 소수민족과 기독교도가 아닌 백인들이 백인 청교도보다 우세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는 과거 남북전쟁 당시의 대결 구도에 따라 '남부는 민주당, 북부는 공화당'이었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온 지금의 구도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얼과 멀 블랙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지역적인 근거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중서부(Midwest) 지역의 경합주(swing states)들이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신(新)지역주의'가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얼과 멀 블랙은 미국을 당파성에 따라 북동부, 남부, 중서부(Midwest), 로키산맥 동부 지역(Mountains and Plains), 태평양 연안 지역 등 5개 지역으로 구분한다. 이중에서 북동부와 태평양 연안 지역은 민주당이 강세를 보인다. 반면 오늘날에 와서는 민주당에 등을 돌린 남부와 로키산맥 동부 지역은 공화당의 아성이 됐다. (그에 따라) 중서부 10개 주를 어느 당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선거의 승패가 갈린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합주는 플로리다(대의원 27명)와 오하이오(20명)이다. 이 지역에서 민주당은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간발의 차로 패했다.
이 5개 지역은 지지 정당의 구분이 확실하다. 따라서 대공황 같이 공화당의 명백한 실정이 없다면 그같은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이번 대선이 '터닝포인트 선거'가 될 수 있는 까닭
이같은 부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이 '터닝포인트 선거'(재편 선거)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공화당 후보 매케인의 약점(그리고 나이) 때문이다. 그로 인해 공화당은 40년마다 돌아오는 권력 주기의 맨 마지막 시기에 처해 있을 수 있다.
둘째, 공화당 집권 시절 터져 나온 경제위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는 중서부 주들이나 2000·2004년 대선에서 부시가 이겼던 주들에서 지지 후보를 바꿀 수 있다.
셋째, 민주당원의 숫자가 늘고 공화당원은 줄어드는 현상이 뚜렷하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중요한 싸움터에서 민주당은 올해 47만4000명의 새로운 당원을 확보한 반면 공화당은 3만8000명의 당원을 잃어버렸다. 민주당은 2006년 이후 전국적으로 최소 200만 명의 당원을 새로 받았고, 공화당은 34만4000명을 잃었다. 지난 6월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민주당원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37%로, 스스로를 공화당원이라고 믿는 사람(28%)보다 9%포인트 높았다. 그리고 그 격차는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 처음으로 선거권을 유권자들, 특히 젊은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 현재 나오는 여론조사 결과는 이들의 비중이 낮게 계산되고 있다. 흑인 유권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섯째, 버지니아, 콜로라도, 뉴멕시코 등 공화당 우세 주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향함으로써 지역별 지지 패턴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화당이 경제 운용을 실패하고, 잘못된 전쟁을 이끌었으며, 지구온난화와 같은 핵심적인 문제를 무시했다는 점 때문에 민주당의 승리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선거가 민주당에 유리한 '재편 선거'가 될 수 있는지를 가르는 문제가 될 것이다. 미국의 운명은 지금 갈림길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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