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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왕실재로 가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18> 괘방령~신의터재/6.17~19

산행 열닷새 째. 수요일.

지난 밤 내내 비가 내렸다. 어제 아침 숲을 적시던 비가 오전이 지나기도 전에 그치더니 밤이 되며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비가 내렸다. 그칠 비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장마가 산으로 올라온 듯 했다. 산행 준비를 했다. 물과 이온 음료도 챙기고 점심밥과 간식거리도 챙겼다. 사진기와 보이스 레코더 그리고 전화기 등도 지퍼백에 하나씩 따로 따로 넣었다.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할 때 마다 일일이 열고 닫아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진가 이호상과 신범섭 촬영감독 등도 카메라가 비에 젖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우의를 입고 배낭 커버를 씌운 후 차에 올랐다.

어제 내려 온 작점(雀店)고개로 향했다. 새들이 많고 유기점들이 많았던 곳이기에 지어진 이름이다. 김천 어모면에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이 고개는 작점고개라는 아름다운 이름 외에도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다. 충북 사람들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해서 여덟 마지기 고개,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다하여 성황뎅이 고개, 고갯마루 아래 능치마을에서 빌려온 능치재라는 이름도 있다.
작점고개에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표지석 주위에 가득한 토끼풀 위로도 비는 내렸다. 지난 저녁 내려선 곳인데도 비 때문이었는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낯선 느낌을 떨쳐 내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나는 여느 때보다도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백두!"

"사랑합시다!"

산행을 시작했다. 길을 이어갔다. 숲으로 들어가는 어귀 나뭇가지에 수십 개 리본들이 달려 있었다. 바람에 펄럭였다. 때로 갈 길을 일러주기도 하였지만 아름답지는 않았다. '날 밤 새도 백두 간다' 등의 재미있는 이름들은 때로 지친 산행에 위로가 되기도 하였고, 뒤 따라 오는 이들을 위해 남겨두는 아름다운 배려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모양은 아니었다.

몇 년 전 미국 여행을 할 때 아팔라치안 산맥(Appalachian Moutains)의 트레일(Trail)을 걸은 적이 있었다. 아팔라치안 산맥은 미 동부 지역의 등줄기 같은 산맥이다. 우리나라의 백두대간 같은 산줄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주하고 있는 산길에서 나는 리본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리본을 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곳곳마다 산길을 찾기 쉽게 표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세한 지도도 있고 이정표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나무에 새겨진 표시만으로도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었다. 아팔라치안 트레일을 나타내는 색은 흰색이다. 트레일을 따라 직사각형의 흰색 표시가 나무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새겨져 있었다. 다른 트레일과 만나는 곳은 각각의 트레일마다 정해져 있는 색깔대로 가는 방향 쪽으로 표시가 되어 있어 지도가 없어도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었다.
▲비에 젖은 숲을 지나다 ©이호상

숲은 비에 젖어 있었다. 짙은 안개가 숲을 감싸고 있었다. 눈앞의 길도 아스라했다. 바람에 신갈나무 잎들이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 작은 깃발 같았다. 그리움을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 같기도 했고 오랜 세월 내려놓지 못한 마음의 조각들 같기도 했다. 생명을 향한 열정 같기도 했다. 나뭇잎 한 장 한 장이 모두 저마다의 모양으로 떨리고 흔들리고 펄럭이며 살아 움직였다.

숲은 저런 나뭇잎 한 장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뭇잎이 없다면 숲 뿐 아니라 모든 생명들이 존재할 수 없다. 작은 벌레들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살아갈 수 없다.

나뭇잎은 광합성을 한다.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포도당을 얻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나뭇잎은 물과 탄소를 필요로 한다. 탄소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에서 얻고 물은 뿌리를 통해 얻는다. 이 두 가지 재료가 확보되면 나뭇잎은 빛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광합성(탄소동화작용)을 하여 포도당을 얻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자신에게는 불필요한 가스를 배출한다. 그것이 산소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모두 나뭇잎들에게 절대적인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탐욕으로 인해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의 생명 뿐 아니라 후손들과 이 땅에서 살아갈 모든 생명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다. 살인행위나 다름없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슬픈 현실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들 ©이호상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다 비 내리는 아름다운 숲을 채 느낄 사이도 없이 용문산(710m)에 올랐다. 지나 온 길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안개 길을 걸어온 듯했다.
무릎에 은은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산행 첫 주부터 나를 괴롭히던 오른 허벅지의 근육통이 차츰 사라져가자 왼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길을 떠나기 위해 모두들 내려놓았던 배낭을 메었을 때 나는 무릎보호대를 배낭에서 꺼냈다. 나로 인해 제 능력껏 산행을 즐기지 못하는 김남균 대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나이 들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법이야."

김 대장은 나를 보며 웃었다. 용문산을 떠났다. 작은 통나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사이에 저 홀로 자란 작은 풀잎이 비를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러나 희망이 있었다.

"선생님, 저 소나무에 밑둥치에 왜 거품이 일어요?"
소나무의 밑둥치에 비누 거품 같은 것이 잔뜩 끼어 있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김명옥 작가가 일러 주었다.
"거품벌레에요. 거품을 걷어내면 벌레가 있어요."
김 대장이 희한한 벌레도 있다는 듯이 되물었다.
"거품 벌레요?"

비 내리는 숲길을 지나며 나는 한가로웠다.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느끼며 걸었다. 리본은 리본대로, 나뭇잎은 나뭇잎대로, 거품 벌레는 거품 벌레대로 보았다. 그저 산길에 나를 맡기고 걸었다. 국수봉(掬水峰, 763m)에 올랐다.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이므로 물을 움켜쥐었다는 뜻을 담아 '움켜질 국(掬)'자에 '물 수(水)'를 써 국수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山)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지니고 있었다.
정상에 올라섰다. 암릉이었다. 바람이 세찼다. 서 있기 힘들 정도로 거세게 불어왔다. 산철쭉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나무들은 출렁거렸다. 숲은 일어서고 산은 떠나가는 듯 했다. 바람을 피해 숲으로 들어섰다. 바람이 없었다. 숲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따스했다. 모두들 나무 아래 앉아 담배 피는 동안 나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비 피할 곳을 찾지 못한 것인지, 많은 비로 인해 새로운 안식처가 필요해 졌는지 알 수 없었다. 맑은 날에 비해 나비가 많다.

큰재(320m)에 내려서자 굵어진 빗방울이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임을 알리는 입간판 위로 내리고 있었다. 상주시 공성면의 3번 국도와 영동군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우리는 점심 식사와 휴식을 위해 학교로 들어갔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유일한 학교인 옥산 초등학교 인성분교다. 교문 안쪽에는 1949년 11월 개교하여 597명의 학생을 배출하고 1997년 3월 폐교되었다는 내용이 적힌 교적비가 있었다. 교문 바깥쪽에는 '부산녹색연합 생태학교 백두대간교육센터'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간 세월 그 어느 때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었다는 사실만을 말해주고 있을 뿐 학교 안은 황량하기만 했다. 생태학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관리를 하지 않는 버려진 건물일 뿐이었다. 창은 남김없이 깨지고 부서져 있었다. 나무로 된 교실 바닥도 뜯겨져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칠판에는 아이들이 적어 놓았을 것 같은 낙서와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이곳을 지나간 산악회 사람들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행사를 했는지 국민의례, 식순 등의 글씨들이 보였다. 털보 산악회라는 이름도 보였다. 건물 뒤편에는 칠 벗겨진 문마다 학년이 적힌 재래식 화장실들이 있었다. 남겨진 것들은 모두 부서져 있었다. 사뭇 쓸쓸했다. 뜯겨지고 무너진 빈 교실로 바람이 지났다. 바람을 따라 소리가 들려왔다. 먼 시간을 넘어 온 아이들 소리 같았다. 빛바랜 아우성 같았다.
▲아이들은 떠나고…(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 교실 안) ©이호상

소사남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의 교실이 생각났다.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은 위에 루핑으로 지붕을 씌운 교실이었다. 비오는 날이면 공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루핑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비만 오면 얼기설기 엮인 교실 벽 틈으로 비가 들이쳐 흙바닥이었던 교실바닥은 이내 진창이 되곤 했었다. 그런 날이면 수업을 멈추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 교실에서 어린 날을 보낸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소사 남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저 모든 것이 그립다.
지나간 날들이 깊을수록 그리움도 깊다.

물을 떠오고, 김치를 넣어 라면을 끓였다. 커피까지 준비되어 있는 훌륭한 점심 식사였다.

회룡(回龍, 340m)재를 지나 개터재(380m)에 이르렀을 때 조금 잦아들었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비를 맞으며 걸었다. 낮은 재들이 이어졌다. 백두대간이 아니라 동네 야산을 걷는 것만 같았다. 추풍령(200m), 작점고개(340m), 큰재(320m), 회룡재, 개터재에서 윗왕실재(400m)에 이르기까지 낮은 재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백두대간은 낮은 재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람들 몸 부비며 사는 세상으로 내려서 있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왼다리를 절룩이며 윗왕실재에 내려서자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남권우 프로듀서가 막걸리 한 사발과 오이를 내밀며 말을 건넸다.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나는 산행을 하는 동안 통증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산행 첫날을 빼고는 하루도 통증에 시달리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한 동안 나를 괴롭혔던 오른 허벅지 근육통이 사라지자 왼 발목 복숭아 뼈 윗부분이 아파왔고 그 다음에는 왼 무릎, 오른 무릎, 발가락 등 마치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돌아가며 아파왔다.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아픔에 대한 내구력이 생기는지 때로 '다음 주에는 어디가 아플까?' 하고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나는 통증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통증에 익숙해지는 것도 산행의 일부이다. 그렇게 통증에 익숙해 지다보면 자연스럽게 통증과 이별하게 된다. 통증이 사라지는 것이다. 통증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통증이 오지 않는 것이다.

'익숙해진 것들과의 이별이라.'

이런 생각이 들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산행이 여행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그야말로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떠남이다. 낯선 것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설렘으로 낯선 것을 만나 익숙해진 후에는 다시 낯선 느낌으로 떠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산행에서 만난 통증은 여행길에서 만난 낯선 것들처럼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이런 생각들 때문이었는지 통증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여행지를 만날 때와 같은 설렘이 일었다. '다음 주에는 어디가 아플까?'하고 말이다.
▲윗왕실재, 생태이동통로에서 ©이호상

"한 잔 안 하실래요? 추운데 한 잔 하시지요? 오늘 같은 날은 술이 아니라 약이에요."

남 권우 프로듀서가 재차 권했다.

"그럴까? 조금만 줘!"

막걸리 잔으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작은 파문이 일었다. 마치 여름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매끄럽게 원이 그려지고 있었다. 작은 호수 같았다.

차에 올랐다.
차는 비 쏟아지는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어둠 속에 누군가 있어 우리를 부르는 듯 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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