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조선일보 최순호 기잡니다. 최순호 기자는 1991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그 해부터 1991년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 중국 연길시 조선일보 연수특파원을 역임했고 2008 베이징 올림픽 사진 공동취재단을 거쳐 현재 국회 출입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 핑구어리>, <탈북恨> 등의 개인 사진전을 열었고 사진집으로는 <조선족 이야기>, <Thanks 1,2>를 비롯해 최근 <탈북자 그들의 이야기>를 출간했습니다.
박인규 : 바쁘신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탈북恨'이라는 탈북자에 관한 개인사진전을 여셨죠? 책도 내셨고. '탈북자 그들의 이야기'. 10년 동안 탈북자 관련 사진작업을 해오셨는데 책도 내고 사진전도 하시고 만감이 교차하시겠습니다.
최순호 : 개인적으로 보면 사진전을 해서 기쁜데 한편으론 완결된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한꺼번에 표출한 것도 아니어서, 또 사진집이나 사진전 속에 나온 사람들이 아직도 온전한 형태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한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박인규 : 일단 작업의 한 매듭은 지었지만 썩 시원하지는 않다.
최순호 : 많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박인규 : 사진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셨나요?
최순호 : 제가 전시회를 했던 공간이 롯데백화점 안에 명품관에서 전시했는데요. 일단은 굉장히 우리나라 소비를 대표하는 층들, 그 분들에게 우리와 같은 민족인 사람들이 이곳에서도 같은 땅에 살고 있지만 한쪽에선 고통받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의미에서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실제로 가서 사진을 보신 분들의 반응을 접해보셨습니까?
최순호 : 구매하기 위해서 왔던 젊은 친구들 같은 경우는 특히나 여성 고객들, 놀라는 분들도 굉장히 많았고요. 그리고 어떤 젊은이들은 와서 제가 찍었던 중국과 북한의 국경, DMZ사진들을 보면 굉장히 평온하고 한 폭의 풍경화 같은 걸 보면서 이렇게 잔잔한 모습의 국경도 있군요,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일부 나이 많은 연령층의 북을 고향으로 두신 분들이 와서, 본인들이 살았던 고장의 어느 쯤에 이런 풍경들이 있느냐고 관심 갖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어서 각계각층, 여러 층들, 남녀노소의 반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일단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최순호 : 다큐멘터리사진이라는 게, 그걸 찍어서 사회에 알리고 담론화시키고,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보고 그것들을 느끼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다큐멘터리사진이라고 한다면 이번 사진전은 그런 의미에선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봅니다.
박인규 : 탈북자 사진을 10년 동안 찍으셨는데 언제 처음 찍으신 겁니까?
최순호 : 97년에 조선일보 연수특파원으로 중국 길림성 연길의 연변대학으로 연수를 갔습니다. 당시에는 북이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와서, 제가 교수님들과 식사를 하러 걸어가면 뒤에 7,8명의 꽃제비라고 하는 아이들이 따라와서 삼촌 삼촌 하면서 5원 10원을 요구하고, 돈을 주고 나서도 식사를 하고 나오면 언제 봤냐는 듯 삼촌 삼촌 하면서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면서 이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 단순하게 도와주는 게 아니다. 이런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측면도 없다는 생각을 했고. 가급적이면 저는 금요일 밤이면 버스 같은 걸 타고 두만강가에 가서 실제로 조선족 마을에서 같이 잤습니다. 잠을 자다가 12시 반이나 1시쯤 불을 켜 놓으면 어김없이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 찾아들어와요. 배가 고프다고. 옷은 젖어 있고. 그 사람들 어느 정도 먹이고 한 시간 정도 흐른 다음 북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 저는 그 기간 동안은 저 나름대로 데이터를 갖고 있었어요. 이 사람이 정말 진실성을 갖고 있는지. 장마당이라는 북한의 시장에서 쌀이 얼마에 팔리고 고기는 어떻게 되고 있으며 기차는 원활하게 달리고 있느냐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물어보고 이 사람이 지금 마음을 열어놓고 이야기하는지,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역으로 온 사람인지,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넘어가는 사람인지를 알아보고 대화를 여러 번 시도했거든요. 1년이란 기간 동안 정말 많은 탈북자들을 강가에서 연길시내에서 만났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박인규 : 97년도에는 연길시에 연수특파원으로 갔기 때문에 환경 자체가 탈북자들을 취재하기 좋았는데, 서울에 복귀한 뒤로도 계속하셨어요. 작업을 계속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최순호 : 97년도에 탈북자 작업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청진의대생이라는 젊은이를 두만강가에서 만났어요. 조선족 집에서. 다니다가 학교를 못 다니게 된 형편에서 강을 건너왔던 친구거든요. 그런데 그 농장에서 일을 하는데 완전히 손이 다 갈라졌더라고요 시커멓게. 얼굴은 새까맣게 타 있고, 영양적으로 풍부하게 덩치도 좋은 것도 아니고. 그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 다 나눴습니다. 부모님, 동생, 고향 이런 얘기를 했는데... 어차피 새벽무렵에 만났으니까 닭이 울고 동이 터올 무렵 헤어지는데, 제가 듣고 싶었던 저쪽에 있는 그를 떠나게 했던 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안 하더라고요. 그런데 마지막에 눈물을 죽 흘리면서 뒤돌아 가는데 저쪽 강 건너편에 있는 나를 건너와서 고생하게 하는 그쪽 지도부라고 하나, 체제가 너무나 얄밉습니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걸어가는데 제가 차를 타고 오면서 그 눈물이 너무 가슴 속에 남았어요. 강 밖으로 펼쳐지는 북한의 전경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연배인데 내가 저 땅에서 태어났으면 내가 과연 강을 건넜을까. 아니면 내가 배가 고팠다면 어떤 형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강을 건너와서 중국이란 땅에서 살고 있다면 내 현재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심적으로 강한 아픔이 다가왔어요. 그리고 나서 내가 저들의 아픔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사실 이번 전시회 때도 그 눈물 하나로 10년을 버텨온 겁니다.
박인규 : 의대생 하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상당히 전문직이고 그 사회에선 미래가 보장된 사람인데 왜 탈북했습니까 그 사람은?
최순호 :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어머니가 장사를 했던 모양이에요. 장사 밑천을 마련하려고 주변에서 돈을 모아서 하다가 어머니가 잘못된 거예요. 중국 쪽에서 물건을 해오다가 잘못돼서 어머니를 찾아 건너온 겁니다 강을. 어머니를 찾아서 1년 반 동안 돌아다니다가 보니까 북쪽에서 호구정리라고 하나요? 행방불명처리가 돼 버린 거고, 이 친구는 돌아가려고 해도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처지가 돼버리고. 어머니조차도 돈을 떼이고 못 오게 되니까 가족은 완전히 파괴된 거고, 그렇다고 건너가서 온전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되기 때문에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중국에 남아있었던 거죠.
박인규 : 혹시 그 분을 그 뒤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최순호 : 못 만났습니다.
박인규 : 그런데 책을 보니까, 탈북자 그들의 이야기라는 책을 보니까 10년 동안 탈북자 사진을 열심히 찍었는데 그들의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썩 좋은 반응이 안 나왔다고 해요.
최순호 : 탈북자에 대한 관심들이 이 사회에서 일정 정도 멀어져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박인규 : 아직도 탈북자를 찍냐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다면서요?
최순호 : 우리 사회에 13000명 정도 탈북자들이 들어와 있고 매달 수백 명의 탈북자들이 들어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초반에 들어온 탈북자들은 사회적 관심도 갖고 이들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보도도 됐고. 그런데 지금은 얼마 전 여간첩사건 이전에는 탈북자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거든요 우리 사회에서. 그런데 10년 동안 제가 휴가도 털어서 가고 사비도 털어서 가고, 혼자서 기획하고 돌아다니면, 그거 해서 뭐하려고 하냐. 돈이 되겠냐, 뭐가 되겠냐 얘기를 해서 사실 저 혼자 10년을 끌고 오는 게 힘들기도 했죠.
박인규 : 실제로 그러고 보니 3,4년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기획탈북이라고 해서 미국대사관이나 일본대사관 들어가고 하면 국내에서 크게 보도하기도 하고 TV에서도 굉장히 많은 르포가 나왔는데 최근 2,3년 동안은 완전히 주춤해진 것 같아요. 왜 그런 걸까요?
최순호 : 제가 그쪽에 활동하는 전문적인 NGO 회원이 아니어서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제 목숨을 담보로 하거나 위험성을 담보로 한 행동들에 대한 비판적인 무모한 부분도 있다는 얘기도 있었을 것 같고. 이제는 그런 방식을 통해서 이슈를 만들어내는 건 일정 정도 할 만큼 했다는 생각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인규 : 탈북자라고 해도 국내에 들어와서 활동하는 탈북자들이 있고 중국을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도 있고, 심지어 베트남이나 태국까지 가는 탈북자들도 있고, 많은 것 같아요. 어디 사느냐에 따라서 탈북자들의 생활상이나, 좀 다르지 않습니까?
최순호 : 대단히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 와 있는 분들은 굉장히 엄청나게 많이 불안해해요.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잡히면 바로 북송되거나 그 안에서 인신매매 같은 걸로 한족 집에서 있다가 또 다른 집으로 팔려가기도 하고 불안한 처지에 있는데, 중국 국경이나 몽골 국경을 넘어서 제3지대라고 하는 나라. 라오스나 베트남 여기까지만 가면 사람들이 여기만 넘으면 뭔가 안전한 지대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굉장히 여유롭고 눈동자가 달라요. 그런데 태국을 가게 되면 태국은 국경지대에 아주 작은 난민들이 있어서 UN난민기구로부터 받는 기금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태국이란 나라가. 그래서 탈북자들이 태국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난민으로 인정받아서 태국 정부에서 강제로 추방하지 않아요. 경찰서에 가게 되면 그 사람들은 UN에서 가라는 캠프로 가거나 교회단체로 이송돼서 한국으로 올 수 있는 마지막 단계가 태국이 되거든요. 그렇게 쉼터에 수용돼 있는 사람들이 각각의 쉼터마다 몇 백 명씩 있는 거죠 수백 명씩
박인규 : 그렇게 보면 중국에 남아 있는 탈북자들이 가장 어렵고 불안한 환경에 있는 거군요. 제가 예전에 어떤 신문에서 설문조사한 걸 보니까 국내에 들어오신 분도 별로 만족하고 오히려 호주나 미국 같은 나라에 가고 싶다. 국내 탈북자들의 생활상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최순호 : 제가 이번에 1월에 미국에 갔다 왔는데요. 미국에 갔던 탈북자들이 다들 미국이라는 나라가 꿈과 희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생각하고 다들, 자기들이 살았던 북한보다 더 현실화된 지상낙원인 줄 알고 희망을 갖고 남아 있거든요. 사실 공식적으로 UHN HCR에서 인정해서 미국으로 왔던 친구들은 석달 동안 매달 300불의 지원을 받고 300불의 푸드스탬프... 식권 외에는 지원해주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리고 3개월 후부터는 지원금도 푸드스탬프도 끊겨요. 알아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알파벳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고 기술지원센터도 가고 난민센터 가서 영어도 배우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러는데 한 1년 정도 지나면 번듯한 집도 하나 렌트하고 자동차도 하나 있고. 미국은 자동차가 없으면 생활을 못하니까, 그리고 생활한다는 거죠. 보니까 쓰리잡, 포잡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루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자고 미친듯이 일합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을 만나보면 내가 인생에 태어나서 내가 내 노동의 가치를 여태까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지금처럼 행복한 시기는 없었다. 몸은 힘들지만. 북에 살면서 노동하면서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못 받았던 거고 중국에서 탈북자 신분으로 일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중국 조선족들 부리듯이 적당히 일 시키고 공안에 신고해서 도망가게 하거나 잡혀가게 만들 고, 돈 주겠다고 하고 돈 갈취하고 자기들이 주는 임금의 10% 수준도 안 되는 5원 7원 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하게 일하고 살더라고요. 물론 그 가운데는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데 국내에 있는 탈북자들의 경우는 세부적으로 맞춤형 지원을 해줘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한 시기에 정착금만 주고 나서 알아서 살아라. 이렇게 방치하는 방식의 정부 방침이 있었다는 거죠. 이건 제가 봐서는 진정하게 북에서 건너와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땅, 남쪽에서 살아가게 하는 방법으로는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거죠. 지금 보면 굉장히 세부적으로 65세 이상,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 여성,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 일정 정도의 정착금을 주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때 또 정착금을 주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장사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되는데 한몫에 돈을 주면 이게 뭔지도 모르고 날리고 나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죠.
박인규 :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탈북자에 대한 지원이 많은데도 정착하는 데는 미국보다 안좋다. 아이러니인 것 같네요. 미국에까지 가 있는 탈북자는 몇 명이나 됩니까?
최순호 :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제가 봤을 때 1월까지만 해도 16명이었는데 지금 한 20명을 넘거나 못되거나 그 정도 수준일 겁니다. 불법으로 와있는 사람들은 숫자를 카운트할 수 없지만 LA 한인지역 같은 경우는 거의 세 자리 숫자의, 정확하게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 정도 사람들이 와 있는데 여권을 한국에서 발급받자마자 비자를 받아서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도착하자마자 변호사를 선임해서 난민 인정을 받게 되거든요. 그 난민 처리의 법적 절차를 받아내는데 한 2,3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2,3년 동안은 미국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거죠
박인규 : 그렇다면 지금도 국내에 있는 많은 탈북자들이 미국이라든가 이른바 선진국으로 나가기를 원하는 분들이 많은가요?
최순호 : 젊은 사람들 중에는 많이 있더라고요. 특히 영국 같은 경우, 태국에서 난민인 것처럼 해서 영국 정부에 가서 얘기하면 영구 정부에서 난민으로 인정을 받아서 영국으로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 가 있는 사람들, 호주에 가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제가 봐서는 이런 것 같아요. 어느 시기를 거치면서부터는 배고파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넘어온 사람들이라서 사상 문제보다는 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자본의 흐름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나가고 그것에 자기가 초이스가 있어서 통행의 자율권을 얻은 이 사람들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죠. 그게 그 사람들이 따뜻한 남쪽나라가 그들의 종국적인 지향점은 아니라는 겁니다
박인규 : 예전에는 한국이라면, 자기의 능력, 가능성을 최대한 펼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최순호 : 그렇습니다.
박인규 : 지금은 좀 남북관계가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97년 98년 이때는 사실 중국 접경지대에서 탈북자들 사진을 찍는 게 위험할 수 있었는데, 위험한 적은 없었습니까?
최순호 : 많이 위험하죠. 국경지대에서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중국에서는 금지돼 있습니다. 방송프로그램이나 신문에 보도되는 여러 가지 사진들이 다 불법으로 찍어오는 거죠. 그게 사실 우리 문제고, 우리 문제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들인데 국경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움이고. 제 책을 보셨겠지만 대낮에 두만강을 건너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은 제가 중국 쪽 브로커, 인신매매 브로커 조직의 수장 정도 되는 사람을 구워삶아서 돈만 받고 강을 건너주는 사람을 알기까지 3,4개월 걸렸어요. 그리고 직접 강가에서 그 사람과 네 번째 갔을 때 건너온 걸 확인했어요. 그때가 11월 초였는데 주변에 저를 가려줄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저쪽에서 건너오는 걸 찍는다는 건, 만약 저쪽에서 대낮에 건너올 때는 국경수비대에 돈도 주고 건너오는 거지만 그걸 건너오는 게 한 10초 정도 안 되는 상황인데 제가 거기서 아침 9시부터 건너오는 12시까지 3시간을 꼼짝도 안 하고 숨어있다가 찍고 그 사람들이 중국 안으로 흩어지고 나서 빠져나왔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탄로났으면 어떤 상황이었을까 생각도 들고. 탈북자들 가운데 산속에서 몰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당시에는. 지금도 몇몇이 있지만 그 사람들을, 밑에서 교회나 불교단체, 천주교단체에서 그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을, 같이 올라가겠다는 걸, 됐다 여태까지 이 사람들 한두 번 만난 게 아니고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저 사람한테 들을 수 없는 것도 있고 사진을 못 찍을 게 있으니 나 혼자 가겠다 해서, 산속 깊은 데 허허벌판에 탈북자와 단 둘이서 자고 먹고 생활한 적도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힘에 붙들려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쉬운 작업들은 아니었죠.
박인규 : 탈북자들이 특히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은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면 위험할 수 있잖아요 취재에 쉽게 응하던가요?
최순호 :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도 그렇고,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자기 얼굴이 공개되면, 어느 시기에 공개될지 모르지만 공개되면 북에 있는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다치기 때문에 공개를 굉장히 꺼립니다. 한 두세 달 정도 계속해서 만나자, 그래서 OK사인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초인종 누르면 문을 안 열어주는 사람이 태반이에요. 난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만고. 그 중에는 용감하신 분들은 내 얼굴을 공개해서 나처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공개하겠다는 분도 많거든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같아요.
박인규 :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이 아까도 말씀 나눴지만 예전보다 많이 떨어진 게 사실인 것 같아요. 분명히 탈북자는 지금도 생겨나고 있고 국내에도 18000명이 있고, 그 해결책에 대해서는 정말 분분한데, 각자들의 해결책이 많은데 10년 동안 탈북자들을 봐오면서, 정부나 사회에서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 이것만은 해줬으면 좋겠다는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최순호 : 맨 처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본인의 문제일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태어났고 한민족이고. 그리고 1950년대에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서 원치 않았던 북에 가서 살 수 있었고 남에 와서 사시는 분도 계시고, 이렇게 섞여서 살 수 있었는데 분단국가 안에서 내가 저 모습일 수 있었다. 내가 저 사진 속에 있는 사람, 아니면 전 세계를 헤매고 있는 탈북자 중에 나도 그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이게 남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 호주, 영국에 가 있는 탈북자가 그 나라에서 관심을 가져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겠지만 종국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안고 가야 할 사람들은 저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통일 이후 모든 것들을 대비해나간다고 한다면 이 탈북자 문제를 보고 반면교사 삼아서 우리가 앞으로의 통일시대를 열어가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들이 왔을 때 이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하고 노년층이 왔을 때는 어떻게 한국사회를 정착시켜나가고, 이후에는 이것들을 교과서 삼아서 통일 이후에 남북이 비로소 하나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교훈 삼을 수 있는 정책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박인규 : 탈북자 책도 내셨고 전시회도 하셨습니다만, 앞으로도 계속 찍으실 거죠? 앞으로의 계획이나 혹시 탈북자 문제 관련해서 못다하신 말씀 있으시면 마지막으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순호 : 개인적인 욕심입니다만 탈북자 작업 이후에 북에서 이 책을 보고 사진적으로 제가 북이라는 사회를 까발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인권적 측면에서 이렇게 북을 뛰쳐나가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려는 사실을 안다면, 너 한 번 들어와서 우리들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해봐라 한다면 저는 북에 가서 2,3년이건 4,5년이 되건 기록을 남겨보고 싶습니다.
박인규 : 북이 조선일보를 잘 초청 안 한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언젠가 지금 국내 탈북자 18000천명이 있습니다만 언젠가 남북이 함께 살 날이 멀지 않기 때문에 탈북자들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고, 앞으로도 좋은 작업 계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최순호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탈북자 사진 작업을 해온 조선일보 최순호 기자를 초대해 그가 10년 동안 탈북자 사진을 찍은 이유가 뭔지 카메라에 담아온 탈북자들의 모습과 가슴 뭉클한 사연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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