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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길을 걷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17> 괘방령~신의터재/6.17~19

산행 열나흘 째. 화요일.

다시 찾은 괘방령 산장의 새벽은 비에 젖어 있었다. 한 주에 삼사일 걷는 산행을 시작한지 벌써 다섯 째 주를 맞았다. 산행을 할 때 마다 괴롭히던 오른 다리의 근육통도 조금씩 덜해졌고 산행을 마치면 무서울 정도로 온 몸이 부어오르던 증상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있는 동안에도 몸은 조금씩이나마 고통을 잘 견뎌내고 있었다. 몸은 긴 산행에 조금씩 아주 서서히 적응 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빗방울이 얼굴을 스쳤다. 상쾌했다. 그 상쾌함 때문인지 '아프지 않고 잘 할 수 있을까'하는 산행에 대한 걱정이 들지 않았다. 도상거리 17.6km를 가야 했다. 괘방령에서 출발하여 가성산, 장군봉, 눌의산을 넘고 추풍령을 지나 금산에 오른 뒤 사기점 고개를 거쳐 작점고개까지 가는 짧지 않은 길이었다. 우의를 입었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가벼이 여길 만한 비도 아니었다.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내일은 많은 비가 뿌릴 것이라고 했지만 오늘은 비 온다는 예보가 없었는데...

빗줄기는 괘방령을 적시고 있었다. 비록 해발 300미터의 낮은 고개이지만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지나는 괘방령은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빗줄기 떨어져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과 더불어 흐르고 남쪽으로 흘러드는 물은 낙동강과 하나 되어 흐른다. 도로를 따라 흘러 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본다. 지나 온 곳이 다르고 흘러 온 곳이 다르지만 모두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 되어 흐른다. 다름을 탓하지 않고 하나 되어 흐른다.
시계를 보았다. 5시 30분이었다. 모두들 준비로 부산한 듯했다. 더불어 백두대간을 한 번이라도 걸어보겠다고 합류한 정흥모 기자(전 경기신문 편집국장)와 홍성수 기자(전 경기신문 사회부장)도 준비를 마치고 산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소 어설픈 모습이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들의 모습도, 아직 제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면서 다른 이들의 어설픈 모습을 느끼고 있는 내 모습도 우스웠다.
▲산행준비 ©이호상

산행을 시작했다. 비닐하우스를 지나 산으로 들어갔다. 산은 깊은 안개에 젖어 있었다. 비에 젖은 야생화들 바람에 흔들리고 나뭇잎들 출렁였다. 산은 말이 없고 숲은 고요했다. 내리던 빗줄기도 소리 없이 그쳐 오는 듯 마는 듯 했다. 우의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신갈나무를 보았다. 반쪽은 껍질이 벗겨져 죽어 있었다. 삶과 죽음이 한 나무에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멋스러웠다. 참으로 숲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산 아래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결코 가까이 있을 수 없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삶과 죽음이 산에서는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생명의 영역에 대해 억지로 구분해 놓은 사람들의 생각과 말은 이곳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신갈나무를 그대로 놓아두고 가성산(716m)에 오르니 바람이 세찼다. 운무 가득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했다. 하늘을 걷는 듯 했다. 하늘 길에 오른 듯 했다. 운무 때문이었을까. 백두대간을 하늘 길로 생각했던 옛사람들이 그리웠다.
우리의 선조들에게 있어 백두대간은 그저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는 산줄기가 아니라 생명을 허락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푼 신성한 하늘이었다. 마루금은 하늘 길이었다.
선조들은 하늘이 이 땅을 열고 이 민족을 세웠다고 믿었다. 생명의 주체는 언제나 하늘이었다. 하늘이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고 지혜를 베푼다고 생각했다. 그 지혜들은 산을 통해 전해졌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 민족을 연 것도 산이었고, 수많은 성인과 도인들이 깨우침을 얻은 곳도 산이었다. 산은 생명과 지혜의 산실이었다. 그렇기에 자식들도 산에 들어가 기도함으로 얻어왔다.
산은 신성하고 밝은 깨우침을 주는 장소였다. 선조들의 이런 생각과 믿음들은 산의 이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산 이름에는 '백(白)'자가 들어간 산이 많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함양 장수 지역의 백운산(白雲山) 외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산이 100개가 넘는다. 그 외에도 문경, 괴산 지역의 백화산, 울진의 백암산, 태백시의 태백산, 영주, 단양의 소백산, 태백시의 함백산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리고 그 산들은 그 지역의 대표적인 영산으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산들이다.
▲하늘 길을 걷다 ©이호상

'백(白)'자는 '밝음'을 의미한다. '광명'을 의미한다. 즉 '지혜를 밝게 비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밝게 비춤'으로 '깨우침'을 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산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 은총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두산(白頭山)은 '밝음, 광명, 지혜, 깨우침, 은총의 땅' 등을 상징하는 '백(白)'자가 들어간 산의 가장 머리가 되는 산이다. 백두산은 글자 그대로 '밝음, 깨우침의 머리가 되는 산'이다. 참으로 민족의 영산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백두대간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백두산 하늘 못인 천지(天池) 장군봉에서 시작하여 원산, 낭림산, 두류산,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장안산을 거쳐 지혜의 산인 지리산(智理山) 하늘의 봉우리 천왕봉(天王峰)에 이르러서 발걸음을 멈춘다.
백두대간의 시작과 끝이 '하늘'에 닿아 있고 '깨달음과 지혜'를 담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그저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는 산줄기가 아니라 하늘의 세계로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하늘의 정신을 구현하는 천상세계로 인식했음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천왕봉을 오르려면 '하늘을 여는 문'인 개천문(開天門)이나 '하늘에 오르는 문'인 통천문(通天門)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그 문으로 들어가야만 하늘 길인 백두대간 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루금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하늘 길로 생각한 것은 그저 하늘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백두대간이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살아갈 수 있는 땅과 물과 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백두대간은 1정간, 13정맥과 수많은 지맥(支脈), 기맥(岐脈)들을 이 땅에 풀어 놓았을 뿐 아니라 열 개의 큰 강을 품어 흐르게 함으로써 수많은 생명들이 깃들어 살아갈 수 있도록 품어 주었던 것이다. 생명과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 삶을 준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하늘에 속한 신성한 산줄기이자 하늘 길로 생각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이호상

나는 하늘 길에 있는 가성산 표지석 곁에 앉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온 몸을 적시던 땀이 빠르게 식었다. 운무가 걷혔다. 막혔던 시야가 열리며 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나서자 장군봉(長君峰, 627m)이 지척이었다. 표지석 조차 없는 장군봉을 지나며 느꼈던 아쉬움과 허전함 때문이었는지 바람에 몸 부비는 나뭇잎 소리, 풀잎 소리들이 왠지 서글펐다. 그 서글픔의 정체를 알아볼 사이도 없이 눌의산(訥誼山, 743.3m)에 올랐다. 쫓아오는 이도 없는데 서둘러 걸은 길이었다. 가야할 길이 있다는 생각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헬기장에 앉아 쉬며 간식을 먹었다. 정흥모 기자는 심한 무릎의 통증을 호소했다. 걷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간단한 응급처치를 한 후 소염진통제를 주며 지난 몇 주 간의 내 모습이 생각나 웃었다. 내가 왜 웃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정 기자도 얼굴을 찡그리며 함께 웃었다.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세찬 바람에 운무가 걷혔다. 뛰어나다는 주변 조망 대신 멀리 추풍령이 보였다.
▲추풍령에 들어서다 ©이호상

하늘 길 백두대간은 눌의산에서 해발 200m의 낮은 고개인 추풍령으로 이어져 있었다. 고속도로가 대간 길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고속도로 아래로 난 지하통로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길목에 '백두대간의 기가 흐르는 곳 000모텔'이라는 광고 배너가 걸려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외국의 어느 지명 이름을 옮겨 놓은 모텔 이름은 백두대간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지하통로를 벗어나자 포도밭이 이어졌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추풍령은 물이 적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해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되는 지역이었다. 논농사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온통 포도밭이었다. 대간 길은 포도밭으로 가로 막혀 있었다. 포도밭 가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추풍령이었다. 해발 200m의 낮은 고개여서 조선시대에는 부산과 한양을 잇는 작은 사잇길에 불과했던 고개이다. 그렇게 주목 받지 못하던 고개가 경부고속도로와 추풍령이라는 노래로 다른 높은 고개들보다 분주하고 주목 받는 큰 고개로 변화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지나는 유일한 곳이 바로 추풍령이다. 백두대간을 지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남상규라는 가수는 '추풍령'(전범성 작사, 백영호 작곡)을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 가는' 고개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눌의산에서 내려선 추풍령은 고개라고 하기에도 좀 멋쩍은 느낌이 들 정도로 평지에 가까웠다. 그대로 사람 사는 분주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마을이었다. 우리는 추풍령 표지석 앞에서 촌스럽게 단체 사진을 찍은 후 구름 머물고 바람 쉬어 갈 곳도 마땅치 않아 보이는 낮은 고개 추풍령에 잠시 머물렀다. 바람과 구름 대신 머물렀다. 식사를 하였다.

비 온 뒤의 하늘은 푸르렀다. 끝 모르게 깊었다. 다시 길을 이어갔다. 조금 나아가자 '금산 0.2km'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이정표 아래에는 '등산로 폐쇄'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금산(384m)으로 들어갔다. 폐쇄되지 않은 산길을 따라 금산 깊숙이 들어갔다. 정상에 올라서니 반대편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산의 북사면 절반은 사라져 있었다. 아슬아슬한 벼랑이 무간지옥처럼 넓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채석장 개발로 이 땅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이 무너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하늘 길이라고 믿었던 길이 거의 끊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작은 돌산의 상처가 이토록 깊어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석재를 얻기 위해 파먹어 들어갔다. 해방 후 다행히도 중단되었으나 1968년 다시 훼손되기 시작했다.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낸 것이다. 삼동흥산은 폭약으로 산의 절반을 날린 후 철도용 자갈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에 들어갔고 나중에는 고속 전철 철도의 자갈로 쓰였다.
▲금산 정상에서 ©이호상

한반도라는 땅을 품어 있게 한 백두대간이 헐려 철도 침목 사이에 깔리는 자갈로 쓰이고 있었다. 그저 자병산과 함께 백두대간에서 가장 심각하게 훼손된 산이라고 말하고 지나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팠다.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산과 땅과 물을 제공해준 산줄기를 사람들은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깎고 헐어내고 있었다. 제 땅, 제 나라를 있게 한 산줄기를 작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통째로 무너뜨려 철도의 자갈로 팔아먹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마음이 아팠다. 바람이 불어 왔다. 무너진 절반 때문인지 바람 소리가 휑하고 황량했다. 마치 산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둘러보자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노란 씀바귀였다. 어여뻤다. 눈물이 나도록 예뻤다. 깊은 상처를 위로하는 듯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그 곁으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너무 흔해 민초들의 꽃으로 사랑받는 흰 개망초 꽃들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바람과 노니는 듯 흔들리며 춤추고 있었다.
아픈 마음 추스르며 내려오는 길에 까맣게 불탄 숲을 만났다. 오래지 않았던지 재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모두 불타 죽은 자리에 하얀 참으아리 꽃들이 무리지어 자라고 있었다.

저 꽃들처럼 무너진 금산도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저 참으아리 꽃들처럼 끊어진 백두대간이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끊어진 대간 길이 이어지고 나면 끊어졌던 사람들의 마음들도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서로 미워하고 상처 입히고 죽이지 않고 하나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참나리꽃 ©이호상

길을 따라 걸었다. 길은 언제나 내 앞에 있었다. 언제나 이어져 있었다. 때로 소나무 숲 사이로 휘어들고, 때로 참나무 숲 사이로 숨어들어 없는 듯 했지만 언제나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때로 하늘로 치솟기도 하고 때로 땅으로 꺼지기도 하여 사라진 듯 끊어진 듯 했지만 길은 언제나 이어져 있었다.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그 길을 따라 때로 걷고 때로 앉아 쉬며 지나는 바람소리를 듣곤 했다.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듣곤 했다. 때론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는 듯 했고, 때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뿐이었다. 마치 내가 침묵의 서약을 하고 바보의 길을 가는 수도자가 된 것만 같았다.
지나는 길에 나리꽃 홀로 피어 외로웠다.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 있어 사기점고개(390m)라는 이름을 갖게 된 고개에 거의 이르렀을 때 정흥모 기자와 홍성수 기자는 더 이상 걷기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들을 먼저 내려 보내고 우리는 길을 이어갔다. 밀밭을 지나자 작점고개(340m,'능치재'라는 이름도 있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작점고개에 내려서자 토끼풀 가득했다.
그 위로 하얀 나비들이 날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가로웠다. 평화로웠다.
아직 해가 남아 있었는데도 숲은 어두워지는 듯했다.
나비는 숲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금산을 다시 만났다. 무너진 북사면이 그대로 보였다. 깨끗이 절개된 피부처럼 금산은 완전히 잘려져 있었다.
▲ ©최창남

하늘 저편에서부터 노을이 깃들기 시작했다.
붉어지고 있는 하늘 탓이었는지 금산도 붉어진 듯 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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