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특히 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분권적 민주주의의 확산 즉 풀뿌리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가 처한 여러 문제들의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최근 박원순 시장이 이끄는 서울시도 주민참여예산제를 중심으로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시민참여예산제는 브라질의 포트 알레그로시의 사례를 참조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세계적으로 알려진 또 다른 사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 케랄라 주(州)의 인민계획캠페인입니다. 인도에서 이 실험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검토해보면 우리의 시도에 대해서도 좀 더 잘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민 계획 캠페인(People's Plan Campaign)의 핵심은 예산 편성과 집행에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다른 많은 주민자치 모델들이 대부분 행정망의 일부로 편입 혹은 종속되어 버리거나 관료제적으로 변질된 것은 예산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민참여운동은 바로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예산편성과 집행을 주민이 주도적으로 하는 모델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1996년 선거에서 인도공산당(CPI-M)이 주도하는 좌익민주전선이 승리하여 케랄라 주 정부를 다시 장악합니다. 이들은 '제9차 계획을 위한 인민 캠페인(People's Campaign for the Ninth Plan)'-흔히 '인민 계획 캠페인(People's Plan Campaign)'으로 약칭-을 통해 지역발전을 위한 계획과정에 주민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를 위해 1996년 분권 위원회(Committee on decentralization of Powers)를 구성하여 분권화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연구와 지원 활동을 하게 했습니다. 이 위원회에서 분권화의 기본 원리가 정해졌는데 자율성, 보충성, 역할 명확성, 상호보완성, 균등성, 인민참여, 책임성, 투명성 등이 그것입니다. 또 좌익 민주전선 정부는 제 9차 계획 수행 예산의 35~40%를 판차야트에 아무 조건 없이 배당했습니다. 이 예산의 사용을 위한 사업 발굴과 계획 수립, 사업 집행, 사후 모니터링 등에 주민들이 참여하도록 호소하는 것이 바로 인민 계획 캠페인(People's Plan Campaign)입니다.
이 캠페인의 두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역 정부 기관은 위로부터 내려온 계획의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재정적 기능적 행정적 자율권을 가진 통치기관이 되어야 한다. 2. 국가가 인민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게하기 위해서는 대의와 참여민주주의 둘 다가 강화되어야 한다.
▲ 인도 남부 케랄라 주 ⓒ연합뉴스 |
이제 인민계획캠페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봅시다. 초기 활동의 대부분이 시민능력을 향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많은 수의 워크숍, 정치교육, 스터디 그룹이 조직되었습니다. 1997년에서 1998년 사이에만 다양한 기술을 교육하는 발전 세미나에 30만 명 이상이 참여했습니다. 인민 계획 캠페인의 다음 단계는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마을 총회(Grama Sabha)를 케랄라 전역에서 개최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총회는 주민들이 직접 계획 과정에 참여하여 토론한 후 자신들의 발전 계획안을 제안하고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마을총회는 규모가 너무 크고 일 년에 몇 번밖에 모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한계 때문에 '여성들의 이웃집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웃집단은 40~50가구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지역의 계획사업에 있어서 가장 낮은 단위입니다. 여성 이웃집단의 구성원 70%가 빈곤선 아래 출신인 것도 의미 있습니다. 여성이웃집단들은 농업, 야자 섬유 제품 제조, 비누 제조, 양초 제조, 식품 가공 등의 사업에 종사하기도 했는데 가난한 여성들은 이를 통해 수입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이웃집단은 다음 단계에서 발전협회(development society)를 통해 발전계획에 직접 참여했고 발전협회는 발전과정에 가능한 많은 정치적 사회적 조직들이 포괄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발전협회의 역할은 분권화된 과정을 통해 내려진 결정을 실행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주민들의 의견에 추가로 조사한 자료를 더해 마을이 보유한 자원과 당면한 문제 그리고 주민들이 제안한 사업 아이디어의 목록을 정리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실행할 수 있는 사업계획 초안을 만들고 다음으로 판차야트 의원들이 사업 계획의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이렇게 촌락 판차야트 수준에서 정리된 사업제안서를 군(郡)판차야트로 올립니다. 군판차야트에서는 올라온 제안서를 심의하고 군단위의 계획을 수립하는데 이 과정에는 예산 전문가들, NGO들, 행정 관료들이 공동으로 참여합니다. 심의한 내용은 공청회를 열어서 다시 한 번 의견을 수렴합니다. 결과물은 다음으로 마지막 단계인 주(州) 단위로 올립니다.
주 정부는 여러 군에서 올라온 제안들을 심의해서 결정합니다. 촌락과 군판차야트에서 제안한 계획은 기술적 측면 특히 재정적 분석이 취약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보수로 활동하는 자원자들의 모임인 '자원봉사 기술지원단(Voluntary Technical Corps)'이 각 전문분야별로 계획안을 기술적으로 평가하고 문제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주 정부가 계획안을 심의,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 정부의 권한도 제약해서 군 단위에서 올라온 예산 제안을 주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축소 또는 폐지할 수 없게 했습니다. 예산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되면 군 단위에서 예산을 지급합니다. 주 정부가 아니라 군 단위에서 집행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는 판차야트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캠페인의 전체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CPI-M은 케랄라의 민주적 분권화는 지역의 기술, 지식, 그리고 자원을 가지고 지역 경제의 구조를 건설하는 과정이고 경제를 사회의 필요에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CPI-M에게 지역경제발전의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대안적 축적 논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경제활동만으로는 발전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고 가장 열악한 공동체에 권한을 부여하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관계가 더 정의롭고 평등한 발전의 추구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은 대안적 생산형태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양된 예산의 45%를 소규모 생산자 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경제발전과 분권화를 연결하려 했습니다. 소규모 야채생산, 비누와 양초생산 등 소규모 경제 운동은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통제하게 한다는 점에서 반자본주의적 논리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생산단위는 협동조합적 원칙에 근거해 있었고 대안적 사회조직을 발전시키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여겨졌습니다. 협동조합은 지역 시장을 주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이는 외부적 힘에 대한 종속을 벗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CPI-M은 생산수단에 대한 민주적 소유를 통해 하위 집단들에게 경제적 힘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판로를 확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생산단위들의 많은 수가 생존할 수 없었습니다. 협동조합 역시도 최근 우리나라에서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시뿐만 아니라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협동조합을 확산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에 대해서는 따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당은 케랄라의 대안적 모델이 세계은행이 주도하는 사회적 경제의 협동조합모델과는 다른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세계은행의 분권화는 국가의 힘을 약화시켜 국제기구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당의 전망은 사회가 주도하는 발전국가를 건설하고 이 과정에서 대의제적 구조와 관료정치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들의 주장이 정말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케랄라 모델의 변화에 미친 영향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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