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미 하원에서 실시된 금융구제법안 표결은 찬성이 205표, 반대가 228표였다. 다수당인 민주당에서는 140명이 찬성해 반대 95표 보다 앞섰다. 그러나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65명만 찬성했고 3분의 2인 133명이 반대했다. 공화당의 반대가 법안 부결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이다. 미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가 세계 경제를 마비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금융 산업에 대한 무분별한 규제 완화를 주장함으로써 월가 쇼크의 씨를 뿌렸던 공화당 의원들이 여당임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투표 행태를 보인 이유는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반대하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주요 외신의 분석에 따르면, 월가의 탐욕을 혈세로 채워주는 이번 구제안을 반대하는 지역구민들의 정서가 의원들로 하여금 반대표를 던지게 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웠던 '작은 정부' 이데올로기는 11월 4일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하원 선거에서 의석을 지키겠다는 계산속을 포장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작은정부론' 신념의 강자?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 명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공화당 소속 테드 포우 하원 의원(텍사스)은 29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무책임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고 금융 산업의 죄를 사하기 위해 돈을 내라고? 그건 틀렸다. 미국인들의 머리에 금융구제라는 총을 들이대는 것은 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정서와 닿아 있고, 민주당에서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도 같은 이유를 대고 있다.
그러나 공화당 반대파의 '주류'는 작은 정부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공화당의 그레샴 바렛 하원 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 의원은 "이번 법안이 미국식 자유시장의 얼굴을 영원히 바뀌어 놓을 수 있다는 게 내 우려"라며 "자유시장의 원칙을 강하게 지지하고 자유를 믿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공화당 소식통들은 지난 28일 있었던 공화당 비공개 의원총회에서도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고, 이번 법안을 만드는데 참여한 존 뵈너 공화당 하원 대표 역시 찬성을 적극 독려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고 <FT>는 전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주도해 법안을 마련하고 백악관에서 양당 지도부와 대선 후보들이 모여 법안 내용을 조율하던 지난주부터 별도의 성명전을 펼치며 '국가 개입은 있을 수 없다. 시장 스스로 위기를 이겨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유권자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직면한 의원들
그러나 <뉴욕타임스>(NYT)는 30일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의원들의 지역구민들의 반대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법안 부결의 근본 이유라고 분석했다. 특히 지역구 여론조사에서 경쟁자들과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의원들은 이번 표결에 아예 불참하거나 반대표를 던졌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번 의회를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하는 드보라 프라이스 하원 의원(오하이오)은 <NYT>와 인터뷰에서 "재선에 대한 걱정이 생각보다 표결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공화당 하원 의원인 폴 라이언(위스콘신)은 투표 직전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문제는 선거가 한 달 밖에 안 남았다는 것"이라며 "우리는 의원직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화당의 한 의원 보좌관은 <FT>와의 인터뷰에서 뵈너 공화당 하원 대표도 공화당 의총에서 수많은 유권자들로부터 온 반대 편지를 언급했다며 "그는 국가 개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원들과 지역구민들의 편지에 엄청난 신경을 쓰는 의원들 두 그룹을 상대해야 했다"고 말했다.
<FT>는 이번 법안에 반대했던 의원들의 상당수는 11월 선거에서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하는 의원들이었다며, 이에 따라 양당 지도부들은 재선이 확실하거나 은퇴하는 의원들을 대상으로 지지를 집중 호소를 했다고 보도했다. <BBC> 방송도 의원들이 그간 백악관의 구제조치 승인 압력보다 더 극심한 유권자들로부터의 부결 요구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폴스비즈니스닷컴>은 특히 반대표를 던진 의원 다수는 '설마 부결되겠느냐'는 생각으로 유권자의 반발을 의식한 투표 행위를 했다고 분석했다. 실제 <폭스비즈니스닷컴>이 이날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4% 가량이 구제금융법안에 찬성한 의원에게 표를 주지 않겠다고 답한 반면 표를 주겠다는 답변은 10%에 불과했다.
'책임 떠넘기기가 상책'
공화당 의원들은 자신들 때문에 법안이 부결됐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 펠로시 의장이 법안에 대한 의회 토론 막판에 너무 당파성 짙은 발언을 하는 바람에 공화당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는 것이다.
펠로시 의장은 연설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클린턴 시대에 달성한 예산 흑자분을 탕진했다고 비난하면서 "부시 행정부는 자유시장의 옹호자였는데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며 "감시도 규율도 없었다. 실패하면 황금 낙하산으로 경영진을 구해주고 납세자들이 구제해준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공화당 소속 애덤 퍼트넘 의원은 "토론 말미의 당파적 접근에 실망했다"고 밝혔으며 로이 블런트 의원은 펠로시의 연설이 없었다면 찬성 10여 표를 더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바니 프랭크 하원 재무위원장은 "자신들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국가를 단죄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며 "그 10여명의 명단을 주면 점잖게 대화해보겠다"고 받아쳤다.
한편 공화당 대선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TV 토론까지 연기하자는 승부수까지 던지며 마련한 법안이 부결되자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를 즉각 비난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에 민주당의 원내총무(whip)인 제임스 클리번 하원 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은 "표결 전 공화당 의원총회에서는 67%의 의원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 국익이 우선이라고 말했지만, 실제 표결에서는 그보다 훨씬 적은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졌다"고 공화당을 비난했다.
실제로 공화당 원내총무인 로이 블런트 하원의원(미주리)은 선거 전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75표의 찬성이 모아졌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투표에서는 65표만이 찬성이었다.
경제 위기 자체가 공화당엔 악재
문제는 선거구민들의 모순된 표심. 월가를 살리기 위해 혈세를 쓰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 미국인들은 한편으로는 금융구제법안 완전 무산될 경우 미국 경제 전반에 불어 닥칠 위기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모순적인 여론은 실제로 법안이 폐기될 경우 비난 여론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짙다. 그렇게 된다면 법안에 반대한 의원들은 또 다시 여론의 역풍을 맞게 되는 것이다.
공화당의 톰 데이비스 하원 의원은 이번 법안에 반대했던 의원들은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 유권자들로부터 전혀 다른 소리를 들을 것이라며 "별다른 소신 없이 표를 던진 이들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금융구제안에 대한 찬반과는 별도로 부시 행정부 8년 때문에 미국 경제가 위기에 빠졌다고 여기는 유권자들의 의식은 공화당 의원들을 최악의 선거 환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버지니아대 정치학과의 래리 새바토 교수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몇 주간 경제 위기가 어이지면서 민주당이 유리한 상황이 됐다"라며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경제 위기는 여당인 공화당에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바토 교수에 따르면 과거 우세를 보였던 공화당 현직 의원들의 지지율이 경제 문제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추락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상원 공화당 대표인 미치 매코넬(켄터키주)은 초반 우세가 무색하게 현재 도전자와 동률을 이루고 있다. 3선에 도전하는 중도적 공화당원인 고든 스미스 상원의원(오리건주)도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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