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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령으로 내려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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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령으로 내려서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15> 소사고개~괘방령/6.10~12

산행 열이틀 째. 수요일.

눈을 뜨니 새벽 3시 50분이었다. 4시 기상보다 10분 먼저 알람을 맞춰 놓았다. 동행들 보다 준비할 것이 많은 탓이다. 가볍게 몸을 푼 후 일회용 밴드를 발가락에 정성스럽게 감았다. 발톱이 시꺼멓게 죽어가고 있는 놈도 있었고 새빨갛게 부르터 있는 놈도 있었다. 만지기만 해도 쓰리고 아팠다. 양말을 두 켤레 신은 후 산행일기 공책 등을 가방에 넣었다. 짐을 다시 꾸렸다. 걸어가는 만큼 잠자리도 달라졌다. 오늘 밤 역시 걸어 다다른 곳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 4시 30분에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한 후 5시에 어제 저녁 내려 온 부항령으로 향했다. 평소에도 자외선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하는 나는 차 안에서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히 발랐다. 백두대간 산행을 계획하며 제일 먼저 걱정되던 것이 자외선 알레르기였다. 마흔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부터 생긴 자외선 알레르기는 점점 심해져 이제는 지병이 되었다. 평생 동행하며 살아가는 친구처럼 되었다.

차창 밖으로 아직 어둠에 잠겨있는 산들이 보였다. 몸 움츠려 앉은 듯 했다. 그 모습이 꼭 아픔을 끌어안은 이 땅을 닮은 듯 했다.

왜 이 땅의 산들은 때로 슬프게 느껴질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부항령에 도착했다. 5시 25분이었다. 부항령도 어둠 속에 있었다. 날씨는 흐렸다. 긴 산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항령에서 출발하여 백수리산, 박석산, 삼도봉, 삼미골재와 밀목재를 지나고 화주봉을 너머 우두령까지 가야하는 긴 하루였다.

산으로 들어갔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 개망초꽃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지난 저녁 사무치도록 아름답게 보이던 꽃이 이 새벽에는 슬퍼 보였다.
흐린 날씨 탓이었을까.
▲백수리산으로 가다 ©이호상

숲은 안개 가득했다. 지나는 것만으로도 온 몸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백수리산(1,034m)을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했다. 땀이 비 오듯 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서도 그날따라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다.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할 때 마다 늘 디디고 기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지나 온 내 삶이 떠올랐다. 끊임없이 내게 기대오던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자신이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요구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산에 오르니 나 보다 앞서 올랐던 일행들이 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최 선생님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갑시다."
"삼도봉 치러 갑시다."

힘들게 올라오는 내게 저 마다 한 마디씩 건넸다. '이제 가자'는 말에 모두들 웃었다. 웃음 때문인지 몸도 가벼워지는 듯 했다. 나도 웃었다. 웃으며 말을 건넸다.

"김대장님, 왜 산을 오르는 것을 '친다' 고 해요? 용어들이 과격하고 적당하지 않은 것이 많은 것 같아요. 군사적인 느낌의 용어들도 많은 것 같고. 좀 고쳤으면 좋겠어요. '산을 친다'는 말은 '산으로 들어간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산을 오른다'는 말도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들어간다'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오르는 것'과 '들어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오르는 것'은 산을 내가 오르는 것이지요. 산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에요. 그러나 '들어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산이 주인이지요. 잘 알고 계시듯이 산의 주인은 산이니 '들어가는 것'이 맞아요. 우리는 손님일 뿐이에요. 그러니 산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산이 나를 받아들여주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가짐, 그런 생각이 중요해요. 그 외에도 고쳤으면 하는 용어들이 더 있어요. 산에서 '내려가는 것' 혹은 '나가는 것'을 '떨어진다'라고 하는데 그것도 그냥 '내려간다', '나간다' 해야 할 것 같아요. 대장, 총대장이라는 호칭도 바꿨으면 좋겠어요. 말뜻으로는 그다지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지만 너무 권위적으로 느껴져요. 산을 사랑하고 산으로부터 배우려는 사람들의 문화가 너무 권위적인 것 같아요."
▲백수리산 ©이호상

김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아침부터 말 많았던 나는 멋쩍게 웃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나는 바람을 느끼며 서 있었고 김 대장은 한 쪽에 누워있던 '백두대간 백수리산 1,034m'라고 써있는 작은 표지석을 나무 기둥에 세워 놓았다. 뉘어져 있을 때에는 편안하게만 보이던 표지석에 뭔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서리는 듯 했다.
지나는 이들이 행여 보지 못할까 염려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는 이제껏 할 일 마치고 겨우 쉬는 아이에게 해야 할 일을 일깨우며 몰아세우는 것 같아 마음 무거워지기도 했다.

다시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백당나무 꽃이 화사했다. 흰 꽃잎들을 무성화 주위에 가득 달고 있었다. 안개 서린 숲 사이로 보이는 백당나무 꽃은 화사함에 앞서 그윽했다. 여느 때와 달리 차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기품이 어려 있었다.
꽃을 보고 나무를 느끼며 나는 그저 길을 따라 걸었다. 산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걸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걸었다. 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길이 없는 숲을 헤쳐 나간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앞서 이 길을 지나 간 이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다. 고마운 마음 전한다. 그러나 아무리 길이라고 하더라도 잠시 동안만 지나지 않으면 잡초 무성해져 길이 아니게 된다. 그러니 내 걸음도 이 길을 길이게 만드는 한 걸음이다. 후일 이 길을 지나게 될 이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의미 있는 한 걸음인 것이다.
▲백당나무꽃 ©이호상

이름 없는 산봉우리들도 지나고 박석산(1,175m)도 지났다. 돌멩이들이 많아 길이 편치 않았다. 그 때문인지 몇몇이 지도를 꺼내 남은 길을 확인하다 맥 빠져 했다. 남은 거리가 많은 탓이다. 나는 아픈 다리를 어루만지며 슬그머니 웃었다. 살아가다 보면 계산하지 않고 그저 해야 하고 그저 걸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저 순간에 충실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산길을 지날 때가 꼭 그러하다. 산은 오른 만큼 반드시 내려가야 하고 길은 걸은 만큼 틀림없이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삼도봉이 가까웠을 때 김천소방소장 명의로 개설된 119비상구급함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보니 구급약은 하나도 없고 쓰레기만 있었다. 썰렁했다. 마음 씁쓸했다. 관리가 되지 않았다. 관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전형적인 전시 행정으로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어 보였다. 좋은 마음으로 행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면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마음 불편했다.

숲은 여전히 시야가 흐렸다. 안개가 깊었다. 마치 긴 겨울 밤 사이 서리 내린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신 새벽 같기도 했고 오랜 세월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만나 사랑을 나누며 토해낸 지난 밤 숨결들이 가득한 것 같기도 했다.

삼도봉(1,176m)에 올랐다. 11시 18분이었다. 거의 6시간이 걸렸다. 삼도봉에 오르자 삼도화합기념탑이라는 거대한 석조물이 보였다. 원래 이름은 화전봉이었으나 삼도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뜻으로 삼도봉으로 불리게 된 산이다. 석조물의 하단에는 거북이 세 마리가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 세 마리의 용이 검은 여의주를 이고 있었다. 한 대장은 탑을 한 바퀴 돌며 삼도를 다 지났다고 농담을 건넸지만 나는 농담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산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이물스러웠다. 석조물의 삼면에는 충북 영동군, 경북 금릉군, 전북 무주군이라고 맞닿아 있는 행정구역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저 화합하면 될 것을 이렇게 산에 있는 바위 축내가며 이물스러운 석조물을 산 정상에까지 세울 필요는 없는 일이다. 삼도가 화합하겠다는 그 마음과 소망은 아름다우나 그것을 이루는 방법에는 화합의 정신이 깃들어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화합을 원한다면 그것을 염원하는 방법에도 화합과 조화의 정신이 깃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 석조물은 자연과 전혀 조화되지 않았다. 자연과의 조화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주장만 하면 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망이 아름답다고 결과도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해가 될 때도 많다.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방법에 정신이 깃들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석조물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곳곳에 균열이 나 있었다. 흉한 모습이었다. 삼도의 화합을 위해 세워진 석조물이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리 깨어지고 있는 화합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삼도화합기념탑에서 ©이호상

한 쪽으로 이정표가 보였다. 이정표에는 '현재위치 삼도봉, 석기봉 1.4km, 민주지산 4.3 km, 황룡사 4.4km'라고 적혀있었다. 석기봉과 민주지산은 한 방향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민주지산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그 산에 가 보고 싶었다. 이름 때문이었다. 혹시 민주지산의 '민주'가 민주주의의 민주(民主)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수많은 무명(無名)의 산들을 대신해서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지산이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일방적인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산세가 민두름하다고 해서 '민두름산'이라고 불리던 것을 일제 때 지도를 제작하며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사 한자인 민주지산으로 정했다고도 하고, 정상에 서면 덕유산에서부터 '두루두루 많은 산을 다 볼 수 있는 산'이라고 해서 '볼 민(旼)'에 '두루 주(周)'를 써서 민주지산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별로 재미없는 이름 내력이었다. 민주지산이라는 이름보다는 차라리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원래의 이름인 '백운산(白雲山)'이 훨씬 좋아 보였다. 이 이름에는 '산을 인간 세상에 광명을 주는 신성한 곳'으로 여기던 옛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으니 말이다.

신갈나무 우거진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갔다.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삼마골재를 지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지나 밀목령에 이르렀다. 오후 1시 20분이었다. 밀목령은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의 가래점마을과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대야리의 대야동 마을 간을 왕래하던 옛 고갯길로서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고 있다. 지금은 희미한 고갯길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점심을 맛나게 먹고 쉬었다. 쉰 덕분에 왼발 복숭아 뼈 바로 윗부분의 통증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쨍~!'하고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가슴까지 정강이를 타고 올라오곤 했었다.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다리의 통증 때문인지 더욱 길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숲도 그것을 아는지 숲은 울창해지고 나무들은 뒤엉켜 길을 막아서곤 했다. 앞을 볼 수 없었다.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나뭇가지들이 얼굴을 때리곤 했다. 특히 키 높이로 자란 쇠물푸레 나뭇가지들이 얼굴을 '딱~!'하며 때릴 때는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이 길도 지나던 사람이 많을 때에는 이렇게 얽히지는 않았으리라.

열심히 길을 헤치며 나아갔다. 화주 암봉에 도착했다. 오후 4시 35분이었다. 멀리 대간 길에서 벗어나 있어 지나지 못한 민주지산과 석기봉이 보였다. 지나 온 삼도봉도 보였다. 삼도봉에서 내려선 곳에 있는 삼마골재도 눈에 들어오고, 보이지 않는 밀목령도 눈에 밟히는 듯 가까웠다.

참으로 많이도 걸어 왔구나.
용케도 저기서 이곳까지 걸어 왔구나.
▲밀목령으로 내려서다 ©이호상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걷는 것을 잃어버리고 산지 오래되었다. 걷는 즐거움을 되찾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되었다.

로프에 의지해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암벽을 내려가니 1,207m의 석교산이 눈앞에 있는 듯 가깝게 느껴졌다. 산에 올랐다. 석교산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종일 흐리던 하늘이 맑아졌다. 오후 5시 50분이었다. 저녁이 오려는 듯 하늘 한 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길을 나섰다.

어둠이 내렸을 때 우리는 우두령(牛頭嶺,790m)으로 내려섰다. 저녁 8시였다. '백두대간 우두령'이라는 표지석이 조형물과 함께 크게 세워져 있었다. 중부지방 산림청 보은국유림관리소에서 2006년 10월 20일에 세운 것이다. 표지석의 뒷면에는 백두대간과 우두령에 대한 간단한 소개 글이 써 있었다. 글은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산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고 바탕이며, 생명의 원천으로 백두대간을 영원히 보존하고 아끼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백두대간 표지석을 세운다."

도시에 갇혀 산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산은 정말 삶의 터전이고 바탕일까.
그들은 산을 생명의 원천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 ©이호상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사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이 이미 깊었다. 어둠 속에 잠긴 산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지나 온 길이 뚜렷이 보였다. 가슴에 새겨진 듯 뚜렷이 느껴졌다.
차를 타고 숙소인 괘방령 산장으로 향했다.
어둠 속을 지나는 자동차의 불빛이 가야 할 길을 비추고 있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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