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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판 매케인, 팔 것도 없는 한국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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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판 매케인, 팔 것도 없는 한국 보수

[스포트라이트 美대선] <1> 천민보수주의 파국 맞나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38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프레시안>은 역사의 갈림길이 될 이번 선거를 쟁점별로 심층 분석하는 '스포트라이트 미국 대선'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한국과 미국에 거주하는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이 연재에서는 존 매케인과 버락 오바마 두 후보를 집중 조명하는 것은 물론 여론 지형, 인종 문제, TV 토론과 정치광고, 한반도 정책 등 여러 관심포인트를 깊이 있게 해설해 드릴 예정입니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의 매케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편집자>


유감스러운 빅딜 무산의 전모

2008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와 공화당 존 매케인의 승부가 점차 과열되면서 문득 의문이 스쳐지나간다. 만약 '민주당 부통령 후보 매케인' 빅딜 카드가 성사됐었다면 지금 그는 어떤 좌표에 서 있을까? 힐러리 클린턴와 오바마를 제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아니면 오바마 대통령-매케인 부통령 후보 카드로?

여기서 말하는 빅딜은 2004년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가 2000년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조지 W. 부시의 비열한 선거캠페인에 패해 상처를 달래고 있던 매케인에게 전격적으로 러닝메이트를 제안했던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한국의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달리 매케인은 공화당에 대한 애정이 강했기 때문에 당에 남았고 오히려 과거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조지프 리버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오바마와 세기의 대결을 펼치고 있다.

비록 지금 오바마와 매케인은 진보와 보수의 적자로 내세워져 있지만 과거의 빅딜 무산이 상징하듯 매케인은 매우 독특한 보수다. 만약 매케인이 다수의 예상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한국의 집권 진영은 그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미래의 한미관계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까? 자신들과 '같은' 보수 진영이 들어서는데도 불구하고 아마 그들은 상대를 읽어내는데 번번이 실패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말했듯, 사람의 감상 수준은 아는 만큼 비례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천민보수의 안경을 벗어보지 못한 한국의 보수가 매케인의 애국심과 고뇌, 그리고 한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 매케인이 25일 뉴욕에서 열린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 연례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처럼 매케인은 공화당 보수파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클린턴이 주도하는 모임에도 모습을 보였던 '이단아'였다. 그러나… ⓒ로이터=뉴시스

이제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것처럼, 대부분의 미국 보수가 입만 열면 허장성세의 레이건을 우상으로 언급하는 것과 달리 매케인은 진정으로 위대한 '개혁 보수'였던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대통령(1901~1909년 재임)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꿈이 강한 인물이다.

우리에게 루즈벨트는 조선을 일본에게 양도한 끔찍한 패권주의자였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안으로는 고삐 풀린 천민자본을 규제하고 밖으로는 제국으로의 토대를 구축한 대통령이다. 이후 진보주의자 대통령으로 등장한 프랭클린 루즈벨트(FDR, 1933~1945년 재임)는 이러한 토대에서 미국을 헤게모니적 제국으로 정립시켰다.

전자의 공정한 딜(square deal)과 후자의 국내외적 뉴딜은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가 가진 지구적 지배력의 원천이 됐다. 두 루즈벨트를 이해하지 않고 미국 보수와 진보의 내공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후 등장한 민주당 지미 카터나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을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시키면서 비록 천민자본주의에서는 벗어났지만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시장 전체주의와 고삐 풀린 투기적 자본의 시대를 열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꿈꾸었던 매케인도 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듯 레이건 신자유주의의 일선 전투병이었다. 그는 레이건의 노선이 함의하는 금융자본 우위 정책, 즉 이자율 인상 등의 파장으로 저축대부조합이 파산했을 때 더러운 로비에 연루되어 정치적 사망 직전까지 간 바 있다.

그 후에도 그는 레이건 사단인 필 그램 상원의원등과 함께 신자유주의 교리를 따라 모든 자본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노선을 강력히 추진해왔다. 그의 이념적 경직성은 심지어 서브프라임 위기 와중에도 규제완화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매케인은 레이건의 전투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점차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후계자로서 본격적인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즉 금권 선거 타파, 지구온난화에 대한 전향적 대처 등으로 공익 우선의 공화주의적 정치인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사건건 공화당 주류와 마찰을 빚은 그는 공화당 내 왕따 의원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인터네셔널헤럴드트리뷴(IHT)> 2월 20일자 보도 등이 시사하듯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제발 매케인이 오바마에게 패하기를 바라며 공개적으로 저주하고 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매케인의 새로운 빅딜

하지만 매케인은 다시 레이건의 전투병으로 대변신을 시도했다. 그는 그가 그토록 경멸해온 공화당 기득권들의 핵심 어젠더를 수용하고 터무니없는 사생아 추문 등 과거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칼로브(Karl Rove)주의자'들의 야비한 선거캠페인을 스스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매케인은 작은 정부론자, 네오콘(신보수주의자),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공화당의 3대 핵심 진영과 '프렌들리'하고, 칼 로브 수제자인 슈미트를 고용해 야비한 캠페인을 총지휘하게 했다.

그는 부시의 감세안을 부자들만을 위한 감세라고 비판하던 노선을 바꾸어 전폭 수용,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보수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공화당 핵심 인사 노스퀴스트의 승인까지 얻어냈다.
▲ '한 때' 매케인의 우상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대통령

매케인은 또한 네오콘 버전으로 해석된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패권주의적 대외 노선을 채택해 선과 악의 이분법적 안보 노선, 이라크 증파 등을 시도해왔다. 그리고 네오콘 버전의 정치체제관에 따라 대통령의 도청 허가 권한을 무한정 확대하는 제왕적 대통령을 추구하고 있다.

원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를 경멸해온 매케인은 그들과 화해를 시도하고 그들의 압력에 못 이겨 리버만 대신 새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를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수더분한 이미지의 페일린은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난을 방종한 인간들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고 언급한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급진적 정치관을 공유한다.

이처럼 3가지 핵심 사안에서 매케인이 선회한 결과 그의 캠페인 조직들에는 2000년 '아웃사이더 캠페인'을 벌였던 대선 캠프에 비해 '돌아온 용사'들로 득실거린다. 캠페인 매니저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회사인 페니매와 프레디맥의 로비스트라는 이유로 구설수에 오른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매케인에게 남은 것이라곤 여전히 존재하는 '반항아 DNA'에서 나오는 아웃사이더 스타일의 '기득권' 때리기 포퓰리즘과 애국주의의 진정성이다. 하지만 그가 애국주의에 매달릴수록 낡은 전쟁 영웅 이미지밖에 남는 게 없고, 96년 대선에서 패한 공화당 후보 밥 돌을 연상시킬 뿐이다.

최근 부쩍 심해진 여러 실수들이나 철면피 발언들은 매케인의 대대적 노선 선회와 그 노선들에 대해 역풍이 불기 시작한 21세기적 현실의 충돌에서 나오는 혼란의 징후들이다. 절박해진 그의 얼굴에는 때로는 원칙을 포기하면서 겸연쩍어하던 진정성이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미국은 클린턴식 신자유주의를 대체한 조지 W. 부시의 난폭한 패권주의가 미국의 헤게모니를 회복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경착륙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작은 정부론, 신보수주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다시 묶어주거나 그 3가지 축을 넘어서는 새로운 보수의 이념은 나타나고 있지 못하다.

부시는 이 3가지의 부정적 경향을 조합해 천민자본주의와 시장 전체주의가 결합한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언론인 론 서스킨드가 책에서 생생히 묘사하듯, 신자유주의자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조차도 견제와 균형을 파괴하는 부시 행정부에 분노해 "자본주의 시스템이 타락해가고 있다"고 내부 회의에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IHT> 2008년 9월 26일자 보도)

매케인은 이러한 현실에 적응하면서 대선 후보로 성공했지만 정치지도자로서는 실패하고 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금권 체제 타파 및 생태주의, 리처드 닉슨이 '보장 임금' 정책을 내놓으며 보여줬던 사회안전망에 대한 고민과 중국과의 대담한 수교 같은 현실주의 보수가 아직 태동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 보수의 위기는 현재의 금융대위기보다 더 광범위하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보수가 패한다면 그 안에서는 한동안 심각한 자중지란이 일어날 것이고, 민주당은 여유 있게 재선까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천민 보수의 비극

이명박 정부의 불운은 미국의 보수가 천박의 정점에 다다란 바로 그 시점에 집권했다는 점이다. 광우병 파동의 배후는 이명박 대통령이 오해하듯 한국의 좌파가 아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도축장 안전조치들이 이뤄졌던 것이 레이건 및 부시 시대로 넘어 오면서 21세기 '지구적 위험 국가' 시대에 맞게 천민적 규제 완화로 나타났던 것이 진정한 배후였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시장 전체주의의 극단적 부작용이 만들어낸 '금융 대량살상무기'의 유탄까지 맞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한국의 주류 개혁 진영이나 보수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미국의 근대 초기 보수였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그것보다 후진적이라는 사실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재벌로 대표되는 천민자본주의 체제를 현상유지하면서 클린턴식의 신자유주의 환상을 추진하다가 결국 대중적으로 실패했다. 이어 등장한 보수 정부는 천민자본주의와 시장 전체주의 양자를 부시 행정부 이상으로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작은 정부론, 네오콘, 종교 근본주의 3자의 결합 행동이 한국에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미국 기준 보다 못한 종합부동산세를 사회주의라 인식하는 것은 위대한 보수 루즈벨트를 사회주의자라고 보는 미국의 천민 보수 노스퀴스트와 무척 닮아있다. 감세안과 균형예산 파괴의 결합은 한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네오콘의 북한 붕괴론이나 제왕적 대통령제의 추구는 한국에서도 북한 압박론과 공안통치로 그대로 나타난다. 종교적 근본주의 영향력 확대는 오늘날 종교 대결이라는 신종 균열 구조까지 만들어 냈다.

오늘날 루즈벨트를 꿈꾸었던 매케인의 원칙이 좌절된 것은 미국의 현재 지형에서 개혁적 보수주의가 얼마나 힘든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예 개혁 보수주의로 몸부림치는 움직임조차 미약한 것에 더 큰 위기가 있다. 예를 들어 건강한 보수인 남재희 전 장관이나 김종인 전 의원 등의 공익을 위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보수 정치세력이 없다는 것이 한국의 비극이다.
▲ 서울시장 시절 뉴라이트 행사에서 연설하는 이명박 대통령. 뉴라이트가 벤치마킹하고 있는 네오콘 이념은 미국에서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은 부시의 실패 속에서도 매케인이라는 개혁적 대안이 있었기에 그나마 오바마와 접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보수 진영에는 '대권 주자'는 넘쳐흐르지만 철지난 네오콘이나 벤치마킹하는 뉴라이트나 도덕주의 설교인 공동체자유주의 외에 새로운 보수 이념이 탄생하고 있지 않다.

한국에는 시어도어의 천민자본주의 타파, 토건주의를 대체한 자연주의, 닉슨의 현실주의 외교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보수 이념이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미국의 위대한 보수였던 '건국의 시조들'(Founding Fathers)은 견제와 균형의 공화주의적 법칙을 무시하면 반드시 그 법칙이 현실에 복수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후계자들은 1970년대 이후 시장 전체주의의 확산 속에서 오늘날 천민보수 부시를 만들어냈고, 매케인을 타락시키며 결국 견제와 균형의 네메시스(복수의 여신)로부터 대대적인 복수를 당하고 있다.

폴 크루그먼이 쓴 책에 따르면,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시장 전체주의가 대공황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되고 난 뒤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재선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분별하게 사리사욕만 채우는 것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압니다."

미국과 한국의 시민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정치적 경험을 통해 윤리적으로 다소 결함이 있는 지도자들이 사실은 윤리적으로보다 경제적으로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학습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에서 이러한 연설을 자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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