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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항령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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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항령 가는 길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14> 소사고개~괘방령/6.10~12

산행 11일 째. 화요일

어둠이 내린 지는 오래 되었다. 무주로 들어서자 개구리 소리 요란했다. 정겨웠다. 마음이 한갓져졌다. 차분해졌다. 달리던 차가 멈추어 섰다. 지난 산행의 끝날 덕유삼봉산(1,264m)을 내려와 신세를 졌던 민박을 함께 하는 대덕산식당이었다. 늦은 열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순두부찌개로 맛나게 늦은 저녁 식사를 한 후 민박집으로 들어왔다. 구석진 끝 방이 내 차지였다. 방바닥이 찼다. 보일러를 올렸으니 잠시 후면 따뜻해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짐을 풀었다. 옷을 옷걸이에 걸려다 벽에 찢겨진 대자보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지역의 어느 농민회에서 와서 M.T를 한 것 같았다. 그들이 떠난 후 집 주인이 떼어낸 듯 보이는 대자보는 말끔히 떨어지지 않아 군데군데 글자들이 보였다. 'TA'자가 보였다. 'FTA'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F'자가 찢겨져 나간 것이겠지. 그 외에도 '농민', '협정', '전 국민', '정책적' 등의 글씨 등이 보였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빛 바랜 벽지 위에 붙어 있는 글씨들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왠지 서글퍼보였다. 그저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나 온 내 세월처럼 말이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아무 것도 내 보일 것이 없는 내 삶처럼 말이다. 찢겨진 대자보도, 남겨진 글씨들도, 글씨를 썼을 사람들도 , 백두대간을 타겠다고 이 낯선 방에서 잠을 청하는 나도 모두들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별로 할 말이 없는 빛바랜 벽지들을 닮아 있는 듯했다.

'이번 주 산행은 잘 할 수 있을까?'

소사고개에서 괘방령까지 44.3km의 산길을 가야한다. 특히 내일 아침에는 1,248m의 초점산을 가파르게 치고 올라야 한다. 소사고개는 해발 680m이니 568m를 올라가야 한다. 힘든 산행이리라. 오른 허벅지의 근육통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자정이 넘었다. 문이 뒤틀려 제대로 닫히지 않는 방문을 통해 코고는 소리가 넘어왔다.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코감기는 더 심해져 있었고 곧 따뜻해질 것이라던 방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냉골이었다. 나는 뒤척이다 새벽 2시가 되어 마루로 나가 동행들 틈으로 껴들었다. 따뜻했다.
▲ ▲아침, 산행준비 ©이호상

눈을 뜨니 5시 50분이었다. 거의 한 시간이나 늦었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하고 경상남도 거창과 전라북도 무주를 이어주는 소사고개로 향했다. 일 년 내내 미풍이 불어 집집의 마루마다 깔리는 가는 모래를 거둬가 소사현(笑沙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곳이다. 그렇게 미풍이 불어서일까.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서로 등 긁어주며 산다는,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 훈훈해지는 마을이었다.

늦은 산행을 시작했다. 아침 7시 25분이었다. 초점산 삼도봉(1,248.7m)을 향했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쾌청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은 온통 고랭지 채소밭이었다. 여러 군데 지나는 고랭지 채소밭 사이로 대간 길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대간 길은 고랭지 채소밭의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채소밭을 에둘러 가다가 다시 대간 길을 만나곤 했다. 비닐하우스도 있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올 겨울 김장배추로 출하될 어린 종묘들이 가득했다. 몇 걸음 더 올라가자 묘지가 보였다. 대간 길은 묘지를 지나고 있었다. 아니 대간 길에 묘지가 세워져 있었다. 묘지 주변에는 가드레일이 세워져 있어 통행을 막고 있었다. 산길이 아니더라도 대간 길은 마을을 지나며 이렇게 끊어져 있었다.
이 모두가 백두대간을 잃어버린 탓이리라.
백두대간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는 대간길 ©이호상

"그러니까 분명히 백두대간 길에 있는 고랭지 채소밭 또는 유실수를 심어 놓은 곳, 또 무분별하게 개간한 곳 등은 모두 원상 회복시켜야 합니다. 물론 나라에서 백두대간을 보존하고 회복하기 위한 법률의 정비 등이 우선 앞서야 하겠지요. 보상도 하고요. 묘지 등도 이장을 해야지요."

한대장의 말이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옳은 말이지요. 그럴 때가 오겠지요. 숲을 숲에게 돌려줘야 하듯이 백두대간은 백두대간에게 돌려줘야 하겠지요."

'백두대간은 백두대간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대답하면서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그렇다. 산은 산답게, 숲은 숲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갈 때 자연은 조화를 이루듯이 백두대간은 백두대간다워질 때 이 땅은 조화로워질 것이다.
깊은 숲으로부터 새소리가 들려왔다. 숲으로 들어갔다. 숲의 바닥까지 들어온 햇살로 인해 숲은 싱그럽고 화사했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빛의 구슬들이 숲에 깔린 듯 했다. 지나가는 길에 촛대승마가 하얗게 피어 햇살을 받고 있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초점산 삼도봉이 눈앞에 가까웠다.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니 지나 온 길이 보였다.

'삶에서도 저렇게 지나 온 길을 뚜렷이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살아 온 길을 뚜렷이 볼 수만 있다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인생길은 산길과 달라서 지나 온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초점산 삼도봉 1,248m'라고 쓰인 표지석이 보였다. 돌무더기 한가운데 세워져 있었다. 전라북도 무주와 경상북도 김천 그리고 경상남도 거창을 가른다 하여 삼도봉이라고도 불리지만 삼도를 온전히 가르고 있지는 않았다. 삼도를 온전히 가르고 있는 산은 민주지산의 삼도봉이다. 남한 땅에는 삼도봉(三道峰)이 세 개나 있다. 모두 백두대간 줄기에 있다.

첫째는 지리산 서부능선에 위치한 삼도봉(1,550m)이다. 경남 하동군과 전남 구례, 전북 남원의 경계지점에 솟아 있다. 원래 이름은 낫의 날을 닮았다고 해서 '낫날봉'인데 발음이 쉽지 않아 '날라리봉'이라고 불리다 삼도봉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 받았다.
둘째는 초점산 정상으로 알려진 삼도봉으로 경북, 전남, 전북을 구분 짓는다. 대덕산과 이어지는 산이다.
셋째는 민주지산(岷周之山)의 삼도봉(1,177m)으로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 전북 무주의 경계에 솟아 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3개의 도시 주민들이 세운 대화합 기념탑이 있다.

초점산 삼도봉을 내려왔다. 대덕산을 향했다. 키 작은 싸리나무들 위로 자신들의 사랑을 보여주려는 듯 나비 한 쌍이 날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다정하다. 노란 미나리아재비꽃이 바람 한 점 없는데 저 혼자 흔들거리며 나를 보고 웃는 듯하다. 나도 웃어주었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반복되었다. 지난 3주 동안 나를 괴롭히던 오른 허벅지의 근육통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새로 신은 등산화로 인해 왼 발등이 까지고 벗겨졌다. 힘들었다.
산은 삶처럼 참으로 정직했다.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반드시 그만큼 비탈진 길을 내려와야 했다. 항상 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이 힘들고 어렵다. 고통스럽다. 삶이 그러하듯이.
▲대덕산을 오르다 ©이호상

대덕산(1,290m) 정상에 올랐다. 옛 이름은 다락산(多樂山), 다악산(多惡山)이었다고 한다. 하나의 산 이름에 어떻게 '락'(樂)과 '악'(惡)이 동시에 쓰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대덕산(大德山)이라는 이름 그대로 큰 덕으로 많은 즐거움도 많은 악함도 모두 품어 안았다는 뜻일까. 누구나 몸 기대어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아니면, 그들 모두가 지나치지 않도록 큰 덕으로 품어 안았다는 뜻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 산은 국난이나 천재지변이 생길 때마다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그 내력만으로도 입간판의 소개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고 영산(靈山)임에 틀림없다. 큰 덕을 품은 산임에 틀림없었다.

대덕산에서 덕산재로 향하는 길에 얼음골 약수터를 지났다. 한 모금 마시자 가슴이 시원해졌다. 쏟아낸 땀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모두들 미지근해진 물병의 물을 버리고 약수터의 찬 물을 받았다.
얼음골 약수터에서 지친 몸을 쉬고 다시 길을 나서고 오래지 않아 덕산재(664m)에 도착했다. 덕산재를 조금 지난 숲길에서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였다. 나물치를 뜯어와 쌈도 싸먹었고 더덕을 캐와 더덕주도 만들어 마셨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진수성찬 탓이었을까. 모두들 걸음이 가벼워졌다. 800m 가 넘는 이름 없는 봉우리들을 연이어 넘었다. 한 때 광산이었다는 폐광 터도 지났다. 오래 전 황폐해졌던 산은 어느 새 풀잎 가득하고 꽃들 피어 있었다. 아직은 황폐한 채로 비어있는 둔덕들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치료하는 것은 언제나 자연이다. 자연은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한다. 자연은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다. 나는 때로 우습다. 스스로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능력을 지닌 자연을 그런 능력을 지니지 못한 인간이 보호하고 치료한다고 난리법석을 떠니 말이다. 자연은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보듬어 안고 함께 살아갈 능력이 충분히 있다. 그런 능력을 지니지 못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러니 인간이 자연을 판단하고 재단할 일이 아니다. 그저 함께 살아갈 뿐이다. 자연의 일원으로서 자연 속에서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면 되는 일이다.

생각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새 부항령(釜項嶺, 690m)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전북 무주군 무풍면과 경북 김천시 부항면을 이어주던 고개로서의 부항령은 옛 정취를 잃은 채 쓸쓸했다. 지나는 사람 없이 잊혀진 오솔길이 되어 있었다. 삼도봉 터널이 뚫렸기 때문이다.

도로로 내려섰다. 도로는 온통 흰 물결로 뒤 덮여 있었다. 개망초였다. 개망초 꽃이 하얗게 피어 바람에 흔들리며 남실대고 있었다. 작은 꽃망울들 활짝 피우고 있었다. 만발했다.
활짝 핀 개망초 꽃들 뒤로 삼도봉 터널이 보였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흰 개망초 꽃이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이었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다.
▲개망초 ©이호상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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