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미국 정부가 금융위기를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월가와 정부는 여전히 '탐욕과 부패의 공범이라는 비난을 면키 힘들다.(☞관련 기사:美금융위기와 매케인의 초절정 변신)
우선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서라며 특정업체들에게 구제금융을 선물하고, 나아가 모든 금융기관들의 부실자산을 공적자금으로 사주겠다는 대책을 보자.(☞관련 기사:'혈세로 비싸게 사주기'가 금융위기 대책?)
민간기업들이 저지른 잘못에 왜 혈세를 투입하느냐는 반발에는 항상 '시스템 붕괴 방지가 우선'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구제금융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이 정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에는 '시장파괴력이 남다른 업체들이기 때문'이라면서 정부의 판단을 믿어달라고 한다.
정부의 그런 판단이 과연 타당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치자.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한 공적자금 투입이라면, 죄없는 서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돈만 뜯겨야 하는가? 혈세를 바치는 데 따른 보상이 주어지고, 시스템 붕괴 위협을 초래한 기업과 경영진, 방만한 투자를 한 주주와 채권자들은 상당한 응징을 받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구제금융을 선물받은 AIG나 합병을 선택한 메릴린치 등은 물론, 파산을 신청한 리먼브라더스의 최고경영자는 회사를 떠나도 스톡옵션 행사 등으로 천문학적인 보수를 챙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회사의 경영실적과 관계없이 엄청난 보수를 챙겨온 것으로 악명 높은데도 여전히 무풍지대인 것이다.
'시스템 붕괴 위협'만 내세운 美정부의 '백지수표' 발행 요구
한마디로 혈세를 내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조건으로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문에 민주당이 다수당인 미국 의회도 대선을 40여일 쯤 앞둔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점에 7000억 달러라는 공적자금을 요청하는 법안을 제출한 정부에 대해 반발하는 기류가 일고 있다.
기업들을 위한 지원책만 있고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대책은 빠져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이에 대해 법안 통과가 시급하기 때문에 다른 대책을 포함시킬 시간이 없다며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태도는 '백지수표' 발행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클린턴 행정부 때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21일(현지시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What Wall Street Should Be Required to Do, to Get A Blank Check From Taxpayers'라는 글(원문보기)을 통해 공적자금을 대가로 월가에 마땅히 요구할 사항들을 제시해 주목된다.
우선 라이시는 유권자들이 마음좋게 '백지수표'를 달라는 정부의 요구를 바라만 보고 있을 처지가 아님을 강조했다. 라이시에 따르면, 월가의 기업들이나 투자자들이 지난 몇 년 동안 엄청난 수익을 즐기고 나서는, 그들의 직무유기와 배임, 탐욕,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어리석음으로 초래된 사태에 대해서 모든 미국 가정에게 사실상 2000~5000달러를 뜯어내려고 하고 있다.
돈을 요구하는 시기도 아주 좋지 않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실업과 임금 저하, 에너지와 식품 및 의료보험, 자동차 할부금과 주택담보대출 상환 문제로 걱정이 태산같고, 노후자금과 자녀들의 대학 학비 마련에 쩔쩔 매고 있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내가 이렇게 쪼들리고 있을 때 왜 내가 월가에게 적선을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다. 라이시는 자신이 의원이라면 이런 요구를 할 것이라면서 몇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정부 매입 부실채권에 비례해 주식 지분 인수 받아야
▲ 정부가 사들이는 부실 채권에 비례해 해당 기업의 주식 지분을 인수받는다. 그래서 주가가 오르게 되면 공적자금 회수율을 높일 수 있다.
▲ 공적자금을 받는 기업 경영진들은 스톡옵션 등 모든 형태의 보상을 포기하고, 향후 5년 동안 회사 수익과 연계된 보수를 받는 것에 동의하도록 한다.
▲ 월가의 모든 기업 경영진은 이번 대선과 향후 선거 출마자들에게 선거자금을 후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즉각 취해야 한다. 또한 월가의 모든 PAC(정치행동위원회)가 폐지되어야 하며 월가의 로비스트들은 의원들의 특별한 정보 청구가 아니라면 활동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 납세자들로부터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정책결정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월가의 조직들에게 납세자가 왜 돈을 대주어야 하는가?
특히 마지막 항목은 오늘날 금융위기를 초래한 미국 정부의 부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금권정치'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요구인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현재 미국의 대선 과정을 보면 엄청난 자금을 퍼부어야 가능한 TV 정치광고와 대대적인 유세전이 치열하다.
대선 후보의 경우 공식적으로 개인이나 기업이 직접 기부할 수 있는 후원금은 몇 백만원 이내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선거자금은 무한정 쓸 수 있다. 정치인이 "내 돈 내 맘대로 쓰겠다"고 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위배된다는 대법원의 판결에 따른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선 후보들은 각기 수 억 달러의 자금을 모금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직접 후원금이 제약되어 있는데도 원래 억만장자가 아닌 후보도 흥청망청 쓸 돈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일종의 '스폰서십'이 무제한 허용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스폰서가 바로 PAC(정치행동위원회)다. 기업이나 단체에는 사실상 로비를 위해 PAC라는 조직을 두고 자금을 모아 후보자를 지원하는 외곽조직들에 정치자금을 '합법적'으로 제공한다. 이 조직들은 이런 자금을 후보자를 위한 TV광고 비용들을 대는 것이다.
이런 정치자금을 '소프트머니'라고 부르는데, 한 번에 수백 만 달러씩 낼 수 있는 기업이나 부자들은 미국에서도 0.1%도 안되는 극소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들이 미국 정부를 '부패와 탐욕의 공범'으로 만드는 '금권정치'의 주역들이다.
1980년대 중반 선거법 개정과정에서 등장한 이 '소프트머니 시스템'으로 인해, 미국의 양당제는 정치노선의 차이가 불분명해지고 말았다는 분석처럼, 사실상 미국의 정치제도가 돈으로 정치를 지배하려는 '기업'에 넘어간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를 바라보는 많은 전문가들이 "미국이라는 제국이 멸망하는 씨앗은 이번 금융위기 수십 년전에 뿌려졌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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