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쥬신(한국)의 사학계에서는 백제를 실체로 보고 있습니다. 반도 사학계에 따르면, 백제는 BC 18년경에 한강유역에 건국하여 스스로 성장하다가 3세기 중엽 고이왕대에 이르러 연방제의 성격을 지닌 초기 고대국가를 성립시키고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하여 반도 사학계가 말하는 백제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신화에 불과함을 강력하게 제기했습니다. 저는 만주지역에서 세력이 궤멸된 부여계가 남으로 이동하여 이전에 이미 한강 유역에 정착하고 있던 부여계 소국을 정벌하여 정착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부여계의 회복을 추구하다가 강력한 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열도부여의 개척에 눈을 돌렸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점을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도와 열도간의 관계사에 대해서 거론할 예정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475년 개로왕의 피살로 백제는 사실상 멸망한 후 곤지왕자(곤지왕 : 개로왕의 아드님)를 중심으로 한편으로는 반도부여의 재건에 다른 한편으로는 열도부여의 건설에 매진해온 것이 부여계의 역사였습니다. 이 점들을 앞으로 여러 장에 걸쳐 계속 밝혀갈 것입니다.
먼저 반도쥬신(한국) 사학계의 입장을 살펴봅시다.10) 2005년 현재 한국의 고등학교용 국사책에서는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B.C. 18),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내면서 성장하였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라고 합니다.11)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바탕을 두고서 쓴 기록인데 현대 반도쥬신 사학계의 입장을 서술한 것입니다.
초기에는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이 내려와 건국한 소국 백제가 이후에는 큰 외부세력의 유입이 없이 스스로 성장하여 대국 백제가 되는 것으로 분명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각종 세력들이 복잡하게 교차되는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력갱생(自力更生)하여 중견국가로 성장한다는 식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학용 교재에서는 "마한의 한 군장국가인 백제국(百濟國)으로부터 발전하여 기원 전후에 초기국가를 형성한 백제는 3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대국가를 이룩하였다. …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 234~286) 대에 이르면 대외적으로 정복사업을 활발히 하고 대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 이에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르러 광대한 정복국가를 이루고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던 것이다. 『주서(周書)』나 『수서(隋書)』에서 백제의 시조를 구이(仇台)라고 하는데 이 구이는 바로 이 고이(古爾)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이왕대에 백제의 시조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12)라고 하여 이를 부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반도 사학계의 백제사 건국과정에 대한 논의들을 좀더 깊이 살펴봅시다.
반도쥬신 사학계는 "후한의 환제·영제(147~189)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나라의 군현이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삼국지』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한강 하류 지역의 백제를 중심으로 소국간의 연맹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국호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바뀌면서 한강 이북에서 한강 이남으로 중심지의 이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이 시기는 백제의 초고왕 시기인데 당시 낙랑군 관할 하의 많은 백성들이 마한의 북부지역으로 유입됨으로써 심각한 정세의 변동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백제가 성장하게 되었다는 논리입니다.13)
그런데 문제는 『삼국사기』의 초고왕대의 기록이라는 것은 신뢰할 수가 없는데다가 단순히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이 바로 백제의 성장을 가져고 왔다는 논리는 이해가 안되지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반도의 사학계는 『삼국사기』를 근거로 하여, 백제는 한강유역을 매개로 하여 미추홀의 비류집단과 지역연맹체를 형성하고 맹주국의 지위를 차지하여 세력을 키웠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점차 마한 연맹체의 맹주권에 도전하려했다고 합니다. 그 기회가 된 것이 245년 한(韓) 세력과 중국 군현과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즉 위나라의 군현이 진한 8국의 교섭 창구를 대방군에서 낙랑군으로 바꾸려 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싸움에서 마한은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고 대방태수인 궁준(弓遵)을 전사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은 마한의 패배로 끝이 나서 이 전쟁을 주도한 목지국의 위상이 약화되어 그 틈새를 타고 백제가 목지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맹주국으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고이왕대로 추정합니다.14) 그러면서도 "백제는 비록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이 되었지만 『진서』「마한전」에서 보듯이 서진(西晉)과 교섭할 때는 마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는 3세기 말까지 백제가 아직 연맹체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고 합니다.15)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도대체 위에서 말하는 논리 가운데 마한의 패배로 인하여 백제가 성장했다는 기록은 당대의 사서 가운데는 어디에도 없는데도 이런 식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백제는 위치로 보면 대방의 공격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을 수 밖에 없는 지역입니다. 오히려 마한의 맹주국은 최전선의 소국백제를 자기의 안위를 위해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마치 장제스(蔣介石)가 장시에량(張學良)을 이용했듯이 말입니다]. 또한 백제국이 한(韓)의 맹주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지요. 사서에는 없는 기록입니다.
반도 사학계는 "초기의 백제 역사는 실제로 마한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마한과 백제는 동일체(同一體)에서 점진적인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나 다만 어떤 선에서 분명하게 끊을 수 있는가는 역사학계의 오랜 숙제로 남아있다. 천관우는 어디까지가 죽순(마한)이고 어디부터가 대나무(백제)인가 하는 것처럼 매우 어려운 으로 매우 풀기 어려운 문제라고 비유한 바 있다."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16)
우리가 대국으로 인식하고 있는 백제의 역사를 마한사의 일부로 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신화(神話)지요. 부여사의 흐름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지요. 그리고 반도의 사학계는 온조의 백제가 한강변에서 자생하여 반도의 서남단을 지배하는 거대세력이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역사 패러다임의 가장 큰 오류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도 사학계가 이른 바 백제(百濟)의 전신(前身)을 『삼국지』에 보이는 미미한 소국 백제국(伯濟國)17)으로 보는 것은 『양서(梁書)』부터였습니다. 이 백제(伯濟)가 한강(漢江) 하류에 있으면서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등장으로 위기를 느껴 한편으로는 자발적인 연횡(連橫)·합종(合縱)하기도 하고 주변 소국(小國)들을 통합하여 4세기 전반부터 중엽에 걸쳐 마한(馬韓) 전역을 대표하는 국가로 성장하고 국호도 백제(百濟)로 고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증거가 될만한 사료는 『삼국사기』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고대라 해도 "일단, 무조건 쓰고보자"는 식이 되면 곤란합니다. 이 같은 서술방식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나 다를 바 없지요.
이런 서술 방식이 백제의 역사, 나아가 부여의 역사를 암흑으로 몰고간 계기가 된 것입니다. 반도 사학계의 이 같은 연구 태도는 백제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부여계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고증할만한 어떤 증거도 없는데도 이것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증거 중심의 고증을 강조하는 반도 사학계가 정작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고리 중의 하나에 대하여 침묵하는 까닭을 알 길이 없군요.
소국(小國) 들간의 연횡합종은 쉽게 이루어질 사안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발적인 연횡합종의 경우가 나타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가야의 경우에는 주변의 매우 강압적이고 위험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왕국을 구성하지 못하고 각개 격파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국제정치란 과거나 지금이나 냉엄한 것입니다. 대개는 외부의 압도적이고 강력한 힘에 의해 영역이 결정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춘추전국 시대 당시 국가가 서로 합쳐진 예는 없습니다. 특히 전국시대 당시 강력한 진(秦) 나라의 공격이 바로 코앞에 있어도 국가가 서로 연합하면서 거대 세력화 된 예는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제'가 3세기까지 정사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인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백제의 이름이 중국에 처음 보이는 것은 동진(東晋)의 영화(永和) 2년(346년) 경이므로 백제국의 성립은 4세기 전반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즉위 원년이 전한(前漢)의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 18)으로 되어있다. 이 개국 기년은 백제의 독자적인 기년으로 전해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기년에서 만들어진 책상 위에서의 조작이다."라고 하고18) "13대 근초고왕, 14대 근구수왕의 '근(近)'자는 5대 초고왕, 6대 구수왕과 구별하기 위하여 관(冠)한 것이고 초고왕과 구수왕은 역사상 실재한 왕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19) 이 말을 제대로 반박할 만한 반도 사학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이 점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베일에 쌓인 백제 건국의 비밀을 풀어갑시다. 북위의 사서인 『위서(魏書)』이전의 중국의 역사서, 예를 들면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진서(晋書)』『삼국지』등의 동이전(東夷傳)에 보면 백제(百濟)가 나오지 않고 부여(夫餘)라고만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의 여러 역사서들 가운데 백제와 동시대에 가까운 기록들인 『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등에는 백제(百濟)라는 말이 없습니다. 반도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로라면 건국한 지 이미 2백년이나 지난 나라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서들 가운데 백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등장하는 사서가 바로 남북조 시대 『송서(宋書)』입니다. 송나라(420~478)는 사마씨의 동진(東晋)을 이은 한족의 왕조로 『송서』는 머릿글(自序)에서 보면, 제(齊)의 영명(永明) 5년(487)에 칙명을 받아 편찬에 착수하여 이듬해에 본기와 열전이 완성되었고 후에 지(志)가 추가되어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송서』는 송나라가 멸망한 이후 바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송서』를 포함하여 『남제서(南齊書)』『위서(魏書)』등에는 백제가 등장합니다. 물론 『송서』 이전에 백제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국체를 가진 나라로 열전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송서』와 같이 열전(列傳)의 하나의 항목이 아니라 '백제'라는 말 자체가 처음 등장한 것은 4세기 중반 이후 입니다. 즉 반도 사학계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백제가 건국한 지 무려 360년 이상이 되어서야 기록에 등장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진서(晋書)』에 "342년 구려와 백제와 선비의 우문, 단부 등의 사람들이 모두 병력들을 옮겨서"라든가20) "372년 춘정월 백제와 임읍왕(林邑王)이 각각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21) 이들 기록은 백제라는 항목이 없고 극히 단편적인 사실만 기록되어있는데 그것도 대개는 4세기 중후반이라는 것입니다.22)
『송서』에 백제라는 이름의 국체(國體)가 제대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적어도 5세기 중엽까지도 백제보다는 부여로 인식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백제가 현실적으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미한 소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6세기에는 바로 남부여(538 : 성왕 16년)로 바뀌고 맙니다.
일부에서는 중국 측의 사관의 나태함이나 편견 또는 변방민의 역사이니 대수롭지 않게 묘사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 시기에 이미 역사학이나 사관의 기록 체제가 많이 발달해 있는 상태인데도 (『삼국사기』에 의거한다면), BC 18년에 건국하여 무려 3~4백년 건재한 나라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은 그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후한서』는 남북조 시대에 편찬되었고 『진서』는 당나라 때 편찬되었으니 백제의 건국 기점으로 본다면 무려 8백년이 지나서 편찬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백제를 건국했다는 말보다는 부여의 분국이 끊임없이 만들어져서 원래의 부여가 멸망하더라도 그 부여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했다고 해야 맞는 말입니다.
여러 사서들은 백제를 건국한 지역을 대방(帶方) 지역 즉 울구태의 남부여(요동부여)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북사(北史)』에는 "백제는 처음으로 그 나라를 대방의 옛 땅에 세웠다"23)고 하고 『수서(隋書)』에도 이 기록은 그대로 있습니다.24) 여기서 말하는 대방은 황해도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 만주 지역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대쥬신을 찾아서』2 (2006) 16장에서 이미 충분히 고증하였으므로 생략합니다.
백제의 시조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필자는 『대쥬신을 찾아서』(2006)를 통해서 백제의 시조가 부여왕 울구태(蔚仇台)임을 충분히 고증하였습니다. 즉 백제의 시조가 요동·만주 땅의 부여왕 울구태라는 것은 백제의 건국이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 반도의 사학계가 한반도에서 온조·비류가 백제를 건국해서 남북조의 위기 상황에서 서로 연횡 합종하여 강력한 백제로 거듭났다는 논리는 철저히 사실을 무시하고 신화적인 요소만으로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물론 이 왜곡의 주체는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이전의 백제왕조가 1차적으로 서술한 사료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말해서 고주몽의 아들들이 내려와 한강유역에 백제를 건국하여 대국 백제를 건설했다는 것은 확실히 신화라는 것입니다(고주몽의 실존성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거론할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요동 만주 지역에서 부여왕 울구태가 백제를 건국했다는 것은 부여왕이 요동 만주 지역에서 보다 강력한 새로운 국가를 준비했다가 국가적 위기를 맞아 한강으로 이동해왔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단서가 됩니다.
결국 만주의 부여계가 망국적 상황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해온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망국적 상황이란 제가 『대쥬신을 찾아서』(2006)를 통해 이미 고증했듯이 위나라에 의한 요동정벌을 말합니다. 만주 부여계의 한반도에로의 이동은 한강유역에 선착한 부여계와 무관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도 울구태(蔚仇台)라고 새롭게 볼 필요도 없이 동명(東明)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백제는 존재하지 않았고 부여계인데다 울구태는 부여왕이므로 '부여의 시조 = 백제의 시조'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한 가지는 백제의 모든 왕들이 하나같이 시조 동명왕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설령 중시조가 있다고 해도, 그 중시조는 시조에 제사를 지낼 것이 아닙니까? 중시조에 대한 제사는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그 후손들이 지내는 제사지요). 즉 부여의 시조와 백제의 시조가 완전히 같지요. 다만 그 중시조(中始祖)는 울구태이며 반도에 일찍 남하했던 무리들이 온조와 비류라는 것이고 이들은 후일 요동과 만주지역의 부여세력과 연합하여 부여계의 국가로 다시 태어나는데 그 이름이 백제였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만주나 요동 지역으로부터 이주하는 사람들과 토착민 사이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 덕업(德業 : 왕업)을 일신한다는 의미에서 백제(伯濟)라는 말을 사용하되 좀 변경된 이름인 백제(百濟)를 사용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국호도 6세기에 들어서 남부여(538)로 다시 바뀌어 원래로 돌아갑니다. 결국 백제라는 용어가 국제적으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아마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까지 많아도 1세기 남짓할 것입니다. 참고로 만주지역의 부여가 완전히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 것은 494년입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부여의 정통은 반도로 이전되게 됩니다.
부여계가 백제라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민족의 원래 이름으로 돌아가자는 성왕의 부여 중흥의 논리는 결국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의한 것입니다. 성왕은 백제를 버리고 부여를 선택했으며 그 부여를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결합시킵니다. 이로써 쥬신의 역사상 쥬신의 뿌리를 유지하면서 가장 세련된 국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문화국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고 이것은 이내 열도로 연장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백제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도 없고 반도부여(백제)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요동만주의 부여계가 한강으로 이주하여 한강유역에 이미 정착했던 약소한 온조계를 정복하는 것 역시 평화적인 방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사람의 몸에서 빼낸 혈액도 후일 수혈을 받게되면 몸이 이를 거부하는 현상이 생기듯이 '권력과 생존'이라는 문제는 형제라고 예외일 수만은 없습니다. 다만 강력하고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채 남하하였기 때문에 이 과정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요동의 부여계는 세련되고 체계적인 한족(漢族)의 행정원리나 사회구성의 운영원리를 깊이 터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강 유역의 소수 부여계를 제압하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삼국지』「공손도전」에 따르면 공손씨와 부여계는 서로 연합하여 중원 정벌을 도모하기도 할 정도로 포부가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필자 주
(10) 이 내용은 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해냄 : 2006) 48~85쪽 참고.
(11) 국사편찬위원회.『국사』(교육인적 자원부 : 2005)
(12) 변태섭 『한국사통론』(삼영사 : 2001) 79쪽.
(13)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 『백제사 총론』(충남역사문화연구원 : 2007) 16쪽.
(14)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 , 앞의 책, 62쪽.
(15)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 , 앞의 책, 64쪽.
(16)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 , 앞의 책, 34쪽.
(17) 『三國志』「東夷傳」韓傳
(18) 末松保和『日本書紀上朝鮮史關係』(岩波書店 : 1967)
(19) 末松保和『任那興亡史』(1956) 58쪽.
(20)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爲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使不得散在居人,知國之虛實."(『晋書』券109「慕容皝載記」)
(21) "二年春正月辛丑, 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晋書』卷9 帝紀第9 )
(22) 『진서』는 646년 방현령(房玄齡) 등이 당태종의 칙령을 받들어 편찬한 정사로 진나라를 기점으로 보면 300여년이 지나긴 했으나 당시에 남아있던 많은 『진서(晋書)』들을 총 정리한 결과물이다.
(23) "始立國于帶方故地"(『北史』「百濟傳」)
(24) "始立其國帶方故地"(『隋書』「百濟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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