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같은 날 벌어진 YTN, MBC의 '별난 방송'은 '언론독립'을 위해 싸운 그 자신에게도 일종의 상처였던 듯했다. YTN 노조원들은 '욕설'까지 퍼붓는 선배의 모습에, 방송 카메라에 비치는 '공정방송' 팻말을 보며 울분 섞인 쓴 웃음을 지었고 한 MBC 시사교양국 PD는 "방송만 하고 싶다"고 씁쓸해 했다.
둘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 탄압으로 생긴 상처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살신인 셈. 그러나 최선을 다해 만들어온 프로그램에 이른바 '파행'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것을 각오해야 하고, 또 자신이 앵커로 앉아 진행했던 스튜디오 뒤에서 '공정방송' 팻말을 들어야하는 속이 편할 리 없다. '프레스 프렌들리'를 공언한 이명박 정부 시대에 언론 장악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언론사 조합원들의 남모를 비애다.
MBC와 YTN이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까닭
MBC나 YTN의 투쟁을 보면 자연스레 KBS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같은 방송인으로서 보여주는 소신과 열정의 차이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이 이명박 정부에 맞서 언론장악 저지투쟁에 동참했더라면'이라는, 안타까운 가능성 때문이다.
KBS 노조 집행부 스스로는 이미 망각한듯 하지만 노조는 지난달 14일부터 18일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 저지를 위한 총파업 찬반투표를 벌여 투표율 82.1%에 85.5%의 찬성률로 총파업을 가결시킨 바 있다. 그러고보니 지난 3일 KBS 젊은 기자 170명이 노조 집행부에'이병순 사장이 낙하산 사장인지 아닌지'를 묻는 조합원 총회를 개최하자고 촉구했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이때 MBC 노조 박성제 위원장은 "KBS가 파업하면 MBC도 연대 파업에 나서겠다"고 했다. 그는 "KBS, MBC, SBS, EBS, YTN 등 최소한 언론노조 산하 방송사 노조가 연대 파업에 참여하는 투쟁을 기대한다"고도 했다. 연대 파업에 MBC 조합원 다수가 찬성했을지는 투표를 해봐야 아는 일이지만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까지 낸 MBC의 절박감을 볼 때 연대 파업은 기대해볼 만한 것이었다.
KBS와 MBC의 연대 파업만 이뤄져도 그 영향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총파업을 가결시킨 YTN 노조가 동참하고 <지식e채널>에서 광우병의 기초 상식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담당 PD가 보복성 인사조치를 당한 EBS로 확대됐다면, 또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으로부터 '공영방송보다 민영방송이 조종하기 쉽다'는 망언을 들은 SBS 노조로 확대됐다면 어땠을까.
역사에 '만약'은 의미 없다지만, 만약 KBS가 '낙하산 사장 저지'를 위한 불꽃을 피웠다면 전선은 최소한 MBC와 YTN으로 이어지는 공동투쟁으로 번졌을 것이고 오래지 않아 KBS노조가 칭송해 마지않는 1990년 방송민주화 투쟁에 버금가는 사건이 됐을 것이다. KBS '4월 투쟁' 당시에도 노조가 파업을 벌이던 KBS 본관에는 전투경찰이 투입됐고 다음날 MBC 노조는 이에 항의해 즉각적인 연대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이들의 투쟁으로 정부의 '언론 장악'의 실체를 알게된 국민들의 지지가 뒷받침 됐음은 물론이다.
깨어진 연대의 칼날은 누구에게로…부메랑 효과?
KBS 노조의 논리에 따르면 이병순 사장은 낙하산 사장이 아니고, 명백한 낙하산 사장인 구본홍 씨에 대해선 YTN 노조가 선도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으니 '이 정도면 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이미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것처럼 하반기에는 대대적인 방송구조 개편이 예고되어 있는 상황에서 날아가 버린 연대의 틀은 아쉽기만 하다.
각 방송사 노조, 언론관련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입모아 말하듯 이미 가속도가 붙은 방송법 시행령 개정이나 KOBACO 해체, KBS2TV-MBC 민영화, KBS1TV 관영방송화 등은 개별 방송사, 개별 단체 수준에서 대응할 수 있는 범주의 문제가 아니다. '낙하산 투하'와는 규모도, 여파도 차원이 다른 문제다. 게다가 현재는 한나라당이 입법-사법-행정을 모두 장악한 '일당 독재' 혹은 정당 정치마저 무시하는 '청와대 무당독재'의 상황이라 이러한 독주를 견제할 마땅한 세력이 없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방송 언론사들이 힘을 합하는 연대가 이뤄졌다면 민영화의 파고 속에서 누구보다 KBS-MBC 스스로에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감사원이 '방만 경영'을 지적한 보고서는 누구를 겨냥한 것이며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KOBACO 해체, KBS2TV 민영화의 직격탄은 누구에게 갈 것인가?
그러나 KBS는 "고용안정", "생존권 확보" 등을 외치며 원칙을 버렸고, 연대의 틀을 깼다. 그야말로 소탐대실, 자신을 보호해줄 '방패'를 깨어버린 것이고 밥그릇 지키려다 밥상째 엎어버린 셈이다. 그 결과 '언론 장악 저지 투쟁'의 최전선에는 공영방송 KBS 노조가 아닌 '보도 전문 채널' YTN 노조가 외로운 투쟁을 하게 됐다.
KBS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머지 않아 이명박 정부가 이병순 사장을 앞세워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KBS2TV 민영화 등을 추진한다면 물론 KBS노조는 최전선에 서서 싸우게 될 것이다. 전국언론노조 등 KBS노조와 대립해온 시민사회단체들 역시 'KBS 지키기'에 나설 것이다.
그러나 그때 KBS 노조가 외치는 '공영방송 사수' 구호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호소력 있게 다가올까? 특히 요즘 KBS는 미심쩍은 '방송 사태'가 적지 않은데 KBS 노조는 이렇다할 대응이 없다. <뉴스9>에서 불교계 집회를 전하며 "어청수 퇴진" 팻말에서 "퇴진하라"는 구호를 삭제하고, 조계사 앞에서 벌어진 '식칼 테러' 사건을 단신으로도 다루지 않았는데도 노조에서 성명 하나 내지 않았다. 정연주 사장 시절 '탄핵 방송'과 송두율 특집 다큐멘터리 등을 '편파 방송'이라고 몰아붙이던 때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이런 KBS가 민영화 국면을 맞아 '최전선에 서겠다'며 공영방송 사수를 외친다면 '제 밥그릇 지키기에만 열심'이라는 비야냥부터 나오지 않을까? 이 경우 KBS 노조는 그간 '언론 독립'을 소홀히 해 '공영방송의 중요성'과 '민영화의 문제점' 등을 국민에게 제대로 각인시키지 못한 책임 또한 져야 할 것이다.
만약 KBS가 원칙과 신념을 지켜 낙하산 사장 저지 총파업을 벌였다면, 그리하여 제2의 방송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면 과연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던 촛불 시민들은 지금처럼 KBS를 외면했을까. KBS인들이 석달이 넘도록 자신의 직장 앞에서 끝끝내 살아있는 촛불을 목격하는 것처럼 답은, '아니다'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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